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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로마의 파벌주의 때문에 고민하던 교황 클레멘스 5세는 필리프 4세가 프랑스로 올 것을 강요하자 교황청을 프랑스 아비뇽으로 옮겼다. 1348년 아비뇽은 교황이 직접 관리하는 교황 소유지가 되었다. 7명의 아비뇽 교황은 모두 프랑스인이었다. 이 시기에는 추기경회가 교회 행정에서 좀더 강력한 역할을 맡기 시작했고, 여러 기관이 대규모로 개편되어 중앙집권이 이루어졌다. 성직자에 대한 개혁 조치가 시작되었고 선교 사업을 장려했다. 또한 대학 교육이 진흥되었으며, 교황은 국왕들 간의 대립을 해결하고 평화를 이룩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레고리오 11세가 교황청을 로마로 옮기자 추기경회는 교황을 따로 선출해 아비뇽 교황 자리에 앉혔다. 이때부터 로마 가톨릭 교회의 대분열이 시작되었고, 대분열은 1417년까지 계속되었다.
이 시기의 교황들은 주로 당시 정치 상황 때문에 로마가 아니라 프랑스 아비뇽에 거처했다.
교황 클레멘스 5세는 로마의 파벌주의 때문에 고민하다가 프랑스 왕인 필리프 4세가 프랑스로 올 것을 강요하자 교황청을 프랑스 아비뇽으로 옮겼다. 당시 아비뇽은 교황의 봉신들이 소유하고 있던 영지였다. 1348년 아비뇽은 교황이 직접 관리하는 교황 소유지가 되었다.
7명의 아비뇽 교황은 모두 프랑스인이었지만(이 시기에 임명된 추기경도 134명 가운데 111명이 프랑스인이었음), 그당시 사람들이 생각하거나 후세의 비평가들이 주장한 것처럼 프랑스의 압력을 호락호락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이 시기에는 추기경회가 교회 행정에서 좀더 강력한 역할을 맡기 시작했고, 행정 기구를 비롯한 여러 기관이 대규모로 개편되어 중앙집권이 이루어졌다. 또한 성직자에 대한 개혁 조치가 시작되었고, 선교 사업을 장려해 중국에까지 선교사가 파견되었다. 그리고 대학 교육이 진흥되었으며, 교황은 국왕들 사이의 대립을 해결하고 평화를 이룩하기 위해 여러 가지로 노력했다.
그러나 교황이 아비뇽에 거주하는 데 대한 반감, 특히 영국과 독일의 맹렬한 반대는 교황의 위신에 큰 손상을 입혔다. 그레고리오 11세가 교황청을 로마로 옮기자 추기경회는 교황을 따로 선출해 비어 있는 아비뇽 교황 자리에 앉혔다. 이때부터 로마 가톨릭 교회의 대분열이 시작되었는데, '대립교황'이 되풀이 선출되는 바람에 대분열은 1417년까지 계속되었다. 대분열이 일어나고 이어서 교회의 전체 회의가 교황보다 더 큰 권한을 가지며, 필요하다면 교황을 폐위할 수도 있다는 주장이 대두한 것은 분명 추기경들의 세력과 야심이 커진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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