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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이시애는 함경도 지역의 전형적인 토호 가문 출신이다.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강화되자 토호들의 세력이 점차 축소되었고 1465~66년에 시행된 양전과 군액확장은 토호의 부담을 가중시켰다. 또 함경도에 파견된 수령이나 군관들의 주민에 대한 불법적인 침탈로 원성을 사던 시기였다.
1467년 이시애 세력은 함경도절도사를 남도의 군사들이 북도민들을 죽이려 한다고 선동하고, 중앙에서는 강효문 등이 모반을 일으키려 한다고 보고하면서 중앙 파견 지방관들을 살해했다.
정부에서 군사를 보냈으나 반란군의 기세가 대단하여 관찰사 신면을 살해하고 중앙정부의 토벌군을 격퇴하기도 했다.
내분으로 인해 이시애의 근친이나 지인 등이 정보를 제시함으로써 정부군에게 상황이 유리해져 8월에 진압되었다.
이시애는 판영흥대도호부사를 지낸 인화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대대로 이 지역에서 세력을 일구어온 전형적인 토호출신이었다.
함경도지방은 동북 국경지대일 뿐 아니라 경내에도 적지 않은 여진인들이 잡거하고 있어 중앙정부로부터 특별한 관심을 사고 있었다. 게다가 이 지역 토호들 중에는 고려말부터 이성계일가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고, 세종대에 시행된 6진의 개척사업에도 적극적으로 참가하여 상당한 사회적·경제적 권력을 보장받은 이들도 있었다. 이로 인해 조선 건국 초기 이 지방의 자생적 토호들은 상당한 자치권을 갖게 되었다.
이 난의 주도자인 이시애 집안도 이러한 토호 가문의 하나였다. 그러나 정치상황이 변동되어 지방제도의 개편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지면서 함경도 일대에 대한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강화되고, 그결과 토호들의 세력이 점차 축소되었다. 특히 세조대의 중앙집권강화책은 함경도에 대해서 일련의 새로운 문제들을 제기했는데, 특히 1465~66년 이후에 시행된 양전과 군액확장에 관한 계획은 이 지방의 일반농민들이나 토호들의 국가에 대한 부담을 급격히 증가시켰다. 또한 비슷한 시기에 이 지역에 파견된 수령이나 군관들이 거의 남쪽 양반출신자들로서, 주민에 대한 불법적인 침탈을 대대적으로 감행하여 많은 원성을 사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국경지대를 방어하기 위해 출동하는 부방, 서울로 오는 야인들의 영송, 해동청·은 등 특산물들의 공납 등에서 벌어지는 불법적인 수탈은 주민에게 커다란 고통을 안겨주었다. 이와 같은 여러 사정으로 인해 이 지역 하층 농민들은 자기들의 불행과 빈곤의 주요원인이 남쪽 양반 출신의 관원들이 행하는 탐오와 횡포에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으며, 그것은 또한 이 지방 토호들로 하여금 양반 관료들을 반대하는 그들의 투쟁에 하층 농민들의 힘을 이용할 수 있게 했다.
1467년 5월 당시 주민들로부터 많은 재물을 탈취하여 원성을 사고 있던 함경도절도사 강효문(康孝文)이 순찰하다가 길주에 도착했는데, 이때 이시애와 그의 아우 이시합(李施合) 등이 밤중에 이들을 암살하고 남도의 군사들이 쳐들어와서 북도민들을 죽이려 한다고 선동하고, 중앙에서는 강효문이 한명회·신숙주와 같은 유력자와 결탁하여 모반을 일으키려 한다고 보고했다. 그리고 길주군사들을 동원하여 중앙에서 파견한 경성 이북 제진의 지방관들을 살해했다. 처음에 보고를 접한 중앙정부는 일시 혼란에 빠졌으나, 바로 이시애의 행동이 반란을 일으키는 조짐이라는 것을 알고 즉시 진압을 계획했다.
종친인 구성군 준을 병마도총사로 삼고 호조판서 조석문을 부총사로 임명하여 중앙군을 인솔하여 토벌하게 했다. 그러나 반란군의 기세가 대단하여 관찰사 신면을 살해하고 중앙정부의 토벌군을 격퇴하기도 했다. 그러나 함경도에 거주하던 이씨왕실의 의친이나 공신 일파, 내수사의 서원이나 노복들이 이시애의 군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탐지해 알려오자 점차 상황은 정부군에 유리해졌다. 따라서 8월에 들어 곳곳에서 이시애의 군을 격파하기 시작했고, 내부에 분열을 가져오게 했다. 결국 허유례(許有禮)의 사주를 받은 이주·이운로(李運露) 등이 자신의 대장인 이시애·이시합 등을 체포하여 정부에 넘김으로써 난은 진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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