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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독일 브라운슈바이크, 1777. 4. 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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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855. 2. 23, 하노버 괴팅겐 |
국적 | 독일 |
요약
가우스는 18세기 수학이론과 방법론에 일대 변혁을 가져왔을 뿐 아니라, 혁명적인 정수이론으로 19세기 중엽에 일어났던 해석학의 급진전에도 공헌했다. 그는 흔히 아르키메데스와 뉴턴에 버금가는 가장 뛰어난 수학자의 한사람으로 꼽힌다.
24세 되던 해에 출판한 <산술에 관한 논고>는 수학사에 가장 뛰어난 업적의 하나로 평가된다. 이 논문에서 정수론에 관한 체계적이고도 영향력있는 개념과 방법들을 제시했다. 특히 복소수를 도입함으로써 근대 대수학 발전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했고, 1832년에 발표된 논문에서는 x, y 평면을 도입하여 더욱 정교하게 발전시켰다. 1801년 세레스라는 소행성의 궤도를 정확하게 계산해냄으로써 그의 뛰어난 계산능력을 전 유럽에 알릴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의 연구 업적은 천문학과 측지학, 비유클리드 기하학, 물리학 등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는 흔히 아르키메데스와 뉴턴에 버금가는 가장 뛰어난 수학자의 한사람으로 꼽힌다.
18세기 수학이론과 방법론에 일대 변혁을 가져왔을 뿐 아니라, 혁명적인 정수이론으로 19세기 중엽에 일어났던 해석학(解析學)의 급진전에도 공헌했다. 그가 말한 유명한 격언인 "수학은 과학의 여왕이고, 산술은 수학의 여왕이다"는 과학에서 차지하는 수학의 중요성을 잘 대변하고 있다.
1777년 4월 30일 그는 독일 브라운슈바이크에서 가난한 집안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어학과 수학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고,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의 재정적 후원하에 중등교육과 대학교육을 마쳤다. 1795~98년까지 괴팅겐대학교에서 수학을 공부했고 1799년 헬름슈테트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학위논문의 주제는 대수학의 기본정리인 "계수가 복소수인 모든 대수방정식은 복소수해를 갖는다"는 것이었다.
그가 24세 되던 해에 출판한 〈산술에 관한 논고 Disquisitiones Arithmeticae〉는 수학사에 가장 뛰어난 업적의 하나로 평가된다.
이 논문에서 그는 정수론에 관한 체계적이고도 영향력있는 개념과 방법들을 제시했고, 합동수(合同數 congruent number)이론과 n면을 갖는 정다면체의 문제 등도 해결했다. 특히 복소수를 도입함으로써 근대 대수학 발전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했고, 1832년에 발표된 논문에서는 x, y 평면을 도입하여 더욱 정교하게 발전되었다.
1801년 세레스(Ceres)라는 소행성의 궤도를 정확하게 계산해냄으로써 그의 뛰어난 계산능력을 전유럽에 알릴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는 단지 3개의 관측기록만을 가지고 새로 개발한 최소제곱법(method of least square)을 이용해 유럽의 많은 천문학자들이 실패한 계산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던 것이다. 최소제곱법은 1809년에 출판된 책에 실려서 널리 보급되었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또한 그는 천문학에서 이룬 성공을 자신의 후원자였던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에게 바쳤다.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의 지속적이고 넉넉한 재정지원 덕분에 가우스는 1803년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교의 교수직 요청을 물리치고 연구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1807년에는 괴팅겐대학교의 천문학교수 겸 천문대 소장으로 임명되었다.
1820년경부터 가우스는 측지학(geodesy:지구의 모양과 크기를 수학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보다 정밀한 측정을 위해서 헬리오트로프(heliotrope)를 발명했고, 가우스 오차곡선(Gaussian error curve)을 도입하여 확률이 어떻게 해서 정규분포곡선으로 표시될 수 있는지 증명했다(→ 확률론, 정규분포).
또 실제 측량자료들에서 얻은 지식으로 곡면에 관한 이론을 발전시켰는데, 그가 개발한 '내재곡면이론'(intrinsic-surface theory)은 제자였던 리만에 의해서 일반적인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가우스는 유클리드 기하학의 보편성에 의문을 제기한 첫 세대였다(→ 비유클리드 기하학). 그는 내적으로 완벽하고 전혀 모순이 없으면서도 평행선공리(the parallel axiom)가 적용되지 않는 기하학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혁명적인 결론에 도달했다.
하지만 이 생각은 너무나 급진적이어서 공표하기를 단념했다(→ 기하학).
그는 물리학에도 많은 공헌을 했다. 중력과 자기에 관한 관심은 근대 퍼텐셜 이론의 출발점이 된 1840년의 실해석(real analysis)에 관한 논문을 낳았다. 1830년부터는 빌헬름 베버와 공동으로 지자기(terrestrial magnetism)를 연구하면서 전세계적인 관측망을 조직했다.
이 공동연구는 전신망 발달에 큰 영향을 미쳤지만, 가우스 자신은 전세계적인 통신망이라는 이상에 놀라움을 나타냈다고 전해진다.
그는 종교적인 성격이 매우 강했고, 정치적으로는 보수적이었다. 그의 내부에서는 명백히 반대되는 경향들조차도 효과적으로 잘 조화될 수 있었고, 수에 관한 비상한 기억력을 지닌 뛰어난 계산가인 동시에 이론가이자 응용수학자였다. 가르치는 일을 싫어했기 때문에 제자가 많지는 않았지만 그의 영향은 155개에 달하는 출판물에 의해서 널리 퍼졌다.
그의 모든 이론은 3가지 원칙을 바탕으로 했다. "소수의, 그러나 원숙한"(Pauca, sed matura), "더이상 남은 일은 없다"(Ut nihil amplius desiderandum relictum sit) 그리고 "극도의 엄밀함"이 그것이다. 그러나 사후에 발견된 유고들을 조사해보면 위의 3가지 원칙들을 모두 만족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발표에서 제외된 많은 중요한 업적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연구주제의 선택에 있어서도 그 관계나 결과가 의미있는가를 중요하게 고려했다.
여러 분야에서의 뛰어난 업적 때문에 그는 많은 학회와 아카데미의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많은 대학에서 초청했지만 1855년 사망할 때까지 괴팅겐대학 교수로만 재직했다. 그의 사후에 발행된 기념주화에는 다음과 같은 찬사의 문구가 새겨져 있다.
"mathematicorum princeps"(수학의 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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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칼 프리드리히 가우스 – 다음백과,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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