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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375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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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454 |
국적 | 콘스탄티노플 |
요약 콘스탄티노폴리스 동방교회에서 존경받던 대수도원장.
에우티케스주의(그리스도 안에서 신성의 우월성을 강조한 이단설로 단성론의 극단적인 형태)를 창시한 인물로 간주된다.
총대주교 성 키릴로스(444 죽음)의 영향을 받은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그리스도론 교리를 교육받았으며, 그리스도 안에 하나의 본성만 있다고 주장하여 동방 수도원의 그리스도관(觀)을 옹호했다.
428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로 임명된 네스토리우스의 이단설을 지지한 경쟁학파인 안티오키아 학파를 단호하게 반대했다(네스토리우스교). 네스토리우스의 교리는 그리스도가 두 본성, 즉 하느님의 아들로서는 신성을, 마리아의 아들로서는 인성을 갖고 있다는 견해를 유지했고, 따라서 마리아가 하느님의 어머니가 아니라고 주장했다(그리스도론).
에우티케스가 네스토리우스파를 반대하자 소아시아 도릴라이움의 주교 에우세비오는 그의 교리를 이단으로 선포했다(448). 그뒤 에우티케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이자 단성론 반대자였던 플라비아누스에게 448년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회의에 출두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곳에서 그리스도의 본성에 관한 논의를 거부하고서, 자기 신앙은 니케아 공의회(325)에 나타난 교부들의 신앙과 동일하다고 밝혔으나, 니케아 공의회의 초점은 그리스도의 본성보다는 그의 신성과 삼위일체 안에서의 동등성에 맞춰져 있었다. 에우티케스는 '강생 이전의 두 본성과 강생 이후의 한 본성'을 거듭 주장했는데, 이 주장은 그의 독자적인 문구로서, 강생 때 그리스도의 인성이 신격화하여 단일 본질로 흡수되었다는 단성론 교리를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그리스도의 인성이 다른 사람들의 인성과 구별된다는 결론을 내렸는데, 어떤 학자들은 그것이 단성론의 진정한 공식이라고 주장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회의는 에우티케스의 견해를 명백한 이단으로 간주하여 그를 폐위하고 파문했다. 그뒤 플라비아누스는 에우티케스의 이단설을 교황 레오 1세에게 보고했고, 레오는 449년 6월 13일 에우티케스주의를 단죄하는 유명한 〈Tome〉를 발표했다. 에우티케스는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 디오스코루스에게 호소했고, 디오스코루스는 그의 그리스도론 교리에 대한 찬성을 표시하기 위해 동 로마 제국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를 설득하여 8월에 에페소스에서 전체 공의회를 소집하게 했다.
이 공의회는 에우티케스를 복권시키고 플라비아누스, 에우세비오, 그외 두 본성 교리 지지자들을 파문했다. 이 공의회는 훗날 강도회의라고 불리었고 동방 정교회와 서방 교회 성직자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했다(에페소스 공의회).
450년 테오도시우스를 계승한 황제 마르키아누스는 451년 칼케돈 공의회를 소집했다.
이 공의회는 에우티케스를 추방하고 그의 이단설을 단죄했으며, 동방과 서방 그리스도교 정통신학의 표준 역할을 한 중도(中道) 교리를 확립했는데, 그리스도가 인성과 신성이라는 2개의 완전하고 분리할 수 없는 독특한 본성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에우티케스는 사라졌으나 그후로 그의 영향은 단성론이 동방 전역에 퍼짐에 따라 점점 커졌다. 그뒤 동방교회에서 전개된 단성론 교리의 역사는 민족주의적인 독립교회들(예를 들면, 시리아의 야코부스파)의 역사이다.
이 교회들이 독립적인 존재로 남게 된 것은 몇몇 종교 지도자들을 존경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고, 비잔틴이나 로마 교회들의 지배에 반대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다. 에우티케스의 재판과 관련 서신들은 E. 슈바르츠의 단행본 〈에우티케스의 재판 Der Prozess des Eutyches〉(1929)에 실려 있다. 그의 재판은 R. V. 셀러의 〈칼케돈 공의회 The Council of Chalcedon〉(1953)에 언급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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