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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훈구파는 조선 초기 세조의 집권을 도와 공신이 되면서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이후 형성된 집권 정치세력이었다. 훈구파의 지위는 세조대 후반 일시적으로 약화되었다가 어린 성종이 즉위하자 훈구대신들은 더욱더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1476년 성종이 세조비의 수렴청정을 철회하고 친정체제를 구축하면서 훈구파의 지위는 약화되었다. 이것은 왕권이 강화되는 한편 사림파가 정치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사림파와 훈구파의 갈등은 1498년 무오사화를 시작으로 여러 차례의 사화를 초래했다. 1519년 훈구파가 주도한 기묘사화 이후 훈구파가 다시 정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오랜 기간 집권세력이었던 훈구파는 명종 연간을 거쳐 척신세력이 권력을 장악하게 되면서 사림파와 대립했던 정치세력으로서의 의미도 퇴색되어갔다.
관학파라고도 한다.
훈신(勳臣)·훈구대신·훈구공신 등의 용어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은 조선 초기 세조의 집권을 도와 공신이 되면서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이후 형성된 집권 정치세력이었다. 이들은 세조의 측근으로 등장하여 그 이후 몇 차례의 정치적 격변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존재했는데, 이는 정치변동 과정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공신으로 책봉되었기 때문이다. 즉 1453(단종 1)~71년(성종 2)의 약 20년 동안 정난(靖難)·좌익(佐翼)·적개(敵愾)·익대(翊戴)·좌리(佐理) 공신으로 책봉되었으며, 그뒤에도 1506년 중종반정에 따른 정국공신(靖國功臣)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 공신으로 거듭 책봉됨으로써 중요한 정치세력을 이룰 수 있었다.
이들은 때로 군주와 정치적 갈등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대체적으로 사림파(士淋波)와 정치적 갈등을 빚어 여러 사화를 일으키기도 했다. 이러한 갈등은 여러 면에서 지적되고 있지만, 대체로 향촌통치의 방법을 둘러싸고 관권중심의 지배체제를 확립하려는 훈구파와 사족중심의 지배체제를 형성하고자 하는 사림파 사이에 나타났다. 흔히 훈구파는 사장(詞章)을, 사림파는 경술(經術)을 강조했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상 양 세력 모두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그 둘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즉 훈구파나 사림파는 모두 동일하게 성리학을 배경으로 하는 지배계급으로 다만 성리학을 실천함에 있어서 서로 방법이 달랐던 것이다.
훈구파의 학문경향을 사장중심이라고 하는 것은 조선 초기 국가체제의 정비과정에서 경술보다는 현실적으로 사장을 강조한 것과 관련이 있다.
훈구파는 사림파에 비해 이른 시기에 군현 이족(吏族)에서 사족화했으며, 정치적으로 사림파와 대립하여 훈구파라는 정치세력으로 이해되기 전부터 조선의 국가체제 정비에 깊숙이 참여했다. 한명회·권람·홍윤성·정인지·신숙주·조석문·정창손·최항·김국광·구치관 등이 이에 속한다. 이 계열에 주축이 된 관료들은 대부분 집현전을 거쳐 성장한 이들로, 그중에는 〈경국대전〉·〈동국통감〉·〈동문선〉·〈동국여지승람〉 등의 편찬사업에 참여하여 왕조의 통치이념을 체계화하는 데 기여한 인물도 많았다.
그러나 조선초의 집권인물들 모두가 훈구파는 아니고 대개 세조대 이래의 공신들을 중심으로 한 집권 정치세력이 훈구파의 주류를 이루었다. 즉 세조의 즉위를 도왔던 이들은 1453년(단종 1)에 정난공신, 1455년(세조 1)에는 좌익공신으로 책봉되었다.
세조의 즉위가 선양(禪讓)이라는 합법적인 형식을 통해 이루어졌지만, 성리학의 의리와 명분이라는 기준에서는 크게 벗어나는 일이었다. 따라서 사육신 사건, 금성대군 역모사건 등이 일어났고 그결과 세조와 공신이 권력의 중심이 되는 정계 개편이 이루어졌다. 이들은 중요한 관직을 독점하고 인사권과 병권을 장악했으며 각종 특권을 독차지하여 부정부패를 일삼았다. 또한 토지를 강점하고 양인농민을 노비로 삼아 토지를 경작하게 하는 등 각종 경제적 이익을 독점했다.
이러한 훈구파의 지위는 세조대 후반 일시적으로 약화되었다.
1467년에 세조의 중앙집권화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이시애(李施愛)의 난에 한명회·신숙주·김국광·노사신 등 일부 훈구대신들이 연루되었고, 이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운 남이 등의 신진세력이 적개공신(敵愾功臣)으로 책록되어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했다. 남이는 태조의 외손이라는 강력한 배경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오위도총부총관이 되어 병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그 이듬해 세조가 죽고, 예종이 즉위하면서 실시한 왕권강화책을 둘러싸고 남이 등의 세력과 종전의 훈구파 사이에 본격적인 갈등이 재연되어 남이옥사가 일어나게 됨으로써 정치세력의 변동이 일어났다.
남이의 옥은 남이가 한명회·노사신·김국광 등의 훈구대신을 제거하려고 모의를 했다는 유자광의 고발이 발단이 되어 일어난 옥사로, 이 사건으로 인해 남이 등의 새로운 세력은 제거되고 종전의 훈구파가 정치의 전면에 재등장했다. 더욱이 이들은 이 사건 직후에 익대공신으로 책봉되면서 정치적 위치가 크게 강화되었다.
예종이 재위 1년 만에 죽고 어린 성종이 즉위하자 훈구대신들은 더욱더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특히 1471년(성종 2)의 좌리공신 책봉 때 종전의 공신으로 책봉 받았던 자가 반 이상을 차지하고 그들의 친인척이 다수 포함됨으로써 훈구파의 수도 크게 늘어났다. 아울러 훈구파는 1467년(세조 13) 이래 원상(院相 : 어린 임금을 보좌하며 정무를 다스리는 직책)이 되어 특정한 직사를 갖지 않고도 정치에 깊이 관여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 가문 상호간에 통혼관계를 맺음으로써 세습적으로 지위를 유지했다.
그리고 왕실과의 혼인을 통하여 외척으로서의 지위도 확보했다. 독점적인 정치세력의 등장은 15세기 후반 이후에 왕권의 약화를 가져오고 관료적 지배체제라는 조선 본래의 권력구조를 운용하기 어렵게 했다.
조선은 고려와 비교하여 지배층이 광범위하게 정치 운영에 참여할 수 있게 만들어진 정치체제였다. 그런데 대단위 농장을 경제기반으로 한 훈구파가 권력을 독점하자, 이에 대해 이 시기 성장하고 있던 중소지주층인 사림파가 비판을 제기했다.
이러한 권력독점과 관료들의 사리사욕 추구에 대한 비판을 제기하는 논리로 나온 것이 성리학적인 공도론(公道論)을 제시했다. 이는 성리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한 정치운영을 주장하면서, 훈구파의 권귀적(權貴的) 성향에 대해 비판을 한 정치공세 논리였다.
1476년(성종 7) 성종이 세조비의 수렴청정을 철회하고 원상을 폐지하여 친정체제를 구축하면서 훈구대신들의 지위는 약화되었다.
이것은 왕권이 강화되는 한편 사림파가 정치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사림파계열은 새로운 정치질서의 확립을 추구하고 성리학적 향촌질서를 정착시킴으로써 향촌민의 안정과 향촌지주 자신들의 사회적·경제적 기반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훈구파에 대한 비판을 가했다. 이러한 사림파는 이전에 혁파되었던 유향소(留鄕所)를 복립하고자 했으며 훈구파는 맹렬하게 반대했다.
이러한 대립은 1483년부터 계속되다가 1488년에 유향소가 다시 생겼으나 이때의 유향소는 중앙집권체제의 보조기구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이때 복립된 유향소는 결국 이전과 같이 사림파의 세력기반이 될 수 없었다. 이에 사림파는 중앙의 정치무대에서 훈구파를 더욱더 비판해갔다. 이러한 사림파와 훈구파의 갈등은 결국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를 시작으로 여러 차례의 사화를 초래했다. 무오사화에서 사림파가, 1504년 갑자사화에서는 훈구파가 각각 큰 타격을 받았다. 그러다가 1506년의 중종반정은 훈구파가 재기하는 계기가 되었다.
중종반정으로 배출된 정국공신은 이후 정국을 주도했다.
그러나 1515년(중종 10)을 전후하여 서서히 사림파가 언관 진출 등을 통해 등장하여, 정국은 다시 훈구파와 사림파가 대립되었다. 그리하여 1519년(중종 14)에 훈구파가 주도한 기묘사화가 일어났고 이후 훈구파가 정권을 장악하다가 외척인 김안로가 잠시 전횡했으며 김안로를 제지한 이후 다시 훈구파가 장악했다(기묘사화). 그런데 김안로일파의 제거에 외척들도 가세했기 때문에 이제부터 훈구파는 사림파뿐만 아니라 외척세력과도 정치권력을 둘러싸고 갈등하게 되었다.
1545년(명종 즉위)의 을사사화로 인해 책봉된 위사공신 역시 외척에 의존한 세력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명종 연간을 거쳐 이기와 같은 인물이 잠시 권력의 핵심에 있었다 하더라도 점차 종전의 공신세력은 퇴조했다. 그리하여 오랜 기간 중요한 집권세력이었던 훈구파는 척신세력이 권력을 장악하게 되면서 사림파와 대립했던 정치세력으로서의 의미도 퇴색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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