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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일 8세

다른 표기 언어 Michael VIII Palaeologus
요약 테이블
출생 1224(?), 니케아
사망 1282. 12. 11, 트라키아
국적 비잔틴

요약 니케아의 황제(1259~61 재위)이며 이후 비잔티움의 황제(1261~82 재위).

미하일 8세(Michael VIII Palaeologus)

ⓒ Victory's Spear/wikipedia | Public Domain

개요

57년 동안 라틴인들이 점령하고 있던 비잔티움 제국을 1261년 그리스인들에게 되찾아주었으며 비잔티움 제국의 마지막 왕조이자 가장 오랜 기간 통치했던 팔레올로고스 왕조를 창건했다.

초기생애

이전의 몇몇 비잔티움 왕가(두카스·앙겔로스·콤니노스)의 후손으로 어린시절은 비교적 평온했다.

그 가운데서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라틴인에게서 되찾으려는 꿈을 품었다는 사실은 특기할 만하다. 청소년기의 대부분을 니케아와 니코메디아의 황궁에서 보냈다. 그는 일찍부터 놀라운 지략과 권모술수의 재능을 드러냈다. 21세 때 반역행위를 저지른 혐의로 니케아 황제 요안니스 3세 바타치스로부터 추궁을 받기도 했으나 기지를 부려 곤경에서 벗어났다. 이후 황제 테오도로스 2세 라스카리스가 1258년에 죽자 미하일은 테오도로스의 6세 된 아들 요안니스 라스카리스의 섭정으로 뽑혔다.

미하일은 섭정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점점 더 많은 권한을 거머쥐면서 통치권을 장악했고, 1259년초에는 자신의 보호 아래 있던 정당한 후계자 요안니스를 몰아내고 눈까지 멀게 한 뒤 제위에 올랐다. 라스카리스 왕조의 지지자들은 소(小)아시아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미하일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라틴인의 손에서 되찾아냄으로써 많은 그리스인들에게 자신의 통치의 정당성을 인식시키는 데 성공했다. 미하일의 세심한 책략의 결과이든, 우연에 의한 것이든, 아니면 둘 다이든 간에 콘스탄티노폴리스는 1261년 7월 미하일의 부하 장군에게 함락되었다.

대부분의 그리스인들은 이를 환영했지만 몇몇 사람들은 미하일의 관심이 소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옮겨진 것을 느꼈다. 장기적으로 보아 이같은 유럽에 대한 관심은 치명적인 결과를 빚은 것으로 판명되었는데, 왜냐하면 그로 인해 동쪽 변방에 대해 소홀해졌고 그 틈을 타서 투르크가 소아시아 전역을 정복·점령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라틴 경쟁세력에 대한 방어전

미하일의 통치권은 처음부터 불안정했으며 라틴 통치의 복원을 바라는 라틴 세력들에게 사방이 둘러싸여 있었다.

그중에서도 콘스탄티노폴리스 최후의 라틴인(人) 황제였던 쿠르트네의 보두앵 2세가 가장 적극적이었다. 보두앵 2세는 미하일에게서 권좌를 되찾기 위한 책략을 벌이는 가운데 마침내 프랑스 왕인 성(聖) 루이의 동생이며 서방에서 가장 유능한 외교관이자 미하일과 거의 맞먹는 지략가였던 앙주의 샤를과 외교적·재정적 동맹을 맺기에 이르렀다.

샤를은 교황청의 초청으로 이탈리아 남부에 진출해 호엔슈타우펜 왕가의 마지막 대표자들인 만프레디와 콘라딘을 몰아냈으며, 그뒤 팔레르모와 나폴리에 두었던 자신의 시선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렸다. 연대기 작가의 말을 인용하자면 "그는 세계 왕국을 꿈꾸면서 동방과 서방을 결합해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대제국을 재창조해내려 했다"고 한다.

이같은 웅대한 구상은 미하일뿐만 아니라 교황청에도 위협으로 느껴졌다.

샤를이 만약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에 성공한다면 교황은 단지 이탈리아에 있는 샤를의 꼭두각시로 전락할 것이었다. 결국 미하일과 교황의 동맹관계는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었으며, 이후 20년 동안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 간의 종교적 일치를 위한 복잡 미묘한 협상이 이루어졌다. 샤를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하는 것을 막아주겠다는 교황청의 약속에 보답하여 미하일은 그리스 정교회와 로마의 종교적 통합을 실현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그의 백성들 대다수는 이에 격렬하게 반발했다. 그들은 교리상의 근거에서 통합에 반대했으며, 특히 '필리오케'(Filioque:성령이 성자·성부 모두에게서 나온다는 것) 교리라든가 예배에서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을 사용하는 것 등의 라틴식 관례에 반대했다. 무엇보다도 그들 대부분은 교황청의 교권적 우월성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으며, 그것을 받아들인다면 결국 라틴인의 정치적 지배가 부활하고 심지어는 문화적으로도 라틴인에게 동화되는 결과가 빚어질 것이라고 막연하게 느끼고 있었다(동방정교회).

동방교회와 라틴 교회의 통합

그러나 온갖 장애가 있었음에도 1274년 제2차 리옹 공의회(公議會)에서 마침내 통합이 선포되었으며, 동방정교회는 통합을 받아들이도록 강요받았다(그리스 정교회는 1282년 미하일이 죽자 곧 통합이 무효이며 날조극이라고 선언했음). 그리스인들은 공의회에 동방교회의 총대주교들이나 대표자들이 모두 참석하지는 않았고, 두 교회를 분리하는 문제에 관한 토론이 없었으며, 리옹 공의회를 초교파적(超敎派的)인 것으로 선언하는 공의회가 뒤이어 열리지 않았다는 점을 근거로 공의회의 결정에 반대했다.

그럼에도 미하일은 정치적 이유 때문에 통합을 유지하기 위해 싸웠다. 그러나 1281년 앙주의 샤를이 내세운 후보자로서 교황이 된 마르티노 4세는 즉각 미하일을 파문하고 그와 동시에 샤를의 비잔티움 원정계획을 '분열주의적인 그리스인들에 대한 성전(聖戰)'으로 선포했다. 동방의 그리스를 정복하기 위해 샤를이 맺은 방대한 동맹에는 시칠리아, 이탈리아의 일부, 그리스의 라스카리스 일파, 발칸 반도의 여러 슬라브족, 보두앵, 프랑스, 베네치아뿐만 아니라 교황청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베네치아는 라틴 제국 때 자신들이 누렸던 광범위한 교역상의 특권을 되찾고 최대의 적인 제노바인들을 황금시장인 그리스에서 내쫓는 것이 목적이었다. 샤를과 미하일의 외교적 대결은 갈수록 심해졌으며 샤를은 육군과 해군을 준비하는 데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심지어 프랑스 장군 쉴리를 지휘관으로 삼고 아드리아 해를 건너 베라트(지금의 알바니아에 있음)를 공격하기도 했으나 미하일에게 격퇴당했다. 미하일이 뛰어난 외교술을 발휘해 자기 편으로 확보한 것으로는 교황청과의 일시적 동맹, 시칠리아의 호엔슈타우펜 지지자들과의 비밀협정, 제노바의 지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만프레디의 사위인 아라곤 왕 페드로 3세와의 비밀동맹 등이 있었다.

그러나 1282년 3월 30, 31일 샤를에 대한 반란의 신호탄이 된 프랑스인 대학살사건이었던 시칠리아 만종(晩鐘) 학살이 일어나 세력경쟁은 일단 끝났다. 이로 인해 비잔티움은 다시 라틴인들에게 점령당할 뻔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평가

미하일은 그 직후에 죽었고 자기 아들 안드로니코스 2세에게 제국을 온전하게 물려주었다.

그러나 샤를의 콘스탄티노폴리스 공격을 피하기 위해 교회통합을 이용한 정책이나 그 정책으로 인한 비잔티움 주민들의 심각한 반발이 이후 비잔티움 역사에 불길한 선례를 남겼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더욱이 그의 정책은 유럽에만 관심을 쏟는 것이었으므로 투르크가 소아시아 전역을 점령하고 나아가서는 결국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점령하도록 돕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한편 미하일의 긍정적인 업적 또한 무시할 수는 없다.

그는 비잔티움 제국의 수명을 2세기 이상 늘렸고 수도를 재건했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 대학을 다시 세웠다. 또한 전반적으로 학문의 부흥을 후원하고 장려하여 14~15세기의 중요한 '비잔티움 르네상스'의 초석을 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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