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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까지의 건축사에서 19세기는 역사주의 건축가들이 기술과 공학에 바탕을 둔 기능주의 건축가들을 가로막은 시기라고 평가되어왔다. 이런 측면으로 볼 때, 20세기는 기능주의 건축의 승리라는 점에서 중요시된다.
기능주의 건축가들은 역사를 참고로 할 필요가 없고 새로운 재료와 기술로도 건축설계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 새로운 해석이 대두되었는데 그 이유는 첫째, 역사적인 건축에 대한 19세기의 진지한 연구는 그 자체가 높은 수준의 독립적인 건축운동으로 재평가되었다는 것과, 둘째, 1970년대의 포스트 모던 건축의 대두로 근대건축이 현대건축의 영원한 고지는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켜주고, 근대 건축의 신화에 감추어져 보지 못했던 1830~1930년의 건축을 새롭게 조명할 수 있게 했다는 점이다. 실제로 1930년대까지 세워진 거의 모든 건축은 고전적·전통적인 양식이다.
그당시 파리의 에콜데보자르는 19세기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건축교육기관이었다. 이는 1819년 왕립건축 아카데미의 후신으로 창립되어 프랑스뿐 아니라 유럽 전역에서, 1850년 이후에는 미국에서도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건축은 공익사업으로 취급되어 기념비적인 공공 건축을 고전양식으로 설계하는 데 교육의 중점을 두었다.
대표적인 건축가는 파리 오페라 하우스(1862~75)를 설계한 J.L.C. 가르니에, 파리 시 개조계획을 한 B. 오스만, 파리 국립도서관의 열람실(1859~67)을 설계한 H. 라브루스트 등이다. 1889년 철과 유리를 사용한 건물들이 주류를 이룬 파리 박람회 때 전성기를 이루었다. 후에 페레는 이에 대한 반항으로 가구식 구조 건물을 철근 콘크리트로 시공해 고전적으로 만들었다.
미국의 러트로브 추종자들은 창의성이 부족했다. 1846년 헌트가 미국 최초의 에콜데보자르 학생으로 등록했으며, 1859~62년에는 H.H. 리처드슨, 1867~70년에는 리처드슨의 제자 매킴이 이곳에서 공부했다. 매킴은 윌리엄 러더포드 미드, 스탠퍼드 화이트와 동업해 미국 토속 건축인 싱글 양식을 발전시켰다(→ 싱글 양식).
1893년 시카고에서 개최된 콜럼버스 국제박람회는 아메리카 대륙 발견 400주년 기념회장으로서 '맥킴-미드-화이트 사무소'가 주도했다. 이 박람회를 통해 이들은 공공건축 설계에 고전적인 디자인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이때의 책임건축가 버넘은 미국 주요도시에 '위대한 백색 도시' 운동을 전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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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고전주의 및 절충주의 건축 – 다음백과,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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