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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건축운동은 비역사적인 기능주의에 바탕을 둔 건축을 창조하기 위한 시도로 이루어졌다.
새로운 공간 개념은 새로운 건축이념과 재료로 실현 가능하다는 믿음으로 19세기 건축 양식의 다양성을 거부하고, 20세기 건축은 근대적인 인간에게 합당한 건축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근대미술).
독일공작연맹(Deutscher Werkbund)은 디자인을 맡은 예술가와 제품을 생산하는 산업가 사이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H. 무테지우스를 중심으로 결성되었다. 그후 P. 베렌스가 1907년 아에게(AEG)회사의 건축 고문에 취임해 근대 디자인을 주도하면서 더욱 발전했는데, 1914년에는 쾰른에서 최초로 공작연맹 전시회를 개최해 새로운 건축을 선보였고 이념논쟁도 벌였다.
1927년에는 슈투트가르트에서 바이센호프 집합주택단지 주택전시회를 개최하여 외국의 여러 선도적인 건축가들이 참가했다. 당시 발터 그로피우스, 르 코르뷔지에, 루트비히 미스 반 데어 로에 등은 베렌스의 사무실에서 일하며 근대건축을 수업했다.
아돌프 로스는 1908년 논문 〈장식과 죄악〉에서 그 시대 문화에 대한 조형적인 가치가 없는 장식은 죄악이라고 주창하며, 건축가들은 실제와 내용이 분리된 허구의 건축을 해서는 안된다고 역설했다. 빈에 있는 슈타이너 주택(1910)은 그의 근대건축 이념이 표현된 대표작이다.
그로피우스는 1915년 바이마르 미술공예학교의 교장이 되었으며, 1919년에는 이를 미술 아카데미와 통합해 바우하우스로 발전시켰다. 그는 수공예 방식보다는 예술과 공업과의 협력을 통해 조형예술을 종합화해야 한다는 건축과 건축 교육에 대한 확고한 사상을 확립하고 1923년에 건축선언문을 발표했다. 바우하우스는 1925년 데사우로 이전하여 1925~26년 선구적인 새로운 바우하우스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신축한 바우하우스 교사를 통해 근대건축의 본보기를 보였다.
1928년에는 H. 마이어가, 1930년에는 미스가 바우하우스 교장직을 이어받았다. 미스는 자연적이며 우아하고 단순한 질서를 표현한 디자인을 발전시켰다. 바우하우스는 1933년 나치에 의해 폐교당할 때까지 가장 중요한 건축학교였는데, 그후 강제 출국당한 많은 바우하우스 교사들은 전세계에 바우하우스 교육원리를 전파했다. 그로피우스는 1934년 영국으로 이주했다가 1937년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대학교에서 M. 브로이어와 함께 바우하우스 교육이념을 교과과정에 도입했다.
프랑스에서는 T. 가르니에가 재료·구조·구성 등을 새로운 경향으로 개척하고, 1901~04년에 '공업도시계획안'(Cité industrielle)을 제안하고 1917년 이를 발간했다.
그는 근대건축, 근대도시를 위해 철근 콘크리트를 사용할 것을 주장했다. 1903년 A. 페레는 파리의 프랑클랭가(街) 공동주택에서 철근 콘크리트의 기술적인 가능성을 과시했다. 한편 미래파 운동은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는데, 대표적인 건축가 산텔리아의 미래도시 설계가 1914년 밀라노에서 전시되었다. 그는 도시는 새로운 기술 시대의 상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미래도시에 대한 확고한 환경을 제시할 것을 역설했는데, 1914년 '미래파 건축선언'으로 발표되었다.
독일을 중심으로 1920~25년경에 전개된 표현주의 건축은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과 제2제국의 붕괴에 따른 혼란에 대한 반작용으로, 개인적인 차원에서 예술의 내적인 느낌을 철·유리·콘크리트를 사용해 표현하는 조형적인 외부형태를 추구했다. 관련 건축가는 B. 타우트, E. 멘델존 등이다.
1917년 레이덴에서 조직된 네덜란드의 데 스테일(de Stijl)은 예술 및 디자인 운동으로서, 큐비즘의 영향을 받아 서로 직교하는 직선과 단순하고 명확한 표면을 사용하며 더욱 추상적인 건축 형태 언어의 순수성을 추구했다.
이 운동에 참여한 대표적인 건축가는 J.J. 오우트, G. 리트벨트 등이다. 위트레흐트에 세운 리트벨트의 슈뢰더 저택은 데 스테일의 건축 내용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예이다.
르 코르뷔지에는 근대건축의 이론적인 기초가 된 〈건축을 향하여 Vers une architecture〉(1923)를 발간하고 국제주의 건축을 지지했다.
그는 주거·도시 문제에 관해 언급하고 이에 대한 새로운 제안을 했다.
볼셰비키 혁명 후의 소련은 1920년 V. 타틀린의 제3 인터내셔널 결성 이후 건축 모델은 자연보다는 기계적인 미학임을 주장한 구성주의 건축이 대두되었으나 1930년대에 스탈린 정부가 근대건축을 싫어하여 고전적이고 기념적인 건축 양식을 채택하자 쇠퇴했다.
1930년대 이후 근대건축은 유럽 전역에 확산되어 토목 분야에서는 R. 마야르의 아름다운 구조미를 보여주는 철근 콘크리트 교량들이 건립되었으며, 핀란드에서는 A. 알토가 지역에 맞는 근대건축을 전개했다.
미국의 시카고파 제2세대로는 F.L. 라이트가 가장 대표적인데, 그는 초원의 건축을 통하여 건물이 들어설 대지·지역·구조·재료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건축 배치와 평면, 특성 있는 공간주제 등이 돋보이는 유기적 건축을 설계했다. 그의 후기 작품인 펜실베이니아 주에 있는 낙수장(1936)은 대표작으로 평가받는다.
그로피우스가 바우하우스 총서 제1권으로 발간한 〈국제주의 건축 Internationale Architektur〉(1925), 1932년 뉴욕 근대미술관에서 열린 근대 건축 전시회, 그리고 H. 히치콕과 P. 존슨이 같이 쓴 〈국제주의 양식:1922년 이후의 건축 International Style:Architecture Since 1922〉의 발간은 근대건축의 국제화를 가속시켰으며, 기능주의 건축에 큰 영향을 끼쳤다.
입체파와 신조형주의 회화가 지닌 미학의 영향을 받은 기능주의 건축가들은 건축 역사를 배제하고 장식을 거부하며, 철과 유리와 콘크리트를 사용한 건축의 기능과 기계미를 강조했다. 대표적인 건축가는 발터 그로피우스, 루트비히 미스 반 데어 로에, 르 코르뷔지에, 리처드 노이트라, 필립 존슨 등이다(→ 국제주의 양식).
미스는 초기에는 실제 작품보다 사무소 건물 계획안(1919), 유리 마천루(1921), 일련의 벽돌조 전원주택안(1923) 등의 계획안으로 그의 건축방법을 탐구하여 제시했으며, 바르셀로나 국제박람회 독일관(1929)은 근대건축에서 기억될 가치를 지닌 중요한 건축이다.
1937년 미국으로 이주한 이후에는 일리노이공과대학에서 건축교육을 하며 시카고를 중심으로 철과 유리로 된 격자형 입방체 형태의 건축을 추구했다. 1933년 이후 독일·이탈리아·소련을 탈출한 건축가들의 미국 유입으로 미국은 국제주의 건축의 중심지가 되었다. 르 코르뷔지에는 집합주택안을 제시한 도미노 주택 계획안(1914~15), 시트로앙 주택안 전시(1922), 새로운 건축의 5가지 요점의 제시(1926), 국제연맹 설계경기 응모안(1927), 사부아 주택(1931) 등으로 근대건축을 체계적·논리적으로 전개했다.
근대건축국제회의(CIAM)는 S. 기디온, 르 코르뷔지에 등을 중심으로 1928년 스위스의 라사라즈 제1차 회의에서 결성되어 아카데미즘에서 건축을 해방시키고 건축과 도시 계획에서 시대가 요구하는 미학과 환경을 창조하기 위한 근대건축운동을 전개했다.
그후 1959년, 10차 회의를 끝으로 해체할 때까지 진보적인 건축가들 사이의 국제적인 교류를 활성화하며 근대건축과 도시계획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을 토론하고 주장했다.
제1·2차 세계대전 사이의 근대건축가인 그로피우스, 미스, 르 코르뷔지에, 라이트, 알토 등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지배적인 건축가로 활동했다. 또한 근대건축국제회의 해체 이후 J.B. 바케마, A. 반 아이크, 스미스슨 부부 등을 중심으로 결성된 '팀 10'(TEAM 10)에 참여한 건축가들은 근대건축에 회의를 품고 이를 보완, 발전시키는 새로운 건축을 시도했다.
1960년에 결성된, 아키그램을 중심으로 활동한 P. 쿡(1936~) 등의 건축가들은 잡지 〈아키그램 Archigram〉을 통하여 '가동적 개념'을 도입한 건축을 제시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건축에서는 상업 및 산업 사회의 상징으로 사무소 건물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뉴욕 시에 있는 '스키드모어-오윙스-메릴 사무소'의 레버 하우스(1952), 미스의 시그램 빌딩(1954~58) 등이 대표적이다.
1952년경부터 근대건축의 전환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는데, 초기에는 근대건축이 추구한 기능주의, 국제주의 양식에서 기념적인 형식주의로 바뀌면서 건축가들은 조소적인 형태와 공간 처리에 큰 관심을 가졌다. 라이트의 뉴욕 시 구겐하임 미술관(1956~59), 르 코르뷔지에의 마르세유 아파트(1946~52)와 롱샹의 교회(1950~55), 라투레트 수도원(1957~60), 우트손의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1956~73), 사리넨의 T. W. A. 공항(1956~62) 등은 대표적인 예이다.
르 코르뷔지에는 루치우 코스타, O. 니마이어 등 남아메리카의 건축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이즈음 활동한 근대건축의 다음세대 건축가로는 J. L. 세르트, E. 사리넨, L. 칸, I. M. 베이, P. 존슨, 단게 겐조, K. 로치, C. 펠리 등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규모가 큰 많은 건축물들은 거의 모두가 문화 센터, 교육기관, 연구기관의 발주로 지어졌다. 예를 들어 한스 샤룬의 베를린 필하모니 홀(1963), 루이스 칸의 리처드 의학연구소(1960), 예일대학교 브리티시 미술관(1969~74), 폴 루돌프의 예일대학교 건축학부 건물(1963), 렌초 피아노와 리처드 로저스의 퐁피두 센터(1971~77), J. 스털링의 슈투트가르트 미술관(1980~83) 등이 있다.
다른 한편 항공교통, 박람회, 운동경기장 건축 등도 제2차 세계대전 후의 건축의 발전에 기여했다. 단게 겐조의 1964년 동경 올림픽 체육관, 사리넨의 댈러스 공항, F. 오토의 몬트리올 박람회 서독관, B. 풀러의 미국관, M. 사프디의 주거관 67(Haitat 67), 그리고 오사카 엑스포 1970 등이 대표적이다. 고도로 발달한 건축구조 개념과 상상력을 바탕으로 건축을 탐구한 건축가로는 이탈리아의 P. 네르비, 미국의 풀러, 스페인의 E. 토로하와 F. 칸델라, 독일의 오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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