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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5~7세기 시리아 동부에 있었던 그리스도교(네스토리우스파 교회)의 지식의 전당.
니시비스(지금의 터키 누사이빈) 학교는 에데사 학교의 저명한 선생이자 운영자인 나르사이와 그의 동료들이 신학논쟁으로 인해 에데사(지금의 터키 우르파)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471년경에 시작되었다. 나르사이가 교장으로 있을 때(471~496), 에데사 학교의 많은 선생과 학생들이 새로 시작된 이 학교에 들어왔다.
이들은 네스토리우스 신조를 바탕으로 자신들의 그리스도교 신앙을 체계화했는데, 이 신조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각기 독립되어 있음을 특별히 강조해 그리스도의 두 본성이 도덕적 연합에 의해 느슨하게 합쳐진 별개의 두 인격체처럼 보이게 했다.
아브라함 데 베트 라반이 교장(~569경)으로 있는 동안 이 학교는 눈부시게 발전했다. 교사들은 그리스 고전을 시리아어로 번역하는 일을 비롯해 문학·역사·철학·신학 등 여러 분야의 책을 썼다. 이 학교는 서구 사회에 이름을 떨치게 되었고, 마침내는 성직자를 양성하는 주요한 교육의 전당이 되었다. 아랍인들이 그리스 사상을 접하게 된 기본적인 통로도 이들이 시리아어로 번역한 책들이었다. 그러나 헤나나(570경~609경)가 교장으로 재임한 동안 이 학교의 네스토리우스 신학은 퇴조했다. 그 이유는 헤나나가, 네스토리우스 신학의 권위자로 인정을 받았던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루스보다는 오리게네스(3세기초 그리스도교 신학자)의 신학적 입장을 더 따랐기 때문이다. 이같은 헤나나의 입장에 대해 학생들이 반발했고, 그는 자신의 지위를 계속 누리기 위해 왕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헤나나 이후 유일하게 뛰어난 인물로는 수린이 있는데, 그는 625~650년 사이 얼마 동안 교장직을 맡았다. 그의 저작은 상당한 관심을 불러일으켜 계속 쇠퇴해가는 이 학교의 명맥을 유지해주었는데, 특히 사료 편찬과 수도원 역사에 대한 탐구에서 그 진가를 발휘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명성을 잃었으며, 셀류키아크테시폰 학교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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