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요약
수학의 가장 오래 된 분야로 유클리드 등의 그리스인들이 확고한 기초를 세워 수세기 동안 유일한 기하학이라고 간주되었다.
1637년 데카르트는 유클리드 및 고전 기하학의 개념들을 일반화했으며, 해석기하학 분야를 만들었고 뉴턴, 오일러 등은 기하구조의 성질을 대수식으로 나타내는 기하학을 열었다.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연구는 19세기 초에 유클리드 공리 가운데 하나를 부정하였다. 사영기하학은 사영으로 변하지 않는 기하도형의 성질을 다룬다. 미분기하학자인 가우스는 수리해석학 개념을 기하학에 적용·연구했다.
미분기하학을 유한차원공간으로 일반화시킨 리만 기하학은 상대성이론을 수학적으로 형성하는 데 중심역할을 했다. 가장 최신의 복잡한 분야인 위상기하학은 기하학적 대상의 속성을 다룬다.
수학의 가장 오래 된 분야 가운데 하나로 그 기원은 고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까지 거슬러올라가며, 측량을 포함한 실제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에서 유래되었다.
어원은 '지구측정'(Earth measurement)을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했으며, BC 1000년 그리스인들이 기하학에 대해 확고한 기초를 세웠다. 이어서 기하학이 평면기하학(평평한 면에 관한 연구)과 입체기하학(3차원 입체에 관한 연구)으로 제한될 필요가 없고, 추상적인 관념과 상(image)이 기하학 용어로 표현·발전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고대 그리스의 최고 업적 가운데 하나는 BC 300년 쯤 에우클레이데스가 자신의 저작 〈기하학 원본 Stoicheia〉에 체계화시킨 연역기하학의 확립이다.
수 세기 동안 유클리드 기하학은 유일한 기하학이라고 간주되었으나, 19세기말 다른 견해가 나타났으며, 지금은 단지 추상수학의 한 예로 간주되고 있다. 그러나 많은 정리들은 내용이 상당히 깊고, 수학의 중요부분을 차지하면서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프톨레마이오스 초기(BC 323~285/283)시대에 알렉산드리아에 살았던 에우클레이데스는 피타고라스(BC 500경 죽음)의 연구와 원뿔곡선에 대한 페르가의 아폴로니오스(BC 3세기) 그리고 역학과 원의 면적에 대한 아르키메데스(BC 3세기)의 더 발전된 연구를 기초로 삼았다.
하룬 알라시드(786~809) 통치시대 동안 〈기하학 원본〉은 아랍어로 번역되었다. 최초의 라틴어 완역본은 AD 1120년경 영국 바스 출신의 애들라드가 아랍어본을 번역한 것이다. 오늘날까지 널리 사용되는 표준 영어판은 토머스 리틀 히스가 번역하여 1908년에 출판했다.
에우클레이데스의 저작은 총 13권으로 되어 있으며, 정의·공리·'일반개념'(common notion)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에우클레이데스의 정의는 개념이 분명치 않아 현대적 의미에 맞지 않지만, 원(일반 원)의 정의는 현대 추상이론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예외이다. 에우클레이데스는 정의·공리(5개)를 명백히 제시하면서 삼각형과 평행사변형(제1권), 직사각형 분석(제2권), 입체기하학(제11권) 정입면체 작도(제13권)와 같은 주제들을 다루기 시작했다. 또한 원뿔곡선에 대한 4권의 책을 저술했으나 이 책은 모두 남아 있지 않다(원뿔곡선은 포물선·타원·원·쌍곡선 등으로 된 곡선들의 군임).
에우클레이데스의 이론은 상상으로 묘사되거나 종이에 그려진 도형에 기초하며, 종종 명백하지 않은 도형에서 나오는 세부사항이나 관계를 가정했다.
증명은 주로 도형에 의존했으나, 기본적인 기하학이 얼마만큼의 비중과 어느 정도 범위까지 도형에 의존해야 하는가 등이 명확하지 않았다. 수세기 동안 유클리드 기하학은 유일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세부사항들은 의심받지도 조사되지도 않았다.
1637년 르네 데카르트가 처음으로 유클리드 및 고전 기하학의 개념들을 더 추상적인 개념으로 일반화했으며, 그는 오늘날 해석기하학이라고 하는 기하학의 한 분야를 만들어냈다.
공간의 한 점은 그 위치를 나타내는 수들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 해석기하학의 기본 개념이며, 이런 방법에 의해 기하대상을 대수기호와 과정으로 묘사할 수 있다. 그러나 지구의 경도·위도·고도를 바탕으로 하여 한 점의 위치를 표시하는 개념은 BC 3세기 아르키메데스와 페르가의 아폴로니오스로 거슬러올라간다. 약 2,000년 뒤 데카르트와 17세기 프랑스의 피에르 드 페르마가 이 개념을 발전시켰다.
데카르트는 대수학을 기하학에 적용하여 기하도형의 차원을 다루었고, 1쌍의 수로 한 점을 표현했으며, 방정식으로 직선과 곡선을 표현했다.
예를 들면, 2차원 평면 위의 한 점의 위치는 x , y축이라고 하는 2개의 직교직선에서의 거리로 나타낸다. 직선은 방정식 y= mx+b로 나타내며, 여기서 m과 b는 상수이고 x와 y는 각 축 위에서의 거리이다.
같은 방식으로 원과 원뿔곡선도 방정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
원뿔곡선과 다른 평면곡선족의 연구와 분류의 확대는 아이작 뉴턴과 레온하르트 오일러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 접근법은 많은 기하문제를 풀 때 강력한 도구이며 유클리드 기하학보다 더 쉽게 임의의 곡선에 적용할 수 있다.
해석기하학으로 2차원을 3차 또는 그 이상으로 일반화시킬 수 있다. 상공간(常空間)에서의 한 점은 x, y, z라는 3개의 좌표로 표현되며, 평면은 선형방정식을 갖고, 직선은 예를 들면 두 평면의 교선으로 나타난다. 2차원과 3차원 공간에서 여러 가지 곡선과 도형들은 해석기하학으로 나타낼 수 있지만, 여기에서는 몇 가지만 소개한다.
많은 물리의 응용에서 나타나는 중요한 곡선은 초곡선(焦曲線 caustic), 즉 빛의 포락선이다.
포락선은 광원에서 나오는 빛이 주어진 곡선에 의해 반사될 때 생긴다. 전적선(轉跡線 roulette curve)이라는 또다른 곡선은 고정곡선이나 직선 위에서 미끄러짐 없이 구르는 곡면 위에 있는 고정점의 자취(또는 고정선의 포락선)이다. 외(外)사이클로이드(epicycloid)와 내(內)사이클로이드(hypocycloid)는 다른 반지름을 갖는 고정원의 외부와 내부 위에서 미끄러지지 않고 구를 때 주어진 반지름을 갖는 원의 원주 위에 있는 점들이 그리는 자취의 곡선이다.
마지막 다섯번째 예로 평면에서처럼 3개 점을 갖는 공간곡선인 비대칭 또는 비틀린 3차 곡선이 있다. 이 곡선은 독일의 수학자 A. F. 뫼비우스가 처음으로 다루었다.
뉴턴, 오일러,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해석기하학 연구로 3번째 분야인 대수기하학의 기초가 세워졌고, 19세기말 독일의 막스 뇌터와 20세기초 이탈리아의 코라도 세그레, 페데리고 엔리퀘스에 의해 완전하게 발전했다. 대수기하학은 기하구조의 성질을 대수식으로 나타낸다.
현대 대수기하학은 세부사항을 깊이 파고들기보다는 다양체 자체가 내포된 공간과 무관한 점집합에 대한 성질을 주로 연구한다.
유클리드 기하학에서 시작해 해석기하학과 대수기하학을 거쳐 추상으로 발전해가는 과정은 독일의 수학자 모리츠 파슈와 이탈리아의 수학자 주세페 페아노, 마리오 피에리의 연구로 20세기로 바뀔 즈음 절정에 달했다. 가장 큰 영향은 독일의 수학자 다피트 힐베르트의 연구에 의해서이다.
그의 저서 〈기하학의 기초 Grundlagen der Geometrie〉(1899)는 에우클레이데스의 표현에 부족했던 정밀성에 대한 학자들의 관심이 늘어남에 따라 이에 대응하기 위해 저술되었다.
힐베르트는 에우클레이데스 초기의 무정의(無定義) 용어와 관련된 21개의 공리를 분명히 정의함으로써 시작했다. 그는 무정의용어가 완전히 추상적이어야 함을 강조하기 위해 "사람은 언제나 점·직선·평면 대신 탁자·의자·맥주잔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라는 유명한 논평을 했는데, 이는 1935년이 되어서야 발표되었다.
힐베르트의 넓은 해석에 따르면, 직선을 점들의 집합, 역으로 점을 선들의 집합으로 볼 수 있다.
힐베르트의 연구가 유클리드 기하학에 확고한 기초를 다져주었지만 학습도구로는 실패작이었음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힐베르트가 연구할 때까지 모든 학교에서는 에우클레이데스의 책이나 그의 여러 개정판이 사용되었지만, 초보자에게 너무 추상적이며 현대의 요구를 만족시킬 만큼 완전하지는 않다는 비판을 받았었다.
힐베르트의 책에는 2번째 문제점이 제거되었지만, 20세기말 프랑스의 기하학자 르네 톰이 "이 책은 형편없이 복잡하다"라고 말하자 학교에서 에우클레이데스의 책을 대신해 사용될 희망이 사라졌다.
고전기하학을 정확하고 완전하게 취급하기 위한 힐베르트의 연구는 의심의 여지없이 비(非)유클리드 기하학의 발견으로 더욱더 자극되었다. 비유클리드 기하학에서는 점·선·평면·공간에 대해 가정을 명백히 세운 뒤 결론이 유도되었다.
결론은 종종 적당한 대상에 대한 직관과 일치하지만, 긴 길이로 확장된 평행관계에 대해서는 빈번히 직관과 맞선다. 예를 들어, 평면에 직선으로 연결된 두 점을 생각하고, 이 두 점에서 이 직선과 수직인 두 반직선을 같은 쪽으로 그린다. 유클리드 기하학에서는 이 두 반직선들이 서로 평행하고 영원히 같은 거리에 있다. 즉 두 반직선은 한 점으로부터의 거리에 관계없이 서로 교차하지 않는다.
그러나 쌍곡기하학이라고 하는 비유클리드 기하학에서는 두 반직선이 멀어질수록 더 발산하며, 타원기하학에서는 두 반직선이 수렴하여 결국 교차하게 된다.
두 반직선이 수백㎞ 확장되면 이들은 서로 너무 멀어져 측정할 수 없기 때문에, 우주는 비유클리드 기하학에 의해 기술될 수 있다는 논리가 가능하게 된다.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발전은 아인슈타인이 일반상대성이론의 골격을 세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이 일반상대성이론으로 시공간구조(時空間構造)의 개념이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흥미롭게도 비유클리드 기하학은 그 근본성질에도 불구하고 유클리드 기하학의 2번째 또는 5번째 공리를 제외한 모든 공리를 만족시킨다.
2번째 공리는 '하나의 구간은 무한히 연장될 수 있다'는 말이고, 5번째 공리는 '한 선분이 다른 두 선분과 각각 예각으로 만날 때, 이 두 선분을 무한히 연장하면 서로 만난다'는 말이다. 쌍곡기하학에서는 교각이 각각 예각을 이루어도 두 반직선은 처음에는 수렴하여 최소거리를 이룬 뒤에 결국 발산하므로 5번째 공리는 더이상 참이 아니다. 타원기하학에서는 5번째 공리가 자명하지만 구간이 무한히 연장될 수 없고 대신 자기가 자기를 에워싸기 때문에 2번째 공리는 더 이상 참이 아니다.
역설적으로 에우클레이데스 자신조차 5번째 공리를 사용하기 꺼려했으므로 그가 최초의 비유클리드 기하학자였다고 할 수 있다.
한편 그는 5번째 공리를 쓰지 않고 처음 28개의 명제들을 증명할 수 있는 저술을 준비했다. 처음 4개의 공리들을 바탕으로 한 명제가 계속 증가해 절대기하학이라고 하는 분야의 중심을 이루었다. 이러한 모든 명제들이 쌍곡기하학에서도 타당하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그러나 약 1800년까지 학자들은 5번째 공리가 언젠가는 하나의 정리로 연역될 것이라고 믿었다. 사실 5번째 공리가 단지 '두 평행선은 같은 거리에 있다' 또는 '동일 직선 위에 있지 않은 3점은 항상 원 위에 있다'와 같이 입증되지 않는 다른 동등한 가정들로 대치되었을 뿐인데도 많은 학자들은 이 목표에 도달했다고 생각했다.
17, 18세기에 이탈리아 예수회의 수사 지롤라모 사케리가 처음에 5번째 공리를 부정한 뒤 이것으로부터 생기는 모순을 찾는 방법, 즉 간접증명법(reductio ad absurdum)으로 이를 증명하려 했다.
그는 원래 쌍곡기하학의 정리들을 반박할 목적으로 시작했으나, 복잡하게 연속되는 연역과정에서 쌍곡기하학의 여러 정리들을 발견했다. 그는 이 정리들을 불합리에서 연역했다고 생각했으며, 이로 인해 기하학의 새로운 장을 발견할 기회를 놓쳤다. 그가 실패한 이유는 유클리드 기하학만이 유일하게 진실된 기하학이라고 완강하게 믿었기 때문이다.
18세기말 기하학자들은 5번째 공리를 증명할 수 없게 되자 점점 좌절하게 되었다.
헝가리의 수학자 프르코슈 보요이는 아들에게 "내가 너에게 간절히 부탁하노니, 평행에 관한 분야는 그대로 내버려두어라…… 나는 이 지옥 같은 사해(死海)의 모든 암초를 지나는 여행을 했지만 항상 부러진 돛대와 찢어진 돛을 달고 돌아왔단다"라고 편지를 썼다. 그러나 아들인 야노슈 보요이는 조금도 굴하지 않고 평행에 대해 계속 연구하여 1823년에 진리를 알아내고는 "나는 무에서 새로운 우주를 창조했다!"라고 외쳤다.
보요이는 절대기하학이 어느 단계에서는 유클리드 기하학으로 이어지면서 5번째 공리가 긍정되거나 혹은 비유클리드 기하학으로 이어지면서 이 공리가 부정되는 두 방향으로 나누어짐을 깨달았다.
이와 같이 서로 다르지만 같이 양립하는 유클리드와 비유클리드의 두 기하학을 인지한 뒤 그는 아버지가 쓴 교과서에 24쪽의 부록으로 자신의 발견을 출판했다. 조지 브루스 할스테드는 이 뛰어난 부록을 "사고(思考)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비범한 24쪽"이라고 평가했다.
비유클리드 기하학과 상대성이론이 오늘날의 철학적 견해에 매우 깊은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19세기초에 유클리드 공리 가운데 하나가 부정된 것이 얼마나 충격적인지를 알아내기란 어렵다.
이런 고찰은 위대한 독일의 수학자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가 보요이와 러시아인 동료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로바체프스키(처음 발표된 그의 논문은 보요이 것과 관계는 없지만 매우 유사하다)를 위해 자신의 발견에 대해 할 수 있는 주장을 신중하게 포기한 이유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 때문에 보요이와 로바체프스키가 쌍곡기하학을 선구적으로 연구했다고 전해진다. 두 수학자는 직관적으로 자신들의 연구가 옳다고 믿었지만, 쌍곡기하학이 유클리드 기하학만큼 논리적으로 모순이 없다는 사실을 엄밀하게 증명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1868년 이탈리아의 수학자 에우제니오 벨트라미가 확고한 기반을 세우는 중요한 계기를 만들었다.
쌍곡기하학은 비교적 최근에 발전되었지만, 타원기하학(이제까지 기술했던 것과 다른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기원은 AD 100년 알렉산드리아의 메넬라오스와 AD 1000년경의 아랍인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타원기하학의 기본개념은 지구항해를 즐겼던 사람들에게 친숙하다. 지표면에 있는 두 지점 사이의 최소 거리는 대원(大圓)의 호이므로 항해자들이 이 원을 구면기하학이라고 하는 특수한 형태의 2차원 기하학의 한 '선분'으로 간주하는 것은 당연했다. 예를 들면, 위 두 기하학에서 삼각형의 세 각의 합이 180°를 초과할 수 있다(유클리드 기하학에서의 합은 반드시 180°임).
그 결과 19세기 독일의 수학자 베른하르트 리만이 주시했듯이, 공간의 비유계성(非有界性)은 반드시 선분이 무한히 길어야 한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이론적으로는 천문학자가 고성능 망원경으로 자신의 뒷머리를 관측할 수 있다(빛이 그 거리를 가는 데 수천만 년이 걸린다는 사실은 별도로 할 때). 공간이 무한하지 않고도 비유계일 수 있다는 반직관적(反直觀的) 개념은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에서 채택되었다.
근대 기하학의 또 다른 중요한 분야는 사영기하학이다.
1822년 프랑스의 빅토르 퐁슬레가 체계화시킨 사영기하학은 사영(射影)에 의해 변하지 않는 기하도형의 성질을 다룬다. 근본적으로 이 분야는 1640년경 지라르 데자르그와 블레즈 파스칼이 증명했던 유명한 두 정리를 일반화한 것이다. 1870년 이후 독일의 펠릭스 클라인과 노르웨이의 소푸스 리가 사영기하학과 비유클리드 기하학을 통합시킨 뒤 비유클리드 기하학은 더 일반화되었다.
사영기하학의 특징적인 과정은 한 직선이나 평면 위에 있지 않는 한 점에서 투시도법으로 다른 직선이나 평면에 사상시키는 것이다.
이 과정은 한 물체를 외부점에서 그리거나 사진촬영할 때 하는 것과 근본적으로 일치한다. 사영기하학의 목적 가운데 하나는 사상과정에 의해 변하지 않는 도형의 성질을 연구하는 것이다. 즉, 사상된 '상'(像)과 원상(原像)의 어떤 성질들이 같으며 여러 번 반복되는 사상과정에서 변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자 하는 것이다.
사영기하학의 개념은 매우 다양한 대수계에서 좌표들을 선택하여 확장시킬 수 있다.
더하고 빼고 곱하고 나눌 수 있는 기호집합은 체(體 field)이며, 체에서 좌표를 선택할 때 하나의 기하학을 얻을 수 있다. 예를 들면, 실수는 하나의 체이며 복소수는 이와 다른 체이다. 대수학은 더하고 빼고 곱하고 나눌 수 있는 기호체계를 제공하지만, 기호들의 곱 ab가 반드시 ba와 같지는 않다. 이런 체계를 비가환체(非可換體 skew field)라고 한다. 비가환체에서 연구할 때, 보통의 합관계와 교차관계는 타당하지만 다른 정리들은 더이상 참이 아닌 하나의 기하학이 만들어질 수 있다.
특정한 종류의 관계를 만족하는 족(族)에 속하는 사물들의 집합체는 사영기하학의 점으로 간주될 수 있다고 보는 또 다른 견해로부터 주제를 접근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일정한 수의 남녀가 일정한 수의 단체에 속해 있고 두 사람씩이 오직 한 단체의 회원이 되고 두 단체마다 오직 한 사람의 공동회원을 갖는다면, 하나의 기하학이 형성될 수 있다. 특정한 예로, 각 3명의 회원을 갖는 7개의 단체에 속하는 7명의 남녀는 하나의 기하학을 형성한다. 근대의 많은 연구를 통해 다양한 종류의 가능한 기하학에 대한 분류와 동등한 정리군이 발견되었다.
근대 기하학의 또다른 분야는 미분기하학이다.
1820년 가우스는 수리해석학 개념(연속성과 극한)을 기하학에 적용·연구했다. 그는 호 길이와 평면곡선의 곡률에 대한 해석식을 주고 그 결과를 곡면의 곡률까지 확장시켜 미분기하학 분야를 확립하기 시작했다. 미분기하학이라는 용어는 미적분학의 핵심인 도함수 개념에서 유래했다. 함수의 도함수는 접선 또는 곡선의 기울기로 생각할 수 있으며, 함수의 적분은 기하학적으로 곡선 아래의 면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17세기 초 레온하르트 오일러와 가스파르 몽주를 포함한 많은 수학자들은 공간에서의 곡선·곡면 기하학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연구로 결국 다양한 곡률개념이 나왔다. 사실 몽주는 건물·기계·사람과 같은 3차원 물체를 3개의 수직방향에서의 좌표로 묘사하기 위해 논리적으로 접근시켜 해석기하학을 화법기하학(畵法幾何學)으로까지 발전시켰다.
근대 미분기하학은 '연구대상이 추가구조를 갖춘 다양체라고 하는 공간족(空間族)이다'라고 하는 기본원리에서 유래했다.
다양체는 한 점이 두 도표에 속하는 2개의 국소좌표집합을 가질 때 변환에 의해 관계를 갖는 유한개의 좌표도표로 피복(被復)된 공간이다. 국소좌표 그 자체는 기하학적인 의미가 없으므로 국소좌표를 변화시켜 간단한 방법으로 작용하는 개념으로 다양체를 연구하는 해석적인 도구를 갖추어야 한다.
다양한 다양체가 존재하나 유클리드 공간 그 자체는 대개 가장 간단하고 가장 직관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특정한 구조를 갖는 다양체가 고차원 유클리드 공간의 부분다양체와 동등한지를 다루는 문제는 매장문제(埋藏問題 imbedding problem)라 한다. 1936년 미국의 수학자 해슬러 휘트니는 오직 미분가능한 구조와 관계될 때만 n차원의 미분가능한 모든 다양체가 2n+1차원의 유클리드 공간에 끼워넣어질 수 있음을 증명했다.
유클리드 공간(또는 비유클리드 공간조차도)의 부분다양체에 대한 현대 연구는 몽주와 가우스의 고전적 연구의 부산물이다.
중요한 발전, 특히 대역적 성질을 강조하는 경향은 최근에 나타났다. 기하학적 성질이 연립방정식에 의해 일반적으로 표현되는 것을 주목하면 문제의 난점이 이해될 수 있다. 연립방정식 대역해(大域解 global solution)의 성향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그러나 한 점에서의 접공간이나 다양한 곡률개념들과 같은 국소문제들은 연구해야 할 주제로 남아 있다.
1854년초 가우스의 제자 베른하르트 리만은 미분기하학 개념을 유한차원공간(有限次元空間)으로 일반화시켰다.
이 연구로 리만은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주요창시자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으며, 리만 기하학으로 절정에 달했다. 리만은〈기하학의 기초가 되는 가정에 대하여 Über die Hypothesen, welche der Geometrie zu Grunde liegen〉(1854)라는 논문에서 기하학에 관한 자신의 포괄적 개념을 발전시켰다.
리만은 유클리드 기하학이 갖는 제한성에 대한 그의 모든 지식을 바탕으로 오늘날 이중타원 기하학이라고 하는 일종의 초등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개념을 세웠다.
이 일을 할 때 리만은 보요이와 로바체프스키가 유클리드 기하학의 바탕인 평행선공리(5번째 공리) 없이도 일관성 있는 기하학을 고안할 가능성을 이미 보여주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근본적으로 리만의 연구는 보요이와 로바체프스키의 비유클리드 기하학 체계에 대한 또다른 대안을 이룬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리만 기하학은 상대성이론을 수학적으로 형성하는 데 중심역할을 했다.
공간기하학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물질에 의해 결정된다는 개념이 상대성이론의 핵심이다. 개략적으로 말하면, 한 물체는 주변의 공간을 휘게 하여 돌멩이가 골짜기 밑으로 구르는 것과 같이 다른 물체를 끌어당긴다. 중력이론과 전자기이론의 통일이론을 발전시키려는 많은 시도가 있었는데, 약간은 아인슈타인이 자신의 말년에 시도했었다. 이런 시도로 리만 기하학이 일반화되었으며, 이들 가운데에는 바일 기하학, 칼루자 5차원계량(metric), 오즈월드 베블른의 사영상대성이론이 있다.
현재까지 통일이론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으로 판명되고 있다.
기하학에서 가장 최신의 복잡한 분야인 위상기하학은 변형 뒤에도 바뀌지 않고 남아 있는 기하학적 대상의 속성을 다룬다. 즉 도넛과 찻잔은 위상동형(topologically equivalent)이다. 이런 위상학은 1911년 네덜란드의 수학자 브로우웨르가 일반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을 소개한 뒤 지속적인 발전을 이룩했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