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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017. 10. 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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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056. 10. 5, 작센 고슬라어 근처 보트펠트 성 |
국적 | 독일 |
요약
바이에른 공작(하인리히 6세, 1027~41 재위), 슈바벤 공작(하인리히 1세, 1038~45 재위), 독일 왕(1039~), 신성 로마 제국 황제(1046~56 재위).
(영). Henry Ⅲ.
개요
11세기에 서방교회를 정화하려고 애쓴 클뤼니 개혁 운동의 강력한 옹호자였고, 교황권을 지배할 수 있었던 마지막 황제였다.
청년기와 결혼
하인리히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콘라트 2세와 슈바벤의 기젤라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만큼 군주 교육을 철저히 받은 군주는 거의 없었다. 황제의 승인 아래 그의 교육을 책임진 이는 어머니였다. 기젤라는 수많은 가정교사를 기용해 아들을 가르쳤고, 특히 문학에 관심을 갖도록 보살폈다. 1036년에 하인리히는 잉글랜드와 덴마크 및 스웨덴의 왕 크누트의 어린 딸 군힐다(쿠니군데)와 결혼했다. 그러나 결혼 직전에 크누트가 죽었기 때문에 이 병약한 소녀와의 결혼은 정치적으로 어떤 이익도 가져다주지 않았다.
군힐다는 1038년에 죽었고, 이듬해에는 콘라트가 죽었다. 뒤이어 독일 왕이 된 22세의 하인리히는 콘라트와 비슷한 외모를 갖고 있었다. 하인리히는 어머니한테서 많은 것, 특히 경건한 신앙심을 물려받았다. 그의 즉위는 두 전임자가 즉위했을 때와는 달리 시민 봉기를 불러일으키지 않았지만, 그의 통치는 처음부터 부담스러웠다. 방자한 황제는 죽음을 앞둔 늙은 모후 기젤라와 원칙 문제를 둘러싸고 말다툼을 벌였다.
그는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교 군주들 사이의 전쟁을 끝내려는 당시의 움직임에 많은 노력을 쏟았지만, 자신의 정책은 항상 평화주의적인 것은 아니었다.
프랑켄·바이에른·슈바벤·케른텐 공작령을 가진 그는 동부에서 패권을 장악하려는 부왕의 정책을 계속 추진했고, 실제로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에 대한 통치권을 얻었다. 하인리히가 권력의 절정에 이르렀다는 확신을 갖고 성직 개혁파에 대한 편애를 공공연히 과시한 것은 이무렵이었을 것이다. 그는 샤를마뉴 시대 같은 신권정치시대를 재창조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지만, 교황권이 무력해야만 이것을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교회와 국가). 그는 1043년에 아키텐과 푸아투를 다스리는 기욤 5세의 딸 아그네스와 혼인했다. 이 혼인은 서유럽의 평화를 강화하고 부르고뉴와 이탈리아에 대한 황제의 통치권을 보장하려는 의도에서 이루어졌다.
또한 아그네스가 클뤼니 수도원들이 옹호하는 교회 개혁에 헌신한 것도 아그네스를 아내로 맞이하겠다는 하인리히의 결심을 뒷받침해주었다. 1050년 11월 아그네스는 아들을 낳았다. 이 아들은 나중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가 되었다. 이어서 둘째 아들 콘라트와 세 딸이 태어났다.
하인리히에게 아직도 모자란 것은 최고의 명예, 즉 교황이 직접 주재하는 황제 대관식뿐이었다.
교황에 대한 지배
하인리히가 1046년 로마에 도착했을 때, 로마에서는 3명의 경쟁자가 교황의 자리를 요구하고 있었다.
하인리히는 독일 왕이 황제로서 누리는 주권을 무조건 인정하는 평화로운 이탈리아를 원했고, 깨끗한 교황의 손에서 황제의 제관을 받고 싶어했다. 그가 수트리에서 소집한 교회회의는 그의 명령에 따라 독일인인 밤베르크 주교 쥐트거를 새로운 교황 클레멘스 2세로 선출했다. 같은 날 새 교황은 황제 부부에게 제관을 씌워주었다. 로마는 제국도시가 되었고 교회에 대한 지배권, 즉 미래의 교황 선거에서 결정적인 구실을 하는 투표권은 독일 왕에게 넘어갔다(교황제). 뒤이은 몇 년 동안 하인리히는 이 권리를 이용하여 3번 더 교황을 임명했다.
노르만족이 칼라브리아를 정복하기 시작했을 때 하인리히는 남부 이탈리아에 전혀 개입하지 않았다. 그대신 그는 이 문제를 교황 레오 9세에게 맡겼고, 교황은 결국 노르만족에게 패배했다. 황제는 자신의 권력 기반이 확고하다고 믿었기 때문에, 외교 문제에서 성공했듯이 국내 정책에서도 성공을 거둘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이것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는 성직자들 사이에 사실상 친구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독일과 그 이웃 영토에서 교회 개혁을 추진할 수 없었다. 스칸디나비아의 교회와 작센 교회는 점점 더 그에게 반기를 들었다. 또한 하인리히는 황제의 자리에 있는 동안 거의 내내 로렌 공작인 고드프루아 2세와 다투어야 했지만, 고드프루아를 징계하는 대신 용서를 거듭했다.
곳곳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1054~55년에 바이에른 공작 콘라트와 케른텐의 벨프 3세는 광범위한 음모를 통해 하인리히의 통치를 뒤엎으려 했고, 그들이 죽은 뒤에 비로소 그는 큰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에 대한 저항은 갈수록 거세졌지만 하인리히는 계속 온건하게 다스렸다. 그의 행동이 갈피를 잃게 된 것은 아마 자신의 권력이 약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물려받은 공작령에 매달리는 대신, 그 땅들을 남에게 맡겼다. 그러나 사람들을 잘못 선택했고, 충성스럽지 못한 봉신들에게 결정적인 조치를 취한 적도 거의 없었다.
더이상 그는 반대자들(작센과 독일 남부의 세속귀족들, 로렌과 토스카나의 동맹 세력, 갈수록 독립성을 되찾는 교황, 모험을 추구하는 노르만족)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다.
황제의 정책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 정책이 교회에는 지나치게 관대하고 세속군주들에게는 적대적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비판 가운데 일부는 교회 개혁가들 사이에서 제기되었다. 문제가 막다른 상태에 이르자 하인리히는 더이상 아무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그가 군사력을 지탱하기 위해 국민에게 요구한 부담은 처음부터 너무 과중했고, 상속재산과 재산 몰수를 통한 수입도 상당했다.
그가 다스리는 동안 제국의 기본 재산이 늘지 않았다면, 그것은 세속귀족들을 달래기 위해 공작령을 나누어주는 한편, 성직자 측근들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제국의 기본 재산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다른 수입원을 찾기 위해 빚을 얻고, 저당물을 유질처분하고, 제국의 고위 관직이나 교회의 성직을 주는 대가로 재물을 요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성직을 매매하는 관행을 폐지하는 것은 하인리히처럼 고결한 통치자에게도 어려운 일이어서 실행할 수 없었다(성직매매). 그결과, 그의 적들은 그가 탐욕스럽다고 비난했다.
일부 자료에 따르면, 하인리히는 말년에 '자신에게 성실하지 않게' 되었고 보통 사람은 접근하기 어려운 상태가 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재판 심리를 거부했다고 하며, 통치 초기에는 정의를 집행하는 일에 열성을 보임으로써 아낌없는 칭찬을 받았다.
제국의 분열
그의 성격 변화는 통치의 실책과 실패에서 비롯했을지도 모른다.
1046년 이후, 종교적 이상과 가혹한 정치적 현실이 만들어낸 하인리히는 그가 얻은 땅(독일 북동부, 헝가리, 이탈리아 남부, 로렌)이 모두 사라져버리는 것을 보았다. 그가 자신의 업적이라고 자부한 교회 개혁조차도 그를 배반하기 시작했다. 이단자를 무자비하게 박해하고 때로는 교수형에 처하면서도 그것을 속죄하기 위해 고행을 했던 고위 성직자 하인리히는 관대함과 선량함 및 속세의 정의가 군주에게 반드시 이익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는 것을 말년에 깨달았다.
한편 하인리히의 성격을 바꾸어놓은 것은 육체적 질병이었는지도 모른다. 1045년에 그는 중병에 시달렸기 때문에, 왕위 계승에 관한 협상이 시작되었다. 제국의 곳곳에서 들어오는 나쁜 소식이 그의 건강을 더욱 악화시킨 것은 분명하다. 1056년 9월에 하인리히는 그가 좋아하는 거처인 고슬라어 근처의 보트펠트 성에서 몸져누웠다.
그는 아들 하인리히의 왕위 계승을 확실하게 해놓은 뒤, 10월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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