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출처 다음백과

파리

다른 표기 언어 Paris
요약 테이블
위치 프랑스 일드프랑스 지방
인구 2,093,769명 (2022년 추계)
면적 105.4㎢
언어 프랑스어
대륙 유럽
국가 프랑스

요약 프랑스의 수도이며 유럽 최대의 대도시권 가운데 하나.

루브르 박물관

ⓒ 클립아트코리아 |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클립아트코리아에 있으며,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2,000여 년 전 센 강에 있는 섬에 세워진 이 도시는 영국 해협에 면한 센 강 어귀로부터 내륙쪽으로 약 375km 되는 지점에 자리잡고 있다. 오늘날의 파리는 이 섬(시테 섬)으로부터 센 강의 양쪽 기슭 훨씬 너머까지 확대되었다.

파리 시를 중심으로 하여 사방으로 뻗어나간 교외와 개발지역이 형성하고 있는 파리 대도시권은 약 2,118㎢에 이른다. 파리는 파리 분지로 알려진 비옥한 농업지역의 중앙에 있으며, 일드프랑스 지방에 속한 8개주 가운데 하나이다.

지도
파리 위치

특징

수세기 동안 파리는 세계에서 가장 중요하고 매력적인 도시 가운데 하나였다. 상거래나 학문·예술 등이 활성화된 곳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이곳의 요리, 최신 유행의 복식, 미술, 문학, 지식인 사회는 특히 선망의 대상이 될 만큼 유명하다. 17,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에 얻은 '빛의 도시'(la Ville Lumière)라는 별명은 파리가 교육과 지식 추구의 중심지로서 계속 중요성을 지녀왔기 때문이다. 파리는 프랑스뿐만 아니라 유럽 전체의 중요한 육로·수로의 교차점에 있어 계속 성장할 수 있었다.

BC 1세기 로마 통치하에서 시테 섬에 있던 파리의 원래 장소가 파리시족의 수도 및 영토로 지정되었다. 프랑크족의 왕 클로비스는 AD 494년 갈리아인들로부터 파리를 탈취한 뒤 수도로 삼았다. 위그 카페(987~996 재위)와 카페 왕조하에서 우위가 확립된 파리는 프랑스가 근대적인 모습을 갖추어감에 따라 정치·문화의 중심부가 되었다. 프랑스는 오래전부터 고도로 중앙집권화된 국가였으며, 파리는 강력한 중앙정부와 동일시되면서 전국의 인재와 활력을 끌어모았다.

역사적인 파리의 3대 지역은 센 강에 의해 구분된다. 중심부에는 종교적·세속적 권위의 소재지인 시테 섬('시테'라는 말에는 고대 도시의 핵심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음)이 있다. 센 강의 좌안(리브코슈)은 전통적으로 지식인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이며, 우안(리브드루아트)에는 도시경제의 심장부가 포함되어 있으나 최근에는 이러한 구분이 희미해지고 있다. 수세기 동안 파리는 초기의 모습을 대체로 유지하면서 발달해왔다. 시 경계선은 일반적으로 수도원 또는 교회 주위에 세워진 주변도시들(bourgs)과 시장터를 흡수하면서 외곽으로 확장되었다.

14세기 중엽에서 16세기 중엽까지는 주로 동쪽으로 발달되었다가 그후로는 서쪽으로 확대되었다. 파리를 구성하는 20개의 구(區)에는 각각 구장(區長), 구청사, 그리고 고유의 특색이 있다. 파리인들은 이 구들을 제1·2·3 등의 번호로 지칭하는데, 번호 매김은 파리의 심장부에서 시작되어 달팽이 껍질의 소용돌이꼴로 계속 이어져 가장 동쪽에서 끝난다. 이주, 주택문제, 사회 기본설비, 공익사업, 교외개발, 도시계획의 지역제 등과 같은 도시화의 요구에 적응한 결과 거대한 도시권이 형성되었다.

전경

파리의 전경

ⓒ Benh LIEU SONG/wikipedia | GFDL

파리 시 자체는 작아서 이것의 모든 경계선은 노트르담 대성당으로부터 9.6km를 넘지 않는다. 도시는 센 강이 우묵하게 만들어놓은 저지대를 차지하고 있다.

센 강은 시를 관통하면서 12.8km의 곡선 형태로 흐르며, 시테 섬과 생루이 섬을 형성한다. 강의 주요방향과 관련하여 강기슭의 위치가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파리인들은 강 하류 쪽을 향한 기준으로 좌안·우안이라고 간단하게 부르고 있다. 특정 장소들은 보통 구나 소구로 표시된다.

도로면보다 약 10m 낮은 강수면은 자갈이 깔리고 나무와 관목들로 아름답게 꾸며진 안벽과 경계를 이룬다. 도로면에서부터는 가로수들이 강물 쪽을 향해 경사로 심어져 있다. 이 두 면 사이에는 보통 거대한 돌덩어리로 만들어진 옹벽이 있다. 옹벽은 한때 상선들을 정박시키기 위해 이용되었던 큰 철제 고리들로 장식되어 있으며, 그중 일부에는 옛 궁전, 지하도, 하수관, 지하통로 등의 검사를 위한 출입용 수문이 뚫려 있다.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너도밤나무와 참나무의 거대한 삼림은 고도로 공업화된 지역의 공기를 정화시키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파리의 허파'라고 불린다. 센·우아르·마른 강들에 둘러싸인 일드프랑스 지방의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어 파리는 오래 전부터 가장 유력한 취락지가 되었다.

기후는 온화한 해양성으로, 여름에는 따뜻하고 겨울에는 꽤 온화하다. 평균기온은 약 11℃이고, 1월 평균 기온이 5℃, 7월 평균 기온은 21℃이다. 강수량은 여름과 가을에 다소 많지만 상당히 고르게 분포되어 있으며, 연평균 653mm이다. 1년에 약 35일간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며, 평균 15일간 눈이 내린다.

명소

시테 섬

파리의 오래된 건물, 기념물, 정원, 광장, 가로, 다리 등은 세계에서 가장 웅장한 도시경관을 이룬다.

도시가 시작되었던 시테 섬에는 12세기의 훌륭한 노트르담 대성당이 있다. 갈리아-로마 시대의 선원들이 이곳에 주피터를 위한 제단(지금은 클뤼니 박물관에 소장)을 세웠고, 그리스도교가 정착되면서 신전이 있던 장소에 교회가 건설되었다. 파리 최초의 주교인 성 드니는 이곳의 수호성인이 되었다. 파리를 상징하는 깃발의 붉은색은 참수형을 당한 후 자신의 머리를 집어들고 걸었다는 전설을 지닌 이 순교자의 피를 나타낸다.

시테 섬에 있는 노트르담 대성당

ⓒ Diliff/wikipedia | CC BY 2.5

1159년 주교가 된 모리스 드 쉴리는 6세기의 노트르담 대성당을 대신하여 새로운 고딕 양식으로 교회를 짓기로 결정했다.

1163년에 시작되어 1345년에 끝난 이 공사에는 외관의 미를 더해줄 뿐만 아니라 내부를 더 높이 솟게 해주는 플라잉 버트레스(버팀벽)라는 새로운 건축방법이 도입되었다. 프랑스 혁명 때 손상을 당한 이 대성당은 그후 경매에서 한 건축자재상에게 팔렸으나 나폴레옹이 정권을 잡으면서 이 매매를 무효화하고, 1804년의 황제대관식을 위해 다시 장식하도록 명령했다. 후일 루이 필리프가 방치된 교회를 복구했고, 건축가인 외젠 비올레트 드 뒤크에 의해서도 1845~64년에 복구되었다.

1992년의 복구사업은 산업오염에 의한 부식 때문이다.

생루이 섬

1627년 루이 13세는 건축 청부업자 크리스토프 마리와 2명의 재정가에게 시테 섬 뒤쪽의 두 진흙제방을 60년 기한으로 임대해주었다.

37년이 지나서야 마리는 두 섬을 합쳐 주변에 도랑을 파서 배수시키고, 중앙의 대로에 10개의 나란한 도로들을 배치시켜 땅을 가옥소유주들에게 임대해줄 수 있었다. 생루이장일 교회가 같은 해인 1664년에 시공되었지만, 가장 훌륭한 주택은 루이 르 보가 1640년에 완공했다. 앙주 부두를 끼고 상류 쪽으로 수m 떨어진 곳에 있는 오텔 드 로죙은 1657년에 완공되었다.

건축계약의 일부로 건설되어 센 강 우안과 연결되는 마리 다리는 비록 오늘날의 교통량을 수용할 수 있도록 개축되었으나 길이는 원래 그대로이다. 생루이 섬은 번잡한 중심부에서 조용한 지역을 이룬다.

생루이 섬

ⓒ Milvus~commonswiki/wikipedia | CC BY 2.5

라틴 지구

생루이 섬 건너편으로 센 강 좌안에는 오래 전부터 예술가들의 집결지였던 카르티에라탱(라틴 지구)이 있다.

1699년 라신이 이곳에서 죽었고, 들라크루아는 퓌르스탕베르 광장에 작업실을 갖고 있었다. 이 광장에는 19세기에 옮겨온 출판사들이 모여 있다. 주요찻집들은 예술가·작가·출판업자들이 모이는 장소이다. 1945~55년 실존주의 운동 및 그와 관련되어 부활된 보헤미아니슴(인습을 벗어던진 자유분방한 삶을 추구하는 주의)의 중심지였으며, 지금도 문학·요리·사교의 활력적인 중심지이다.

생미셸 대로 너머 서쪽에는 왕의 권한 밑에서 자치를 누렸던 대학지구가 있다.

이곳에서는 1789년까지 수업 외의 시간에도 선생과 학생 모두 라틴어를 사용했다. 루이 9세의 궁정 목사였던 로베르 드 소르봉이 1257년경 창립한 소르본대학은 프랑스 신학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 대학은 수세기 동안 파리대학교의 행정본부로 이용되었지만, 1968~71년 완전히 별개인 몇 개의 대학들로 나누어졌다.

소르본대학 건물 그 자체는 분리되어나간 몇몇 대학의 구내로 계속 이용되고 있다. 다른 학부·학교·연구소들은 파리 교육환경의 과밀현상을 완화시키려는 노력에서 교외의 보다 넓은 장소로 옮겨졌다. 독자적인 콜레주 드 프랑스는 소르본대학의 편협된 신학·라틴어 과정보다 더 자유로운 교과과정을 제공하기 위해 1529년 프랑수아 1세에 의해 소르본대학으로부터 가까운 곳에 세워졌다.

이곳에서는 학위가 수여되지 않지만, 특히 철학·문학·과학 분야에 최고의 명성을 지닌 교수진을 갖추고 있다.

대학들이 있는 곳에서 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루이 15세가 병에서 회복된 후 성 주느비에브에게 봉헌하기 위해 1755년 세운 건축물이 있다. 이것은 원래 파리의 중심 교회로 삼기 위해 세운 것이지만 혁명 정부는 이를 세속화시켜 팡테옹이라고 개칭하고는 혁명 영웅들의 마지막 안식처로 삼았다.

이곳에 묻힌 이들로는 빅토르 위고, 볼테르, 루소, 졸라 등의 작가들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레지스탕스의 지도자였던 장 물랭이 있다.

생제르맹 대로와 생미셸 대로가 만나는 곳에는 로마 시대에 세워진 목욕탕 유적이 있다. 이 유적은 1486~1500년에 지어진 고딕 양식의 저택인 클뤼니 박물관 구내에 있는데, 이 박물관에는 현재 6폭으로 된 유명한 일각수 태피스트리 〈라 담 아 라 리코른 La Dame a la licorne〉을 포함하여 중세기 예술품이 수집되어 있다.

강가에 솟아 있는 구릉 꼭대기에는 뤽상부르 공원의 가장자리를 따라 생미셸 대로가 지난다. 뤽상부르 궁전은 마리 드 메디시스를 위해 1612~21년에 건축된 것이다. 뤽상부르 공원에는 밤나무가 심어져 있고, 장난감 배를 띄울 수 있는 연못, 꼭두각시 인형극장, 조상(彫像)들이 있다. 이 공원의 남쪽에 몽파르나스 지역이 있다. 강 좌안 하류 쪽에는 모네관(館)과 1806년 이래 5개의 프랑스 아카데미들이 사용해온 프랑스 연구소가 있다.

근처에서 시테 섬의 끝을 가로지르고 있는 퐁뇌프('새로운 다리'라는 뜻)는 1578~1604년에 지어진 것으로, 이름과는 달리 파리의 다리들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다(이 다리보다 건축 시기가 앞서는 다른 다리들은 재건되었음). 200년 동안 퐁뇌프 다리는 파리의 주요도로이자 상설시장이었다.

오늘날에도 이 다리에서 여름 장을 여는 관습이 부활되었다.

라틴 지구의 골목길 풍경

ⓒ WTCA/wikipedia | CC BY-SA 3.0

관청지구

지방 및 중앙정부는 파리 전체 사무실 공간 중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센 강 좌안에 카루셀 다리로부터 에펠 탑까지 강과 나란히 뻗은 이 지역은 제7구이며, 프랑스 혁명 이래 오래되고 훌륭한 대저택들에 행정사무실들이 들어 있기 때문에 '관청지구'로 알려져 있다. 모든 건물들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앵발리드 광장과 국회 사이의 케도르세(오르세 강변도로)에 있는, 나지막하고 장식이 많은 외무부 건물이다. 국회의사당은 프랑스 혁명기에 점유당했던 부르봉 궁전(1722~28)에 들어서 있다.

이 궁전은 혁명 이후의 정권들에 의해 조금씩 증축되었는데, 특히 강을 마주한 그리스식 주랑(柱廊)은 1807년 나폴레옹의 명령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다. 강 근처에 있는 오래된 오르세 철도역은 사용되지 않다가 보수되어 1986년 19세기 미술·문명 박물관으로 문을 열었다. 이곳에는 이전에 죄 드 폼에 있었던 세잔·마네·모네·르누아르·고흐 등의 인상파·후기인상파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오르세 박물관).

앵발리드

앵발리드 관(폐병관)으로 알려진 대규모 복합건물은 루이 14세의 명령에 따라 7,000명의 노령·상이군인들의 보호시설로서 5년(1671~76) 만에 완공되었다.

병원건물들 위로 솟아 있는 금도금된 돔(1675~1706)은 생루이 교회에 속한 것이다. 고전시대의 로마 것보다 더 자유롭게 고전적 원리를 적용했던 이 건물은 17세기 파리의 건축양식이 되었다. 돔 구조물 바로 밑에는 붉은 반암(斑岩) 석관(石棺)으로 덮인 6개의 관들이 있다. 관 속에 또다른 관이 들어가 있는 식으로 된 이 6개 관에는 루이 필리프 왕의 노력으로 1840년 세인트헬레나 섬으로부터 반환된 나폴레옹의 유해와 유물들이 들어 있다.

가로수가 서 있는 거대한 앵발리드 광장은 케도르세와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3세의 출연으로 세워진, 알렉산드르 3세 다리 쪽으로 완만하게 경사져 있다.

에펠 탑과 육군사관학교

센 강이 남서쪽으로 굽어진 근처에 귀스타브 에펠이 설계한 에펠 탑이 서 있다.

에펠 탑은 철근을 노출시킨 트러스 탑으로 안전성과 외관에 회의를 가졌던 사람들의 거친 반대에도 불구하고 1889년의 만국박람회를 위해 만들어졌다. 1909년 박람회의 사용권이 만료되었을 때, 허물어질 위기에 처했으나 라디오 방송을 위한 안테나로서의 가치 때문에 그대로 남게 되었다. 텔레비전 방송을 위한 증축으로 원래 300m이던 탑 높이가 18.4m 더 높아졌다. 3개의 단 중 가장 높은 단에 서면 64km 이상까지 시야가 미친다.

20세기에 와서 에펠 탑은 파리의 낭만을 상징하게 되었다. 1999년에는 에펠 탑에서 파리의 새 천년 기념식이 치러졌으며, 2004년 겨울에는 첫 번째 층에 스케이트장을 개장해 현재까지도 매년 운영하고 있다. 2008년 프랑스가 유럽 연합의 의장국이 되자 유럽기에 나타난 12개의 금색 별을 탑에 설치하기도 했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엽서와 기념품 등에 에펠 탑은 빠지지 않고 등장해 파리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또 철탑에 녹이 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7년에 한 번씩 도색작업을 진행하는데, 이 때 한 번에 50~60t의 페인트를 칠한다.

약 8,000㎡에 달하는 탑의 기부로부터 거대한 들판인 샹드마르스('3월의 들판'이라는 뜻)가 육군사관학교까지 펼쳐져 있다. 1769~72년에 지어진 육군사관학교 건물에는 현재 국방대학(École Supérieure de Guerre)이 들어서 있다.

원래 육군사관학교의 행군장소로 사용되었던 샹드마르스는 프랑스 혁명 기간에 대대적인 집회가 열렸던 장소였다. 육군사관학교 뒤에는 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의 본부가 있다. 강 건너 에펠 탑의 맞은편에 있는 샤요 궁에는 많은 박물관이 있다. 이 궁은 1878년의 박람회 때 남겨진 건물인 트로카데로 궁을 대신하여 1937년 만국박람회를 위해 건설되었다. 조상들이 줄지어 있는 이 궁의 테라스에서는 파리의 아름다운 경관을 즐길 수 있다. 강쪽으로 경사진 계단식 공원으로 만들었다.

샤요 궁은 한국인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그 이유는 샤요 궁이 대한민국을 한반도 유일의 합법정부로 승인한 제3차 유엔 총회가 열린 곳이기 때문이다. 1952년 뉴욕에 유엔본부 건물이 완공되기 전까지 유엔은 이곳 저곳을 떠돌며 총회를 개최했고, 1948년의 제3차 총회는 당시 회의장으로 임시 개조했던 샤요 국립극장에서 열렸다. 1948년 12월 12일 채택된 유엔 총회 결의 195호는 신생 독립국가 대한민국을 한반도에서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했다.

개선로

북쪽으로는 클레베르가 거리가 구릉 위의 샤요 궁으로부터 원형광장까지 뻗어 있다.

이 원형광장으로부터 12개의 인상적인 가로들이 방사형으로 뻗어나가 별(에투알) 모양을 이루고 있어 1753년부터 에투알 광장으로 불렸으나 1970년 샤를 드골 광장으로 개칭되었다. 이 광장의 중심부에는 1806년 나폴레옹이 세우도록 한 개선문이 있다. 이 개선문 너머로 V자형 교외지역인 뇌이의 맨 끝 쪽에는 약 3.2km에 걸쳐 1970년대 유럽에서 가장 큰 규모였던 고층 건물군이 있다.

데팡스 소구라고 불리는 이곳은 상업·공업·문화 활동의 중심지로, 프랑스 혁명 200주년을 맞아 제2의 개선문이라고 하는 대 아치 문이 세워졌다.

샤를 드골 광장 남동쪽에는 1793년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단두대에 처형되었던 장소인 콩코르드 광장이 있다. 유명한 샹젤리제 거리는 때때로 개선로라고 불리며, 데팡스 소구로부터 루브르 박물관까지 뻗은 큰 축의 동부를 형성한다.

콩코르드 광장과 루브르 박물관 사이에 있는 튈르리 공원에는 예전에는 박물관이었으나 현재는 전시장으로 쓰이고 있는 죄 드 폼과 오랑주리 회화관(繪畵館)이 있다.

루브르 박물관

바이킹들은 885년 시테 섬 서쪽 끝에서부터 강 건너편의 우안에 걸쳐 진을 쳤으나 파리의 포위 공격은 실패로 끝났다.

약 1200년경 필리프 2세가 신도시 성벽 바로 바깥쪽으로 같은 장소에 서쪽 방어를 돕기 위해 직4각형으로 된 십자군성을 축조했다. 그뒤 수세기에 걸쳐 많은 증축과 개조가 이루어졌으며, 1852년이 되어서야 세계적인 규모의 궁전이 완공되었다. 루브르 박물관은 강을 따라 뻗은 남쪽 화랑과, 4각형 안마당(쿠르 카레)을 둘러싼 궁전의 4면을 차지하고 있다. 이 박물관에는 〈사모트라케의 승리〉·〈밀로의 비너스〉·〈모나리자〉 등이 소장되어 있다.

또한 BC 7세기부터 19세기 중엽까지의 작품들이 많이 수집되어 있다.

예술품 전시를 위한 공간 확보를 위해 루브르 박물관 전체에 걸쳐 대대적인 개조작업이 벌어졌다. 1980년대초 2개의 화랑 사이에 있는 거대한 나폴레옹 안마당에 새로운 출입구와 지하 연회장을 만들기 위한 공사가 시작되었다. 출입구를 덮기 위해 I. M. 페가 설계한 높이 23m의 유리 피라미드는 강한 찬반양론을 불러일으켰다.

루브르 박물관으로부터 강 좌안으로 걸쳐진 아르 다리는 파리의 모든 다리들 가운데 가장 매혹적이다. 처음에는 철교(1803)였으며, 도보자들이 계속 이용해왔던 이 다리에서는 센 강변의 경치가 자세히 보인다. 루브르 박물관 북쪽으로는 파리 오페라 하우스와 국립음악 아카데미가 있는 오페라 광장이 있다. 오스만 대로 너머의 언덕에는 사크레쾨르 바실리카가 우뚝 서 있는 몽마르트르 지역이 있다.

카페와 나이트클럽들이 있는 이곳은 환락가의 중심지이며, 시인·화가들이 자주 찾는 곳으로 유명하다.

리볼리가(街)

리볼리가는 콩코르드 광장으로부터 남동쪽으로 강과 나란히 뻗어 있다.

이 거리를 낀 루브르 박물관 맞은편에는 팔레 루아얄이 있다. 이것은 추기경 리슐리외가 왕가에 양도한 것으로, 현재는 국가 고위기관인 참사원이 들어 있으며, 근처에 국립도서관이 있다. 동쪽으로 나 있는 여러 거리들은 1183~1969년에 파리의 중심 상가였던 알 소구이다. 철골과 유리로 된 19세기의 독특한 시장 건물들을 해체할 때 일반 대중들이 큰 소란을 일으켰고, 해체한 후 생긴 거대한 공간에는 1979년 지하층을 포함한 여러 층의 상업 센터가 들어섰다.

이 센터의 주위에는 차량통행이 없는 구역이 둘러싸고 있다. 알 광장으로부터 세바스토폴 대로를 가로질러 조르주 퐁피두 국립예술문화 센터가 있다. 널리 상트르 보부르라고 알려진 이 건물은 1977년에 문을 연, 유리와 금속으로 독특하게 설계된 거대한 구조물이다.

이 건물은 파리 주민과 관광객들로부터 인기를 얻고 있는 명소이다. 근처의 마레('저습지')로 알려진 지역에는 국립고문서보관소와 피카소 박물관이 있다.

리볼리가의 동쪽 끝에 있는 바스티유 광장은 프랑스 혁명의 도화선이 된 사건을 기념하고 있다. 1789년 7월 14일에 있었던 바스티유 감옥의 함락은 전제군주의 희생자들을 해방시킨 사건이라기보다는 전제군주에 대한 상징적인 타격이었다.

사실상 수년 간 사용되지 않았고 왕의 명령으로 해체될 계획이었던 바스티유 감옥에는 사건 당일 단지 4명의 위조범, 2명의 정신이상자, 그리고 아버지의 기분을 상하게 했던 젊은 귀족이 수감되어 있었을 뿐이었다. 이 감옥은 점령당한 후 파괴되었다. 나폴레옹은 1803년에 바스티유 광장을 만들게 했다. 1859년 이곳에 건설한 철도역은 새 오페라관 건축을 위해 1984년에 완전히 없앴다. 오페라 하우스는 1991년에 개관되었다.

공원·녹지

파리는 센 강의 확 트인 시야와 가로수가 있는 강둑으로 공원이 잘 형성된 도시이다.

약 8만 7,000그루의 플라타너스와 마로니에가 길가에 줄지어 서 있다. 그러나 공원 및 녹지는 파리 시 전역의 11%에 불과하다. 현대적인 도심부에 있는 공원과 정원의 대부분이 과거 도시 외곽에 왕을 위해 남겨두었던 땅에 조성되었다. 영국에 망명해 있는 동안 런던의 공원을 보고 감명을 받았던 나폴레옹 3세는 파리로 가는 길에 있는 2개의 옛 왕실 군사보존지를 영국식 공원으로 만들었다. 그곳이 현재 서쪽에 있는 불로뉴 숲과 동쪽에 있는 뱅센 숲이다.

또한 그는 넓은 지역을 산책로와 정원지로 조성했다. 공공광장, 가로수, 강둑의 나무들, 각종 정원들은 각 구에서 관리한다.

주민

1850년 파리에는 60만 명이 살고 있었으나 그후 공업발달로 지방으로부터 끊임없이 이주민이 몰려들어 인구가 급속히 증가했다. 1870년에 100만 명을 넘어선 인구는 1931년에 이르러 이 대도시권에서 약 500만 명에 이르렀으며, 그중 절반 이상이 옛 성문 내의 행정도시인 파리 시에 거주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이같은 인구성장이 지속되었고, 20세기말에 이르러 대도시권의 인구가 약 1,000만 명이 되었다.

그러나 파리 시 자체의 인구는 꾸준히 감소하여 4명 중 3명 이상이 현재 교외지역에 살고 있다. 이 변화는 대대적인 신주택 건설로 인구밀도가 줄어든 것이 일부 원인이었지만, 그래도 인구밀도는 지금까지 북유럽 평균보다 매우 높다. 많은 가구가 교외의 넓고 새로운 집들로 이사를 했으며, 그 결과 파리 시에는 노령인구와 혼자 사는 사람들만 남게 되었다. 파리 시 전체 가구의 거의 절반이 한 사람으로 이루어져 있다.

본토박이 파리인들이 타지방 출신 이주자들보다 수적으로 열세하며, 따라서 많은 상점·식당·지역 등이 지방적 특색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프랑스 중부 주(州)인 아베롱 주보다 파리에 살고 있는 아베롱인들이 더 많다고 알려져 있다. 주민의 대부분은 명목상 로마 가톨릭교도이지만 규칙적으로 미사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외국인이 계속 증가하여 현재는 전체주민의 거의 1/5을 차지한다. 그중 알제리·모로코·튀니지에서 온 이슬람교 아랍인들이 다수를 이룬다.

일반적으로 북아프리카인들은 빈민지역의 열악한 주택에 기거하며, 사회적으로 천하게 여겨지는 직업에 종사하고 있다. 때로는 아랍인들과 본토박이 프랑스인들 간에 인종적 긴장과 갈등이 발생하기도 한다. 상당수의 흑인들은 주로 카리브 해의 프랑스령인 마르티니크와 과들루프로부터 온 이주자들이며, 이슬람교도들보다 더 나은 직업과 거주조건을 갖고 있다. 오래전부터 파리에 정착한 유대인 공동체가 집중되어 있는 마레 소구의 로지에르가에는 유대교 예배당, 유대교 규정에 따른 적법의 식품을 판매하는 가게, 히브리어 책을 파는 서점 등이 있다. 1980년대에 파리에서 반유대주의가 부활된 것은 보다 광범위한 유럽적인 현상이 반영된 것이었다.

20세기 초반 파리는 미국의 어니스트 헤밍웨이, 아일랜드의 제임스 조이스, 스페인의 파블로 피카소, 이탈리아의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등 국적을 버린 작가와 예술가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지금은 유럽과 북아메리카에서 유입되는 인구가 상당히 적으며, 이들도 주로 사업가와 UNESCO 및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를 비롯한 파리에 기반을 둔 대규모 국제기구의 직원들로 구성되어 있다.

경제

개요

파리는 프랑스의 정치적·문화적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중요한 재정적·상업적 요지이기도 하다.

프랑스의 대기업들은 주로 거래 은행과 관련 정부부처가 가까이에 있는 파리에 본사를 두고 있으며, 제조공장들은 지방에 있다. 1930년대에 공업요지로서 전성기를 누렸던 파리 지역은 제2차 세계대전 이래 대부분의 공업발달이 지방에서 이루어졌지만 여전히 프랑스 산업의 1/4을 유치하고 있다. 재정 중심지로서의 파리는 많은 국제적 기업이 상업·금융 부문에서 활동하는 기지이다. 일부 빈민지대가 있지만 프랑스인과 외국인을 포함한 많은 민간인 부호들의 본거지이다.

공업과 상업 다음으로 중요한 경제활동은 정부행정업이다.

공업

19세기에 파리가 활발한 공업도시가 된 것은 정치적인 수도라는 점에 이끌린 회사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프랑스의 다른 오래된 공업지역인 로렌 지방이나 노르 지방 등과는 달리, 이곳은 광물자원 매장지와 가깝지 않지만 센 강을 끼고 있는 점 등 천연적인 이점이 있다. 지금도 많은 바지선이 센 강의 하류를 통해 운행하여 르아브르에서 바다로 나간다. 전통적인 산업은 주로 수공예업과 사치품 제조업에 집중되었으나, 19세기에 철도와 수로(운하)의 발달로 인해 북부 탄전지역으로 접근이 쉬워지면서 기계공업·화학공업과 같은 중공업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이같은 새로운 공업들은 곧 도시를 벗어나 교외에 있는 신흥공업지역으로 확대되었다. 1950년대 이후 프랑스 정부의 정책은 파리 지방의 공업발전을 제한하여 미개발된 지방들을 지원한다는 것이었다. 여러 가지 면에서 지나치게 밀집된 파리는 그대신 상업·금융·서비스업을 발전시키도록 권장받았으며, 이 정책은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파리 지방에서의 공업시설 확장을 금하고 다른 지방으로 이전하도록 재정 지원을 받아 많은 공장들이 지방으로 옮겨졌다.

소규모이지만 전형적인 파리인의 사업이 파리를 본거지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특히 포부르생토노레에 있는 고급 상점, 상티에 소구를 중심으로 한 기성복 산업, 방돔 광장과 페가(街)에 있는 보석점, 포부르생탕투안의 가구제조점 등이 유명하다. 더 큰 규모의 신흥 공업체들은 북부 및 서부 교외, 특히 센 강 유역을 따라 루앙 방향으로 발달되었으며, 그곳에는 여러 개의 자동차·항공기 공장이 있다.

북서쪽에는 쉬렌에서 젠빌리에까지 센 강 만곡부를 따라 병기공장·중공업시설·화학공장 등이 있다. 다른 공장들은 북동쪽의 샤를 드골 공항에 쉽게 갈 수 있는 범위 내에 있다. 남쪽과 남서쪽으로 비에브르 강 유역을 따라 제혁·시멘트·양조·담배 공장들과 기타 전통적인 산업시설들이 있다. 많은 경공업시설들이 현재 파리 대도시권을 둘러싼 신도시들에 자리잡고 있다.

상업·금융

프랑스의 주요 은행·보험회사, 기타 금융기관들이 모두 파리에 있으며, 특히 증권거래소와 프랑스은행을 중심으로 센 강 우안의 금융지구에 집중되어 있다. 외국은행 지사들이 많이 있지만 외국환어음인수·증권발행·모험자본투자와 같은 전문적이고 역동적인 업무는 하지 않는다.

1980년대에 확장되고 현대화됐던 파리 증권거래소는 2000년 9월 암스테르담, 브리쉘의 증권거래소와 합병해 유로넥스트라는 이름으로 공식 출범했다. 더불어 시스템의 전산화 이후 파리 증권거래소 건물은 현재 본래의 용도가 아닌 관광 명소로 자리하고 있고, 금융이나 재정, 경제에 관련한 컨퍼런스가 진행되기도 한다. 파리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통상의 유지로 크게 발전했으며, 특히 신축 고층 빌딩들이 들어선 라데팡스 소구에는 많은 대기업들이 있다.

또한 세계적으로 인기 있는 국제적인 사업회의 개최지로서, 때로는 연간 200회 이상의 회의가 열린다. 마요 문의 팔레 데 콩그레를 비롯해 여러 개의 현대적인 회의 센터가 있다. 1852년 센 강 좌안에 문을 연 봉마르셰는 세계 최초의 근대적인 백화점이다. 센 강 우안의 알과 좌안의 알로오뱅(포도주 시장)에 있던 주요 식료품·포도주 도매상가가 1960년대에 교외에 새로이 조성된 보다 넓은 건물들로 옮겨졌다.

교통

파리의 공공교통체계는 정부기관에 의해 운영되며, 1970년대초 이후 최고로 현대화되고 확장되어, 지금은 세계의 어떤 주요도시들의 교통체계보다 가장 훌륭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16개의 주요노선으로 이루어진 지하철망(메트로)은 매우 신속하고 운행횟수가 빈번하다. 고속특급지하철망(Réseau Express Régional/RER)은 교외까지 뻗어 있으며, 일부 지점에서는 간선철도망과도 연결되어 있다. 지하철의 중심부인 샤틀레레잘은 세계에서 가장 크고 번잡한 지하역으로 알려져 있다.

1980년대에는 지하철로 매일 500만 명의 주민이 파리로 통근했다. 정부가 지하철 운영비를 보조해주기 때문에 승객은 실제 비용의 절반만을 지불한다. 파리 시의 버스 운행체계도 현대화되어 있다. 이같은 개선은 통근할 때 자동차를 이용하지 못하게 하여 교통문제를 완화시키려는 정부정책의 일부였으나 그 효과는 의문이다. 교통량은 크게 늘어나고 있으며 교통체증을 감소시키기 위해 많은 지하도로와 강변 고속도로를 만들었고, 광범위한 일방 통행망을 발전시켰다.

또 주차공간을 위해 지하차고들이 건설되었다. 파리 시는 순환고속도로(페리페리크 대로)로 둘러싸여 있다. 이 고속도로는 교외의 간선도로 및 파리를 중심으로 한 전국간선도로망과 연결되어 있다. 대규모의 파리 철도종착역에서는 19세기에 처음 건설된 국영철도망이 운행된다. 국영철도망이 현대화되어 리옹과 여러 지역으로 고속열차가 운행된다.

주요 국제공항은 북동쪽에 있는 샤를드골 공항이고, 남쪽에 있는 더 오래된 오를리 공항에는 주로 국내선 및 전세기가 드나든다. 바지 선과 유람선이 운항되는 센 강에는 상류와 하류에 무역항들이 갖추어져 있다.

정치

시 행정과 교외의 행정 사이에는 뚜렷한 구분이 있다. 파리 시는 하나의 단일 행정단위로, 프랑스의 다른 코뮌(commune)과 마찬가지로 선거에 의해 선출된 시장과 의회가 다스린다. 교외는 크고 작은 1,200개 이상의 별개 코뮌들로 이루어져 있고, 파리 시와 함께 일드프랑스 지방을 구성한다. 면적이 약 1만 2,000km인 일드프랑스 지방은 파리 대도시권 훨씬 너머에까지 미친다. 그러므로 파리 대도시권의 도시지역은 하나의 행정적 단위가 아니며, 파리와 인접 교외들 간에도 기능 조정이 잘 되지 않을 때가 많다.

좌익 코뮌과 우익 코뮌 간의 격렬한 경쟁 때문에 세계의 다른 주요도시와 같은 형태를 갖는 통합된 도시구역을 만들지 못했다. 일드프랑스 지방은 프랑스의 22개 지방 중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곳으로 오트드센·센생드니·발드마른·에손·이블린·발두아즈·센에마른·파리 등 8개주(州)로 이루어진다. 1982~86년 사회주의 정부가 단행한 중앙정부로부터 지방자치체로의 권한이양 개혁 때, 다른 지역들처럼 일드프랑스 지방에도 자치권이 부여되었다. 직접선거로 선출된 의장 및 집행부를 갖춘 의회가 있고, 자체 세금을 징수할 수 있으며, 평생교육과 문화·관광·도로건설·도시계획·산업개발지원에 대해 책임을 진다.

직접 선출된 8개주의 의원들은 사회 하부구조에 관련된 여러 문제들의 관리뿐만 아니라 예산관리를 포함하여 사회복지제도의 운영을 맡고 있다. 코뮌은 도시 계획 및 건설을 관리한다. 각 주는 국가에서 임명한 주지사가, 일드프랑스 지방은 지방 지사가 감독하지만 이들의 직무 권한은 개혁 전보다 훨씬 줄어들었다.

파리 시 자체는 지역행정의 독특한 역사를 갖고 있다. 파리 시의회는 6년마다 주민들의 선거로 선출된다. 1871~1977년에 시의회는 시장 없이 주지사의 직접적인 통치를 받았기 때문에 파리는 다른 도시보다 자치권이 적었다. 1789, 1848, 1871년의 폭동에 과민했던 중앙정부는 파리 주민들이 권한을 갖지 않기를 원했다.

그러나 1975년에 통과된 법령으로 다시 시의원들이 자체적으로 시장을 선출할 수 있게 되었다. 현재 시장은 프랑스의 다른 도시 시장들과 같은 지위와 권한을 갖고 있다. 최초의 시장 선거는 1977년에 있었다. 1982년 도입된 구(區) 체계에 따라 20개의 구가 각각 구장과 구의회를 갖게 되었지만 이 체계는 실제적으로 그리 효과적이지 않음이 드러났고, 실제 권한은 파리 시장에게 있다.

사회와 문화

서비스

파리의 전기·가스 공공시설은 소방·전화 서비스와 함께 국가가 관리하며, 경찰은 프랑스의 다른 도시에서와 달리 큰 권한을 갖고 있다.

파리 경찰은 범죄·교통·공공질서를 다루는 것 외에도 차량·운전자 등록과 여권·증명서·외국인거주허가증의 발급, 정치적 감시 임무를 수행한다. 또한 증가하는 범죄, 특히 테러리즘으로 임무가 가중된다. 특수경찰기관으로는 형사·역스파이 활동 전담과와, 시위대를 해산시킬 때 투입되는 국가보안대가 있다. 군도로 무장하고 깃털장식의 투구·박차·가슴받이를 한 위병들로 이루어진 기마대인 국가호위대는 외국의 국가원수 방문과 같은 공식적인 의전에만 동원된다.

보건

파리의 공공병원과 병원단체들은 보건부와 파리 시에 의해 공동으로 운영되며, 사회복지제도에 의거하여 재정을 지원받는다.

교회와 민간단체들이 일부 병원을 운영하며 많은 개인병원이 있다. 많은 의학연구기관들 중 1887년에 설립된 파스퇴르 연구소가 가장 잘 알려져 있다.

교육

프랑스의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공립학교가 대부분이며, 초등·전기중등(콜레주)·후기중등(리세)의 3단계가 있다.

총학생의 1/5이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운영하는 사립학교에 다닌다. 중부 파리에서 가장 잘 알려진 앙리 4세, 루이 르 그랑, 장송 드 사이 리세들은 전통적으로 프랑스의 수많은 저명인사들을 배출해냈다. 파리는 오래전부터 세계에서 중요한 고등교육의 중심지였다. 소르본대학으로 알려진 건물에는 1968~71년에 13개의 자율적인 대학교로 분리되기까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 중의 하나였던 파리대학교의 인문 및 과학 학부가 있었다.

분리된 대학들 중의 일부는 지금도 소르본대학 건물을 사용하고 있다. 이 13개 대학들은 학생수가 많고 재정이 충분하지 못해 훨씬 소규모의 전문화되고 정예주의를 고수하는 고등교육기관의 명성을 잃어가고 있다. 이런 교육기관들에는 그랑 제콜이라고 알려진 공학·기술·경영 대학이 포함되며, 그중 파리 지역에서 가장 장 알려진 것이 고등상업학교(École des Hautes Études Commerciales/HEC)와 에콜 폴리테크니크이다.

지금은 둘 다 교외의 넓은 건물들로 이전했다. 고등사범학교(École Normale Supérieure)는 대학과 리세의 교사들을 양성하는 곳이다. 정치학연구소는 영향력 있는 대학원 과정인 국립행정학교(École Normale d'Administration/ENA)에 진학할 많은 인재들을 길러낸다. 이같은 선별적인 교육구조는 프랑스에 여러 가지로 기여를 했으나 심한 비판을 받게 되어 간헐적인 개혁이 이루어져왔다.

문화

파리는 수세기 동안 서구의 문화적 원동력으로 예술가와 지식인을 끌어들였으며, 새로운 사상이 시작되고 예술이 모든 것 위에 군림하는 곳으로 여겨져왔다.

어떤 사람들은 이곳의 문화생활이 참된 창의력이라기보다는 일종의 구경거리가 되었다고 느끼고 있지만 그래도 매우 활동적이며 독특하다. 파리인들은 새로움을 사랑하며 풍부한 지적 호기심을 가지고 있고, 하찮은 문화 행사라도 독특한 안목과 세련미로 꾸밀 줄 안다. 그러므로 극장·음악당·박물관·화랑·영화관은 항상 사람들로 가득 찬다. 국가가 운영하는 주요극장들인 코메디 프랑세즈, 오데옹 극장, 샤요 국립극장에서는 고전극·현대극·외국작품 등을 공연한다.

보다 가벼운 소극은 민간 주관의 노천극장에서 공연된다. 대부분 국가로부터 보조를 받는 150개 이상의 소극장들에서는 실험극과 카바레에서 하는 쇼 등의 혼합된 프로그램이 공연된다. 멀티스크린이 있는 많은 상업적 극장들 외에도 다양한 종류의 영화들을 자막과 함께 보여주는 소규모 예술관들이 수십 개 있다. 프랑스의 주요 영화제작소는 파리 교외에 있다.

새로이 개조된 루브르 박물관은 고전예술박물관 중 가장 크다.

20세기말에는 퐁피두 센터의 국립현대미술관, 오르세 19세기미술 및 문명 박물관(1986 개관), 라빌레트의 새로운 과학박물관 등 주요박물관들이 건설되었다. 파리에서는 대규모의 전시회가 많이 열리는데 대부분 화가 개인이나 특정한 시기의 회고전이다. 한때 빈사상태였던 파리의 음악계는 1970년대초 이후 정부의 재정 지원에 힘입어 활기를 띠고 있다. 파리 오페라단의 수준은 일정하지 않지만 파리 시는 오페라에 대한 지원으로 1986년 새 오페라 하우스를 개관했다.

음악과 드라마를 강조하는 주요 연례축제로는 6~7월에 열리는 마레 축제와 9월 중순부터 12월에 걸쳐 열리는 가을축제가 있다. 주요한 출판사와 서점들은 라탱 지구와 생제르맹데프레에 자리잡고 있다. 가장 유력한 일간지는 석간인 〈몽드 Le Monde〉이고, 그 다음이 〈피가로 Le Figaro〉와 〈리베라시옹 Liberation〉이다.

영자 신문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 International Herald-Tribune〉도 이곳에서 발행된다. 파리의 일간지는 프랑스 전체 일간지 부수의 1/3 미만을 차지하여 비교적 약세에 있지만, 특히 〈엑스프레스 L'Express〉와 〈푸앵 Le Point〉을 포함한 주간지들은 번창하고 있다. 프랑스의 주요 라디오 방송국과 텔레비전 방송국이 모두 파리에 집중되어 있는데, 일부는 국영이고 일부는 민간소유이다.

역사

건설 및 중세기의 발달

파리는 BC 3세기말에 센 강의 한 섬(지금의 시테 섬)에 있는 취락이었으며, 파리시 부족으로 알려진 갈리아 부족이 거주했다.

기록으로 남아 있는 이 취락의 최초 이름은 루테티아(라틴어로 '강 중류의 거주지'라는 뜻)였다. 로마인이 들어왔을 때 파리시 부족은 자체의 금화폐주조소를 갖고 있을 만큼 부유했고 조직화되어 있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자신의 전기(BC 52)에서 섬 주민들이 로마인에게 항복하기보다 도시를 불태워버렸다고 적었다. 1세기에 루테티아는 로마의 도시로 발달하여 센 강의 좌안까지 확장되었다.

이 지역에 있는 곧은 거리들과 광장·목욕탕·원형투기장 등 공공건물들은 전형적인 로마 유형이다. 2세기말에 이민족이 연달아 침략하기 시작했다. 강 좌안의 도시는 3세기 중엽에 파괴되었고, 주민들은 섬으로 도피하여 섬 주위에 두터운 성벽을 쌓았다. 4세기초부터 이곳은 파리로 알려졌으며, 이무렵에 그리스도교가 전래된 것으로 보인다. 10세기의 성사(聖事) 기록에는 성 드니(라틴어로는 디오니시우스)가 약 250년경에 파리 최초의 주교가 되었다고 나와 있다.

5세기말에 클로비스가 이끄는 프랑크계 살리 지족(支族)이 갈리아족으로부터 파리를 빼앗아 메로빙거 왕조의 수도로 삼았다.

그러나 584년에 힐페리히의 재위가 끝난 뒤 수도는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카롤링거 왕조의 샤를마뉴 대제 때는 파리의 백작들이 도시를 돌보는 편이었지만, 백작들은 주교들보다 행정에 대한 권한이 적었다. 파리의 백작인 위그 카페가 987년 왕으로 선출된 후, 카페 왕조의 수도로서 파리는 더욱 중요해졌다. 카페 왕조하에서 점차적으로 정치적 안정과 사회적 공공질서가 회복되면서 파리의 인구와 상업활동이 증가했다.

11세기에 최초의 길드(상인조합)가 형성되었으며, 푸주한 길드와 강(江)상인 길드도 생겨났다. 1141년에 왕실은 주요항구(시청사 근처)를 강상인 길드에게 팔았고, 이 길드의 배가 새겨진 문장(紋章)이 파리의 문장으로 채택되었다. 필리프 2세의 재위(1179~1223) 동안 파리는 크게 개선되었다.

필리프 2세

카페 왕조 출신으로는 프랑스 왕국의 일곱 번째 국왕이다.

ⓒ Petrusbarbygere/wikipedia | Public Domain

1220년 왕실은 귀중한 권한의 하나였던 수입상품에 대한 세금징수권을 주민들에게 양도했다. 1200년에 왕이 파리대학교를 공식적으로 인가한 것은 파리가 강 우안의 상인구역, 중심부인 시테 섬, 강 좌안의 대학·학문 구역 등 3개 구역으로 자연스럽게 구분됨을 인정한 것이다. 소르본대학(1257경 설립)을 포함하여 많은 칼리지도 설립되었다.

14세기에 파리는 흑사병(1348~49)과 100년전쟁(1337~1453), 그로 인한 내부적 혼란 때문에 발달이 지체되었다.

1356년에 상인들은 파리가 북해연안저지대의 독립도시들처럼 부유하고 자유롭기를 원했으며, 그들의 지도자였던 에티엔 마르셀은 왕에게 반기를 들고 도시를 장악했다. 행정적으로 굉장한 수완을 보여주었던 그였으나 정치적으로는 어리석어 반란을 일으킨 농민들(자크리의 반란), 침략해오는 잉글랜드인, 나바라 왕국의 야심 만만한 왕인 카를로스와 연합했다. 1358년 나바라인들에게 성문을 열어주려던 마르셀은 주민들에 의해 살해당했다.

1382년 세금으로 인한 폭동이 마요탱 반란이라고 불리는 봉기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큰 나무망치로 무장한 봉기자들은 무자비하게 진압당했고, 그후 79년 동안 도시는 제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왕이 도시행정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1533년 프랑수아 1세 때부터이다.

부르고뉴파와 아르마냐크파 간의 뿌리 깊은 정치적 대립(1407~35)은 파리에 계속 영향을 끼쳤으며, 1413년에는 시몽 카보슈가 이끄는 푸주한과 피혁상인들이 잠시 권력을 잡았다. 1415년 잉글랜드인이 재개한 백년전쟁으로 사태가 더욱 악화되었다. 1418년 파리인들의 폭동 후 파리를 장악한 부르고뉴파가 앵글로-부르고뉴 동맹(1419)을 맺은 데 이어 1422년 베드퍼드 공작인 존 플랜태저넷이 잉글랜드 왕 헨리 6세를 대리하는 프랑스의 섭정이 되었다.

1429년에 잔 다르크는 파리를 탈환하는 데 실패했다. 그러나 1436년에 파리를 손에 넣은 정통주의자(부르봉 왕가를 옹호한 사람)들은 1437년 샤를 7세를 기꺼이 맞이했다. 계속된 혼란 때문에 인구가 감소했으나 1444년 잉글랜드-프랑스 간의 휴전으로 샤를은 번영을 회복시킬 수 있었다.

루이 11세의 재위기(1461~83)인 1469년에 소르본대학은 파리에서는 최초로 인쇄기를 설치했다. 그밖에 약간의 건축활동이 이어진 것을 제외하고 지적 침체기였다.

르네상스로부터 프랑스 혁명까지

이탈리아의 르네상스가 도시건축에 미친 영향은 특히 루이 12세(1498~1515 재위) 때에 세운 회계소 건물에 잘 나타난다.

프랑수아 1세(1515~47 재위) 때 이 영향은 더욱 강해져서 새로운 시청사에서 주목할 만한 모습을 드러냈다. 투렌에 거주하는 것을 더 선호했던 샤를 7세 이후의 프랑스 왕들과는 달리 프랑수아 1세는 왕실 소재지를 파리로 되돌려놓았다. 파리의 르네상스는 1549년 엄숙하게 수도로 입성했던 앙리 2세 때 절정에 달했다.

귀족과 중산계급은 저택을 건축하면서 파리를 중세기 도시에서 근대적인 도시로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1548년 프랑세즈가의 오텔 드 부르고뉴에서 공연된 세속적인 연극이 파리 최초의 극장공연이 되었다. 16세기 중엽에 로마 가톨릭교도들과 위그노(프랑스 신교도)들 간에 벌어진 종교전쟁으로 파리에서는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1572), 가톨릭 동맹이 앙리 3세에 저항하여 일어난 바리카드의 날(1588), 프로테스탄트교도인 앙리 드 나바라(1589년에 앙리 4세로 즉위)에 대한 주민들의 오랜 저항 등이 일어났다.

1590년 파리 포위 공격에 실패한 앙리 4세는 가톨릭교로 개종한 뒤 1594년에 파리로 들어갈 수 있었다.

루이 13세(1610~43 재위) 때 파리는 서쪽과 북쪽으로 더욱 확장되었고, 시테 섬 동쪽에 있는 2개의 작은 무인도가 통합되어 생루이 섬을 이루었다. 프롱드의 난(1648~53)은 루이 14세 시대의 유년기에 있었던 중요한 사건이었다.

1661년에 추기경 마자랭이 죽은 후 직접통치를 시작한 루이 14세는 자신과 궁정의 소재지를 파리 외부인 베르사유에 두었다. 그러나 파리는 군주의 영광을 재현하는 도시가 되었고, 장 바티스티 콜베르는 도시를 새롭고 훌륭하게 설계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기술적 개량과 함께 확장 또는 미화 작업이 18세기 동안 계속되었다. 자크 콩스탕탱 페리에와 그의 아버지 오귀스트 샤를이 개발한 2개의 소화용 펌프를 이용해 센 강 양안에 물을 공급했다. 수입품에 대한 세금부과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1780년대에 세워진 징세청부업자의 성벽이 파리의 경계를 이루었다.

현대도시의 발전

1789년 프랑스 혁명은 파리에 남아 있던 영주제도의 흔적을 없애버렸고, 중앙집권화된 프랑스 수도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했다.

프랑스 혁명기에 파리에서 발생했던 주요사건들은 바스티유 감옥습격(1789. 7. 14), 왕과 국민의회를 베르사유로부터 파리로 이전한 일(1789. 10), 옛 수도회들의 수도원에 수많은 조직을 결성한 일, 군주제 철폐를 예고한 폭동(1792. 8. 10), 지금의 콩코르드 광장인 혁명광장에서 벌어진 왕의 처형(1793. 1. 21), 공포정치의 출현(1793~94), 그리고 테르미도르의 반동(1794. 7)으로부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1799. 11)를 일으키기까지 벌어졌던 일련의 변동들이다.

제1제정의 출발 후 나폴레옹은 1806년 에투알 광장에 개선문을 세우도록 명령했다.

신고전양식은 로마 제국시대를 연상시키기는 했으나 증권거래소·신부두·다리·시장 등과 같은 대대적인 공공사업으로 파리 시가 현대화었다. 나폴레옹 시대에 진행된 산업화는 왕정복고시대(1814~30)와 7월왕정(1830~48) 때 급속히 진전되었다. 가스 등 도입과 함께, 1828년에는 버스가 운행되기 시작했으며, 1837년에 파리 최초의 철도가 생제르맹앙레 근처 르페크까지 개통되었다.

파리의 일부 지역은 19세기 중엽이 되기까지 실질적으로 개선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 중심지로부터 다른 중심지나 철도역으로 가는 것이 곤란했고, 인구과밀과 급속한 산업화로 비참함과 불결함을 가져와 1830, 1848년의 혁명 때 파리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나폴레옹 3세(1852~70 재위)는 센 강의 지사인 오스만 남작에게 이러한 문제들을 없애도록 했다. 현대적인 파리를 창조해낸 뛰어난 도시계획가 오스만은 도시에 곧게 뻗은 간선가로들, 대칭성, 뛰어난 조망을 주창했다.

그는 빈민지역에 있는 복잡한 가로들을 없애고 현대식 하수·수로 시설을 만들기 시작했으며, 시테 섬 내부를 정리하고, 옛 시장인 알레를 재건했다. 또 센 강에 4개의 새 다리를 세우고 기존의 남은 다리 3개를 재건했다. 나폴레옹 3세 때의 파리의 번영과 탁월함이 1855, 1867년 이곳에서 개최된 만국박람회에서 실증되었다.

제2제정의 몰락과 파리 포위 공격을 가져왔던 프랑스-프로이센 전쟁(1870~71)에 이어 코뮌(1871)이 형성되어 패해를 입었으나 제3공화정 때도 오스만의 사업은 계속되었고, 만국박람회가 또다시 개최되면서 에펠 탑(1889)과 같은 기념건물들이 세워졌다. 19세기 말에 벌써 지하철 메트로가 건설되고, 상업과 공업의 발달로 예전에 주거지역이었던 곳이 병합되었으며, 날로 늘어나는 인구는 파리의 옛 경계선 너머까지 퍼져나갔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이 파리를 점령했을 때 이곳은 비교적 피해를 적게 입었다.

레지스탕스 운동의 요지로 그 활동은 1944년 8월 파리 시의 해방 때 절정에 달했다. 전쟁 직후에는 지적 활동이 왕성하기도 했지만 빈곤문제와 사회적 긴장이 팽배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주택부족 현상이 심각했으며, 독일군 점령의 심리적 상처는 쉽사리 치유되지 못했고, 식민지 전쟁과 정치적 불안정이 사기를 떨어뜨렸다. 그러나 이러한 상태는 점차 나아졌으며, 특히 1958년 샤를 드골이 권력을 복귀한 후 획기적으로 개선되었다. 시의 경제도 호전되었고 주거지가 정비되었으며, 주거·상업 지역이 건설되었다.

1968년 5월 대규모의 학생폭동이 파리를 뒤흔들어 놓았는데, 라탱 지구 학생들의 산발적인 시위에서 시작되어 전국적인 파업 및 저항으로 확대되었다. 파리의 사회·경제 문제에 관심이 집중되었고, 후일 이 폭동은 프랑스 사회의 현대화를 재촉하는 데 유효했던 것으로 평가받았다.

2000년 대 이후 종교적 갈등과 인종 문제 등으로 여러 국제적 테러의 위험에 놓이면서 경계 태세에 돌입했다. 2003년 활동을 시작한 국제 테러조직 알카에다가 2014년 6월 이슬람국가(IS)로 조직명을 개명하면서 2015년 1월 프랑스 주간지 샤를리 엡도를 테러해 12명이 사망했고, 11월 13일 파리의 공연장과 축구 경기장 등에서 무차별 테러를 일으켜 민간인 최소 130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프랑스 정부는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2년 간 테러 경계 등급을 최고 수위로 유지해야 했다. 이후 2017년 11월 국가비상사태를 해지하고 새로운 테러법을 시행했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출처

다음백과
다음백과 | cp명Daum 전체항목 도서 소개

다양한 분야의 전문 필진으로 구성. 시의성 이슈에 대한 쉽고 정확한 지식정보를 전달합니다.

TOP으로 이동
태그 더 보기

프랑스 주요도시

추천항목


[Daum백과] 파리다음백과, Daum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