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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엥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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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20. 11. 28, 프로이센 라인 바르멘
사망 1895. 8. 5, 런던
국적 독일

요약 독일의 사회주의 철학자.

엥겔스(Friedrich Engels)

독일의 사회주의 철학자

ⓒ ArtMechanic/wikipedia | Public Domain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카를 마르크스의 가장 가까운 동료로서 마르크스와 함께 현대 공산주의를 세웠다. 두 사람은 〈공산당 선언 Manifest der Kommunistischen Partei〉(1848)을 공동집필했으며 엥겔스는 마르크스가 죽은 뒤 〈자본론 Das Kapital〉 제2·3권을 편집했다(마르크스주의).

엥겔스의 초기생애

엥겔스는 중도 자유주의적 정치관, 프로이센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충성, 확고한 프로테스탄트 신앙 등을 가진 가정환경 속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바르멘에서 직물공장의 소유주였고 또 영국 맨체스터에 있는 '에르멘앤드엥겔스' 면방직 공장의 동업자였다. 엥겔스는 가족의 전통적 가치를 위협한 혁명 목표를 공공연히 추구하고 나선 뒤에도 집에서 재정적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그가 무척 사랑한 어머니의 영향력이 아버지와 아들의 끈을 유지해준 요인이었을 것이다. 재능은 있지만 약간 반항적인 아들을 기르는 데 필요하다고 생각한 훈육 행동 외에 아버지가 엥겔스에게 자기 뜻을 강요한 유일한 일은 그의 학교 진로를 결정하는 일이었다.

엥겔스는 김나지움에 다녔으나 졸업하기 1년 전에 중퇴했다. 아버지가 그의 장래 계획이 너무 불확실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인 듯하다. 엥겔스는 시를 쓰는 데 재주가 있었으나 아버지는 그가 신흥 사업분야에서 일해야 한다고 고집했다. 그래서 엥겔스는 3년 동안(1838~41) 브레멘에 있는 수출회사에 들어가 사업실무경험을 쌓았다.

브레멘에서 엥겔스는 그의 중년기의 특징인 이중생활 능력을 보이기 시작했다.

정규시간 동안에는 사업견습생으로서 유능하게 일했다. 그는 사교적인 사람으로 합창단에 가입했으며 유명한 라츠켈러(시청의 지하식당)를 자주 방문했고, 수영을 잘 했으며 펜싱과 승마도 했다(여우 사냥에서는 대부분의 영국인보다 앞섰음). 또 외국어 실력을 쌓아 여동생에게 자기가 24개 언어를 안다고 자랑하기도 했다. 한편 개인적으로 그는 자유주의적·혁명적 서적, 특히 루트비히 뵈르네, 카를 구츠코프, 하인리히 하이네 등 '청년 독일인' 작가들의 금서에 대한 관심을 키워갔다.

그러나 곧 그들의 사상을 미숙하며 편협하다고 거부했고, 신학자·역사가인 브루노 바우어와 무정부주의자 막스 슈티르너가 속한 좌파 지식인 집단인 '청년 헤겔 학파'가 해설한 좀더 체계적이고 포괄적인 헤겔 철학을 선호했다.

청년 헤겔 학파는 원리적으로 합리적 진보와 역사 변화가 서로 대립하는 견해들의 갈등에서 시작하여 새로운 종합으로 끝난다고 주장하는 헤겔의 변증법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비합리적이며 시대에 뒤떨어지고 억압적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비판함으로써 진보와 변화의 과정을 앞당기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그들이 가장 먼저 공격한 대상은 그리스도교의 기초였으므로 그들은 불가지론적 경향을 지닌 엥겔스가 전투적 무신론자로 돌아서는 데 기여했다.

이 일은 비교적 쉬웠다. 왜냐하면 그무렵 엥겔스는 혁명에 대한 신념이 확고하여 어떤 방향으로든 치고 나갈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브레멘에서 엥겔스는 언론 분야에서도 재능을 보였다. 그는 가족의 감정을 상하지 않게 하려는 듯 프리드리히 오스발트라는 가명으로 논설을 발표했다.

그는 날카로운 비판능력과 명료한 문체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자질은 훗날 마르크스와 함께 혁명의 목표를 분명히 밝히는 데 기여했다.

1841년 바르멘으로 돌아온 뒤 베를린 포병연대에 1년간 지원병으로 입대하는 바람에 그의 장래문제는 잠시 보류되었다. 그에게 보충병으로 훌륭하게 일하는 데 방해가 될 만한 반(反)군사주의적 성향은 없었다. 사실 군사문제는 훗날 그의 전문 분야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그때 친구들은 자주 그를 '장군'이라고 불렀다. 군복무 덕분에 엥겔스는 베를린에서 훨씬 더 강한 관심사를 추구할 시간을 얻었다. 형식적 자격은 갖추지 못했지만 그는 대학에서 강의를 들었다. 또 프리드리히 오스발트라는 이름으로 낸 논설 덕분에 '자유'라는 청년 헤겔주의자 모임에 가입할 수 있었다. 이 모임은 이전에 카를 마르크스가 자주 방문한 '박사 클럽'이었다. 이곳에서 엥겔스는 철학 논쟁, 주로 종교에 맞선 논쟁에서 무서운 선전가로 인정받았다.

엥겔스의 중기생애

공산주의로 전환

1842년에 제대한 뒤 엥겔스는 자기를 공산주의로 돌아서게 한 모제스 헤스를 만났다.

부유한 유대인의 아들로 급진적인 운동과 출판을 주도하던 헤스는 엥겔스에게 헤겔 철학의 논리적 귀결이 공산주의임을 보여주었다. 또 헤스는 선진 산업, 급성장하는 프롤레타리아트, 계급갈등의 징후 등을 갖춘 영국이 미래의 대변동에서 해야 할 역할을 강조했다. 엥겔스는 맨체스터에 있는 집안 공장에서 사업훈련을 계속한다는 명분으로 영국에 갈 기회를 잡았다. 1842~44년 영국에서 엥겔스는 다시 성공적으로 사업을 일구어갔으나 시간이 얼마쯤 지나자 자신의 진짜 관심사를 추구했다.

이 관심사는 대륙과 영국의 잡지에 공산주의에 관한 글을 쓰고, 영국의 경제·정치 상황에 관한 책과 의회기록을 읽고, 노동자들과 어울리고, 급진적인 지도자들과 만나고, 산업의 성장과 노동자의 비참한 지위를 강조할 수 있는 영국 역사를 쓰기 위한 자료를 모으는 일 등이었다.

맨체스터에서 그는 교육받지 못한 아일랜드 노동자 메리 번스와 계속 애정을 나누었으며, 결혼식은 거부했지만 남편과 아내로 함께 살았다.

사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우정에 1차례 심각한 긴장이 일어난 것은 메리 번스가 1863년에 죽고 이 소식을 들은 마르크스의 반응이 너무 무심하다고 엥겔스가 느낀 때였다. 그러나 그뒤로 마르크스는 더욱 사려깊게 행동했고, 엥겔스가 훗날 메리의 여동생 리지와 비슷한 관계로 함께 살 때 마르크스는 항상 편지 마지막에 '리지 부인' 또는 '번스 부인'에게 인사말을 붙이는 등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엥겔스는 리지가 임종할 때에서야 결혼승낙을 해주었다.

1844년 엥겔스는 마르크스가 파리에서 편집하던 〈독일-프랑스 연보 Deutsch-Französische Jahrbücher〉에 논문 2편을 기고했다. 이 논문에서 엥겔스는 과학적 사회주의 원리에 대한 초기 해석을 제시했다.

그는 자유주의 경제이론에서 모순으로 본 점을 폭로했으며, 사적 소유에 기초한 기존 체계가 '백만장자와 거지'로 이루어진 세계를 낳고 있음을 증명하고 나섰다. 장차 혁명이 일어나면 사적 소유가 없어질 것이고 '인류는 자연 및 자기자신과 조화를 이룰 것'이라고 보았다.

마르크스와의 동맹

엥겔스는 바르멘으로 가는 길에 파리에 들러 10일 동안 머물면서 이미 쾰른에서 만났던 마르크스를 방문했다.

이 방문은 사회주의 운동을 추진하는 영원한 동맹을 낳았다. 엥겔스는 바르멘에 돌아와 훗날 마르크스가 전문가가 된 분야에서 고전인 〈영국 노동계급의 상태 Die Lage der arbeitenden Klasse in England〉(1845)를 출판했다. 그들의 첫번째 주요 공동저작은 〈독일 이데올로기 Die deutsche Ideologie〉(1845)였으나 이 책은 80년 뒤에야 출판되었다.

매우 논쟁적인 이 비판서에서 그들은 이전의 동료인 몇몇 청년 헤겔주의자를 공공연히 비난하고 비웃었으며 나아가 혁명의 필요를 거부한 다양한 독일 사회주의자들을 공격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자신들의 건설적인 생각을 항상 단편적으로, 그리고 그들이 비난하는 견해에 대한 교정으로써만 여기저기에 끼워넣었다.

1845년 브뤼셀에서 마르크스를 다시 만났을 때 엥겔스는 공산주의의 궁극적 승리를 주장한 마르크스의 새로운 경제적·유물론적 역사 해석을 격찬했다.

그해 여름 엥겔스는 마르크스를 안내하며 영국을 여행했다. 그뒤 파리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사회생활을 했지만 그의 주된 목적은 크게 방해받지 않고 진행되었다. 이 목적이란 독일에서 이주해온 다양한 노동자 집단, 예를 들어 사회주의자 비밀집단, 의인동맹(義人同盟) 등과 프랑스의 사회주의 지도자들을 자신과 마르크스의 견해로 개종하는 일이었다.

1847년 의인동맹이 런던에서 최초의 대회를 열었을 때 엥겔스는 이 동맹이 공산주의자 동맹으로 전환하는 데 기여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런던에서 열린 제2차 공산주의자 대회에서 자기들의 견해가 채택되도록 함께 설득작업을 했다. 두 사람은 공산주의의 원리와 정책에 관한 선언서를 기초하는 권한을 부여받았으며 이 선언서는 1848년 〈공산당 선언〉으로 나왔다.

이 책은 엥겔스가 이전에 〈공산주의의 원칙 Grundsätze des Kommunismus〉(1847)에서 준비한 예비 견해를 많이 담고 있었지만 대부분은 마르크스의 저작이었다.

독일 정부가 권위주의적이고 거의 봉건적인 정치체제를 내던지고 대신 입헌적·대의적 정부형태를 받아들임으로써 촉진된 1848년 혁명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생애에서 중대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그들이 혁명에 직접 참가한 유일한 기회였고, 그들이 혁명을 공산주의의 승리로 전환하는 목적을 가진 유연한 혁명전술가임을 입증했다.

그들의 주요수단은 마르크스가 쾰른에서 엥겔스의 유능한 도움을 받아 편집한 〈신(新) 라인 신문 Neue Rheinische Zeitung〉·〈민주주의 기관 Organ der Demokratie〉이었다. 당시 민주주의의 외피를 쓰고 있던 이 당기관지는 그들의 목적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그들은 이 당기관지를 통해 변화하는 사건들에 직면하여 매일매일의 행동 지침을 시달하고 동기를 부여할 수 있었고 정부·당·정책·정치가 등을 지속적으로 비판할 수 있었다.

혁명이 실패한 뒤 엥겔스와 마르크스는 런던에서 다시 뭉쳐 공산주의자 동맹을 재조직했고, 또다른 혁명이 곧 일어날 것이라는 신념으로 공산주의자를 위한 전술적 지령을 기초했다.

그러나 어떻게 하면 줄어든 수입을 만회할 것인가가 곧 엥겔스의 주요과제가 되었다. 엥겔스는 자신과 마르크스의 생계를 위해 맨체스터에 있는 에르멘앤드엥겔스사의 사무실에서 하급직위를 얻었고 결국 이 사업의 본격적인 동업자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공산주의 원리와 자본주의 비판이 회사의 이윤추구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면서 다시 한번 사업가의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그리하여 그는 마르크스에게 꾸준히 돈을 보낼 수 있었다. 이 돈은 보통 5파운드짜리 지폐로 보냈으나 나중에는 액수가 훨씬 커졌다. 1869년 엥겔스는 사업동업권을 팔아 그 대가로 충분한 돈을 손에 넣었다. 이 돈으로 그는 1895년 죽을 때까지 편하게 살 수 있었고, 마르크스에게 매년 350파운드의 보조금을 주고 뜻밖의 사건을 처리하는 데 드는 비용도 모두 부담하겠다고 약속할 수 있었다.

맨체스터에 살 수밖에 없었던 엥겔스는 런던에 있는 마르크스와 꾸준히 편지를 주고받았고 그를 위해 신문 논설도 자주 썼다.

그가 쓴 논문들은 〈뉴욕 트리뷴 New York Tribune〉(1851~52)지에 마르크스의 이름으로 실렸다가 나중에 엥겔스의 이름을 달고 〈독일에서의 혁명과 반혁명 Revolution und Konterrevolution in Deutschland〉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두 공산주의 선전가가 전문분야를 공식적으로 나누어 설정한 적은 없지만 엥겔스는 민족문제와 군사문제에 전문가였고 어느 정도는 국제문제와 과학에도 정통했다.

또 마르크스는 경제문제를 분명히 이해하기 위해, 특히 사업활동과 산업운영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엥겔스에게 자주 의존했다.

마르크스의 가장 중요한 저작인 〈자본론〉은 부분적으로 맨체스터산 제품이었다. 마르크스는 엥겔스의 글쓰는 재주를 빌려 그들의 공동 견해를 '대중화'하는 데 도움을 얻었다. 마르크스는 훌륭한 이론가였지만, 유능한 마르크스주의 세일즈맨으로서 〈자본론〉에 대한 해설을 통해 이 책에 관심을 쏟게 하고 이 책이 그들의 '성서'라는 생각을 불어넣은 사람은 바로 엥겔스였다.

엥겔스는 거의 혼자서 〈오이겐 뒤링 씨의 과학변혁 Herrn Eugen Dührings Umwälzung der Wissenschaft〉(1878)을 썼다. 이 책은 마르크스의 사상을 선전하는 데 가장 크게 기여했을 것이다. 이 책은 독일의 사회민주주의자들 사이에서 마르크스가 차지하고 있던 지위를 빼앗으려고 위협한 베를린대학교 교수 카를 오이겐 뒤링의 영향력을 분쇄했다.

엥겔스의 말년

마르크스가 죽은 뒤 엥겔스는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에 관한 제1의 권위자로 활동했다. 이따금 다양한 주제에 관한 글을 쓰고 마르크스 저작의 새로운 판에 서문을 쓰면서, 마르크스의 미완성 초고와 다듬지 않은 노트를 바탕으로 〈자본론〉 제2·3권을 완성했다. 그동안 독일의 사회민주주의자들뿐만 아니라 세계의 추종자들과 폭넓게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마르크스의 이미지를 길이 남게 만들었고 '충실한 신도들' 사이에 복종심도 어느 정도 길러냈다.

그러나 갑자기 암에 걸려 활동을 중단했고 얼마 뒤 죽었다. 살아 있는 동안 엥겔스는 좀더 온건한 형태로 마르크스가 받은 것과 거의 같은 공격과 존경을 받았다.

그는 영국신사의 풍모를 갖춘 도시풍의 인물이었으며 일상적으로는 삶에 대한 큰 열의를 가진 쾌활하고 농담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모욕이나 심지어 폭력에 대해서도 곧바로 반응하는 결투예법을 갖추고 있었다. 그는 마르크스와 '동료관계'에서 남의 욕을 도맡아 하는 사람으로서 매우 공격적이고 무자비하게 행동하기도 했다.

1848년에는 여러 친구가 마르크스에게 엥겔스와의 관계를 부인하라고 설득했으나 실패한 적도 있었다.

엥겔스가 정당하게 평가받은 공산주의 나라들을 제외하면 후세 사람들은 대체로 그의 중요한 역할을 분명히 밝히지도 않은 채 그와 마르크스를 한덩어리로 묶어 다루었다. 현재 엥겔스와 마르크스의 차이를 밝히려는 시도가 관심을 끌고 있는데, 이를 위해 그의 저작들이 세밀히 연구되고 있다. 그결과 몇몇 학자는 엥겔스의 저작과 영향력이 그들의 관점으로 본 '진짜 마르크스주의'의 왜곡과 일탈에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는 정작 마르크스는 엥겔스 때문에 자기 관념과 견해가 중요하게 왜곡되었다고 느낀 적이 없었음을 인정한다. 이 견해를 뒷받침하는 것은 마르크스주의 정책을 세우기 위한 긴밀한 공동작업을 보여주는 마르크스와 엥겔스 사이의 편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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