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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데어 로에

다른 표기 언어 Ludwig Mies van der Rohe 동의어 Ludwig Mies
요약 테이블
출생 1886. 3. 27, 독일 아헨
사망 1969. 8. 17, 미국 시카고
국적 독일/미국

요약 독일 태생 미국의 건축가.
본명은 Ludwig Mies.

미스 반 데어 로에(Ludwig Mies van der Rohe)

ⓒ Deutsche Bundespost Berlin/wikipedia | Public Domain

우아하면서도 단순한 그의 직선적 건축양식은 1920년대말에 등장한 국제주의 양식을 특징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건축사에 혁명적 공헌을 했던 미스의 중요한 초기 작품들 가운데 프리드리히가 사무용 건물(1919)과 유리 마천루(Glass Skyscraper:1921)는 건설되지는 않았지만 그 도면이 남아 있다.

후기 작품으로는 필립 존슨과 함께 설계한 뉴욕 시의 시그램 빌딩(1958)과 그의 마지막 작품인 베를린의 20세기 미술관(1968 준공)이 있다.

초기생애

루트비히 미스(그는 건축가로 기반을 잡았을 때, 어머니의 성인 반 데어 로에를 이름 뒤에 덧붙였음)는 유럽에서 가장 큰 역사적 도시의 하나이며 한때 카롤링거 왕조의 문화 중심지였던 독일의 아헨(또는 엑스라샤펠)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석공으로 작은 가게를 갖고 있었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를 도와 다양한 건조물 제작에 참여했으므로 재료의 성질에 대한 감각과, 건축학교에서는 배울 수 없는 숙련된 기능을 갖게 되었다. 미스는 정식 건축 교육을 전혀 받지 않았는데, 그는 이것을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긴 듯하다.

15세 때 아헨의 여러 건축가들의 견습공이 되어, 벽에 꽂아놓은 커다란 갈색 종이에 르네상스 장식을 목탄으로 스케치하는 일을 맡았는데, 석고제작자들은 그 스케치를 바탕으로 석회 장식벽을 만들었다. 미스는 이것을 힘들어했지만 덕분에 드로잉 솜씨가 늘었고, 이 솜씨는 결국 그당시의 가장 훌륭한 건축도면들을 낳는 밑거름이 되었다.

1905년 19세가 된 미스는 베를린의 한 건축가 밑에서 일하기 위해 베를린으로 갔는데, 이 건축가는 목조 건축설계를 전문으로 하는 사람이었다.

자신이 목재에 대해 너무 모른다는 것을 느낀 미스는 곧 그 일자리를 그만두고 당시 아르 누보 양식으로 작업하던 가구 디자이너인 브루노 파울의 견습공이 되었다. 2년 뒤에 미스는 첫번째 주문을 받았다. 전통적인 교외 주택을 설계해달라는 주문이었다. 그는 이 일을 완벽하게 해냈다. 당시 독일에서 가장 진보적인 건축가였던 페터 베렌스는 그의 완벽한 솜씨에 깊은 인상을 받고, 21세의 미스를 자기 사무실에서 일하게 했다.

그무렵 발터 그로피우스르 코르뷔지에도 베렌스의 사무실에서 막 일을 시작하고 있었다.

베렌스는 독일공작연맹의 주요회원이었기 때문에, 미스는 그를 통하여 '예술과 기술의 결합'을 옹호하던 예술가와 장인들의 단체인 이 연맹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독일공작연맹은 윌리엄 모리스와 존 러스킨에 의한 영국 미술공예 운동에 자극을 받아 창설되었다.

그러나 모리스가 산업혁명에 대한 낭만적인 거부감에서 중세의 장인정신을 되살리려고 애쓴 반면, 독일공작연맹은 역시 똑같이 낭만적인 열정으로 우상을 숭배하듯 과학기술을 환영했다. 필요한 것은 기계로 만든 물건(또는 건물)에 형태와 의미를 주는 것뿐이라고 독일공작연맹의 대변인은 선언했다. 산업시대에 걸맞게 새롭고 '기능적인' 이 구상은 결국 '총체적 문화'(Gesamtkultur), 즉 완전히 개혁된 인위적 환경 속에서 이루어지는 새로운 범세계적 문화를 낳게 되었다.

끊임없이 그리고 종종 이상화되어 논의된 이 개념은 계획이라기보다는 이상이자 신념이었다. 이 신념은 20세기 전반에 걸쳐 이루어진 건축의 '근대화' 운동을 이끌었다. 건축사가 헨리 러셀 히치콕과 건축가 필립 C. 존슨은 1932년에 출판한 〈국제주의 양식 International Style〉이라는 책을 통해 이러한 건축양식을 '국제주의 양식'이라고 이름 지었다.

베렌스는 감각적인 물결 모양의 아르 누보가 독일공작연맹이 기대하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곧 깨닫게 되었고 아르 누보 대신 19세기초의 독일 건축가 카를 프리드리히 싱켈의 순수하고 대담하며 단순한 신고전주의 양식을 높이 평가하기 시작했다.

강철과 유리로 된 신고전주의 양식의 베를린 모터 공장과,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독일 대사관(1911)을 비롯한 베렌스의 많은 작품들이 미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지만, '총체적 문화'의 건축을 추구하는 미스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 사람은 베렌스가 아니라 싱켈이었다. 미스는 평생 동안 싱켈의 건축이 갖고 있는 우아한 명쾌함이야말로 인간이 새로 이룩해야 할 환경의 형태를 가장 완벽하게 나타낸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준 또 한 사람은 네덜란드 근대 건축의 선구자인 헨드리크 페트루스 베를라헤였다.

베를라헤는 유럽 전위 예술가들을 그토록 감동시킨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미국 주택을 실제로 목격한 최초의 유럽인이었다. 베렌스는 유명한 미술품 수집가인 H. E. L. J. 크뢸러 부인의 대저택을 짓기 전에 나무와 범포로 실물 크기의 모형을 만들게 되었는데, 그 모형 주택건설을 감독하기 위해 미스를 네덜란드 헤이그로 보냈고, 미스는 그곳에서 베를라헤를 알게 되었다.

미스는 거기에서 1년을 머물렀는데, 그것은 크뢸러가 베렌스의 설계에 만족하지 못하여 미스 자신의 설계를 새로이 부탁했기 때문이다. 베렌스의 것보다 우아한 미스의 설계도 역시 건설되지 않았지만, 미스는 네덜란드에서 지내는 동안 베를라헤의 작품과 철학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베를라헤의 작품은 미스에게 벽돌에 대한 애착을 불러일으켰고, 네덜란드 거장의 철학은 미스에게 '건축의 본질'과 '구조적 정직성'에 대한 신념을 불어넣었다.

나중에 미스는 시카고에서 건축을 가르칠 때 학생들에게 '건축의 본질'을 정의하면서 "건축은 형태를 만들어내는 것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바란다"고 말하곤 했다. 미스는 어느 누구보다도 구조의 정직성을 중요하게 생각하여, 눈에 띄게 드러나거나 극적으로 과장된 기둥이 아니라 실제로 건물을 떠받치는 구조물을 자기 건물의 중요한 특징으로 삼았다.

중기생애

독일 제국에서는 대학 졸업자만이 장교가 될 수 있었기 때문에 미스는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사병으로 복무하면서 발칸 반도에서 다리를 놓거나 도로를 포장하는 일을 했다.

그가 1918년에 베를린으로 돌아왔을 때, 근대화 운동에 저항한 독일 제국은 패전으로 무너져 있었고, 나라는 온통 굶주림과 폭력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혁명의 혼란 속에는 새로운 희망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 희망은 모든 예술가와 지식인을 사로잡아 새로운 창조력의 거대한 폭발을 불러일으켰다. 바우하우스(바이마르에 갓 설립된 조형예술학교)의 선언문에 따르면 건축·그림·조각은 새로운 표현양식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을 뿐 아니라 좀더 다양하고 국제적인 것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림과 조각이 건축에 그토록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적은 일찍이 한번도 없었다. 건축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는 허무주의적이고 성상파괴적이며 합리주의에 대항하는 시각예술 및 문학운동이었던 스위스 취리히의 다다이즘, 직4각형과 원색의 사용을 특징으로 하는 기하학적 추상운동인 네덜란드의 데 스테일, 그리고 러시아의 그림과 조각 분야에서 일어난 비구상적 추상 운동인 구성주의와 절대주의 등이 있다.

미스는 이같은 소용돌이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그는 별로 사교적은 아니었지만, 11월 그룹의 지도자가 되었다(11월의 그룹). 이 그룹은 1918년 11월에 일어난 독일혁명을 기념하여 이름 지은 것이다. 그는 근대 건축의 개념을 널리 보급시키기 위해 애쓰는 체너 그룹에 가입했으며, 〈G〉(독일어로 '조형'이라는 뜻의 'Gestaltung'의 머리글자)라는 잡지의 창간에 참여하고 자금을 지원하는 한편 많은 이론적 계획안을 이 잡지에 발표했으며, 많은 전시회를 열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실제로 짓기 위해 설계된 건물은 하나도 없었고, 이 시기에 그가 설계한 중요한 건조물인, 살해당한 공산주의 지도자 카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에게 헌정된 표현주의적 기념물(1926)은 나치에 의해 파괴되었다.

이 시기에 미스가 설계한 주요작품들은 건물로 설립되지는 않았지만, 오늘날 뉴욕 현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일련의 도면과 스케치에 묘사된 이론적 설계안들은 그의 후기 작품의 전체적 범주를 미리 잘 보여준다. '프리드리히가 사무용 건물'은 유리로만 이루어진 건물을 짓기 위한 최초의 계획안이며, 미스는 이를 통해 '뼈대와 외피뿐인 건축'의 원칙을 확립했다.

'유리 마천루'는 이 개념을 곡선 형태에 적용하여, 건물 정면이 자신의 모습을 반사하도록 설계되었다. 이 설계도들은 둘 다 극단적인 단순함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그밖의 이론적 설계안들은 콘크리트와 벽돌 건축의 가능성과, 데 스테일의 형식과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개념이 갖고 있는 잠재력을 탐구하고 있다. 실제로 지어지지 않은 채 도면에만 남아 있는 작품들 가운데 그만큼 착상이 다양하고 건축학 발전에 많은 영향을 미친 작품은 거의 없다.

이 영향은 1927년 독일공작연맹이 슈투트가르트 근처의 바이센호프에서 전쟁 이후 처음으로 전시회를 열었을 때 분명히 드러났다.

미스는 그무렵 독일공작연맹의 부회장이 되어 있었는데, 이 전시회는 미스가 설계한 시범주택단지로 이루어져 있었다. 르 코르뷔지에와 미스를 비롯한 유럽의 주도적인 근대주의자 16명이 이 시범주택단지를 위해 총 33채의 다양한 주택과 아파트 건물을 설계했다. 무엇보다 바이센호프 전시회는, 전쟁 직후에 생겨난 다양한 건축학적 조류가 이제는 하나의 운동으로 통합되어 국제주의 양식으로 탄생했음을 보여주었다. 국제주의 양식은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중요한 양식이었고, 그 영향으로 유럽의 상류층은 갑자기 현대적 저택을 주문하기 시작했다.

미스가 체크의 브르노에 지은 투겐트하트 저택(1930)도 그중 하나였다.

저택을 지을 여유가 없는 지식인들은 미스와 건축가이자 디자이너인 마르셀 브로이어, 디자이너인 마르트 슈탐이 전시한 새로운 철제가구와 실내장식품을 사들였다. 그러나 이 전시회는 독일공작연맹의 사회적 목적을 촉진하는 데에는 거의 이바지하지 못했다. 값싼 조립식 주택과 공장에서 생산하도록 설계된 작품 가운데, 실제로 조립되거나 대량생산된 건물은 하나도 없었다. 문제는 설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양식에 대한 대중의 수요가 부족한 데에도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미스는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고, 산업은 '양에서 질로, 양적 팽창에서 질적 내실 쪽으로 나아가야 하며', 그렇게 하면 '산업과 과학기술이 사상 및 문화의 힘과 결합하게 될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과학기술과 문화는 '독일 전시관'('바르셀로나 전시관'이라고도 함)에서 하나로 통합되었다. 이 전시관은 사실상 품질과 사상 및 문화의 건축학적 진술이라고 묘사되는 것이 가장 적합하다. 이 전시관은 독일 정부가 1929년에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국제 박람회를 위해 주문한 것이다.

여기에는 가로 53. 6m, 세로 17m인 트래버틴(온천 침전물로 만든 건축 재료) 바닥 위에 크롬으로 도금된 강철 기둥을 세워, 일부는 얇은 지붕을 덮고 일부는 지붕이 없이 노출시킨 연속적인 멋진 공간을 이루는 전시관 자체만이 전시되었다. 공간은 벌꿀 빛깔의 마노와 초록빛 티니아 대리석 및 서리무늬의 판유리로 이루어진 벽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그 안에는 게오르크 콜베가 조각한 누드상을 놓은 풀장 하나와 미스가 이 전시관을 위해 특별히 제작한 유명한 의자 몇 개가 있을 뿐이었다(바르셀로나 의자). 이것은 예술을 위한 예술이며, 게다가 평범한 예술이 아닌 사치스러운 예술이었다.

1930년 미스는 바우하우스 교장으로 임명되었다.

바우하우스는 원래 바이마르에 있었지만, 1925년에 그로피우스가 데사우로 옮겨왔다. 밖에서는 나치가 공격해오고 안에서는 좌익계 학생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와중에 학교는 언제나 혼란상태에 빠져 있었다. 미스는 행정가의 재능을 타고나지는 않았지만, 엄격하면서도 훌륭한 스승으로, 곧 학생들의 존경을 받게 되었다. 미국에서 온 한 학생은 집에 보내는 편지에, "미스는 우리를 훌륭한 건축가로 만들지는 않는다 해도, 최소한 훌륭한 건축이 어떤 것인지를 판단하는 방법은 가르쳐줄 것입니다"라고 쓰기도 했다.

나치가 국가의 지원을 받는 학교들을 폐쇄하자, 미스는 베를린의 비어 있는 전화 공장에서 개인적으로라도 학교를 계속 운영하려고 몇 달 동안 애썼다. 그러나 히틀러의 전체주의적 국가에서의 근대적 디자인은 정치적 자유와 마찬가지로 설 자리가 없었다. 미스는 나치가 학교를 폐쇄하기 전에 스스로 바우하우스의 종말을 선언했다.

후기생애

미국에서의 활동

그후 4년간 많은 설계도를 그렸으나 실제로 지어진 것은 하나도 없었다.

1937년에 미스는 미국으로 갔다. 바우하우스에서 미스를 만나 열렬한 옹호자가 된 필립 존슨의 주선으로, 그는 와이오밍 주에 교외 주택을 설계해 달라는 주문을 받았다. 이 설계도 역시 도면으로만 남아 있을 뿐, 실제 건축으로 실현되지는 않았다. 미스는 미국으로 이주한 직후, 시카고 아머 학교(나중에 일리노이공과대학이 됨) 건축학부를 이끌 사람을 찾고 있던 건축가 존 홀러버드를 만났다. 미스는 건축학부를 맡는 조건으로 '완전한 재량권과 연봉 1만 달러'를 요구했다.

그는 재량권은 얻었지만, 연봉은 요구한 것보다 적게 받았다. 1958년 그가 은퇴할 무렵, 이 학교는 미스가 직접 설계한 캠퍼스뿐 아니라 잘 통제된 교육방법으로 전세계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학교의 다양한 용도에 맞게 쓰일 수 있도록 설계된 이 건물의 특징은 입체적 단순함이었다. 드러나 있는 철재 골조물, 교정의 모습이 그대로 비치는 커다란 유리창, 그리고 황갈색 벽돌 등이 이 건물에 사용된 기본 재료였다.

미스가 정년 퇴직한 해에, 필립 존슨과 공동으로 설계한 뉴욕 파크가의 시그램 빌딩도 준공되었다.

이 건물은 외부가 유리와 청동 및 대리석으로 되어 있는 초고층 사무용 건물이었다. 국제주의 양식은 이 건물로 인해 절정에 이르렀고, 미스는 국제주의 양식을 선도하는 대가로 인정받게 되었다. 1950년대의 미국은 재료와 과학 기술의 진보를 굳게 믿고 있었는데, 이것은 옛날 독일의 '총체적 문화'라는 개념과 비슷한 것으로 여겨졌다. 불과 8년 전만 해도 〈하우스 뷰티풀 House Beautiful〉이라는 잡지는 미스가 미국에 온 직후에 지은 건물들(특히 일리노이 주 플레이노에 에디스 판스워스를 위해 지은 집)을 미국 생활방식에 대한 사악한 위협이라고 비난하여 미국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던 당혹감을 대변했고,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국제주의 양식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정신이 나간 사람'이라고 빈정대기까지 했지만, 이제 그런 것은 완전히 잊혀져 있었다.

〈타임 Time〉지와 〈라이프 Life〉지 및 〈포춘 Fortune〉지의 발행인 헨리 루스는 이제 "20세기 건축 혁명이 완수되었고, 그 혁명은 주로 미국에서 이루어졌다"고 선언했다. 미스가 제1차 세계대전 직후에 구상한 설계도를 대부분 실현한 유리상자형 건물이 미국 전역을 넘어 세계 전역에 잇따라 나타났다. 그러나 이러한 신념과 취향의 흐름은 곧 방향을 바꾸었다. 강철 골조와 유리벽은 더이상 건축학적 독창성의 새로운 시작이 아니라 종말처럼 여겨졌다. 젊은 세대의 근대주의자들 가운데 가장 앞날이 촉망되는 에로 사리넨은 "우리는 우리 건축의 지평을 탐구하고 확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르 코르뷔지에와 겸손하게 손을 잡고, 미스 반 데어 로에를 배척한다. " 미스의 충실한 제자였던 필립 존슨마저도 오로지 단순함만을 추구하는 스승을 떠나 좀더 낭만적인 역사주의 쪽으로 돌아섰다.

후기 활동

미스는 끝까지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1920년대에 전개한 신념을 충실히 지키면서, 그 신념에 따른 아름다운 건물들을 창조하느라 평생 어느 때보다도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가 후기에 설계한 작품으로는 시카고 아파트 건물(1949, 1951), 디트로이트의 주택단지인 라페이에트 파크(1956~63), 볼티모어의 사무용 건물인 원 찰스 센터(1963), 휴스턴의 박물관(1958), 시카고의 페더럴 센터(1964), 워싱턴 D. C. 의 공립도서관(1967) 등이 있다. 그러나 모든 건물 가운데 미스의 개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은 서베를린에서 1968년에 준공된 20세기 미술관(나중에 신국립미술관으로 개명)이었다.

큰 몸집으로 관절염을 심하게 앓게 된 미스는, 그의 전기를 쓴 피터 블레이크가 표현했듯이, 그 자신을 기념하여 제작된 화강암 조상처럼 보이게 되었다.

1930년에 이혼한 그는 시카고의 미시간 호 근처에 있는 낡고 널찍한 아파트에서 죽을 때까지 혼자 살았다. 그의 사무실은 집 근처의 낡은 창고 건물에 있었다. 그는 자신이 수집한 파울 클레의 그림들을 아꼈고, 값비싼 여송연을 피웠으며, 우아한 옷을 입었고, 독일 철학자들의 저서를 읽었다. 그는 접근하기 어려운 사람처럼 보였지만, 그와 가까이 지낸 사람들은 그가 친절하고 조금도 잘난 체하지 않으며 쾌활한 사람이었다고 즐겨 회상하곤 한다.

그는 자신이 설계한 건물들이 차갑다는 비난에 대해, "우유라면 차갑거나 따뜻할 수 있지만 차가운 건물이나 따뜻한 건물은 있을 수 없다"고 대꾸했다.

그는 '월요일 아침마다 새로운 건축을 창조할' 필요는 전혀 느끼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건축에 대한 개개인의 주장, 즉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는 기념비에 불과한 모든 양식을 경멸했다. 미스는 인간의 개성이 드러나지 않는 건물을 짓고자 했다. 또한 건축이란 "한 시대의 의지가 공간으로 옮겨진 것으로 그러한 공간은 살아 있고 항상 변화하며 새로운 것"이라고 말했다.

미스는 자신을 그 의지를 수행하는 도구 이상의 존재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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