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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림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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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15세기말부터 16세기에 이르러 귀족화된 중앙의 훈구파와 정치적·사회적으로 대립되는 재야 정치세력인 사림파의 문학.

사림·훈구의 문학론

조선초 훈구파는 문예적인 재능을 발휘해 수사적 기교에 힘쓰는 사장(詞章)을 중요하게 여겼는데 사림파는 이와 반대였으므로 정치적 입장에 있어서도 서로 맞섰다.

사림파는 '도문일치'(道文一致)의 문학관으로 '도'(道)를 강조해 훈구파의 문풍(文風)을 고치고자 했다. 훈구파도 도가 근본임을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실제는 문(文)을 지나치게 강조해 문학적 재능으로써 정치적 요직을 맡고 가문의 영달을 꾀했다. 사림파와 훈구파의 대립은 15세기말 김종직성현 사이의 이론적 대립에서 잘 살펴볼 수 있다.

당대 사림파의 대표적 인물인 김종직은 문장의 원리가 육경(六經)에 있다면서 "문장은 경술(經術)에서 나므로 경술은 문장의 근본이다. 비유하면 초목에 뿌리가 없이 어떻게 가지와 잎이 무성하고 꽃과 열매가 곱고 알찰 것인가"라고 했다. 이에 대해 성현은 "비유컨대 뜰에 선 나무는 가지와 잎과 꽃이 번화한 뒤에야 밑둥과 뿌리를 덮어 나무가 제대로 자라게 될 것이다"라고 했다.

김종직은 자신의 문학론을 중후하고 역동적인 시풍으로 개척해 실천으로 옮겼는데, 신라의 고사(故事)를 읊은 〈동도악부 東都樂府〉가 대표적인 예이다.

그밖에 신라 이래의 명시(名詩)를 모아 엮은 〈청구풍아 靑丘風雅〉와 명문(名文)을 실은 〈동문수 東文粹〉 등이 있다. 두 책은 왕명에 따라 서거정 등이 엮은 〈동문선〉과 거의 같은 시기에 이루어진 것으로, 작품을 선정하는 기준이 서로 대립적이다.

사림파와 훈구파의 대립은 16세기 중기에 이르러 사림파가 중앙정계에 진출해 자리를 잡음으로써 사림파의 승리로 끝났다. 그뒤 중국과의 외교에 필요하다는 식의 궁색한 사장론은 후퇴하고 문학은 도학에 밀착되었다.

사림문학과 도

이이는 문학과 도학의 관계를 '이도위문'(以道爲文)이라고 말했다.

이이(李珥)

조선의 성리학자, 문신

ⓒ Seonookim/wikipedia | Public Domain

즉 문학은 따로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학문과 수양에 따라 저절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문(文)은 도(道)를 싣는 수레라고 하여 사림파의 문학론인 '재도론'(載道論)이 정착되었다. 특히 16세기 이후 성리학에 의한 사상적인 지배가 공고해지면서 사림파의 문학의식은 당시의 보편적인 문학론으로 발전했다. 이들은 진정한 문학이란 오로지 덕행과 학문에 의한 내적인 자기완성에 의해서 저절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성리학을 실천하는 가운데 도가 높아지고 그에 따라 내부에 기(氣)가 확충될 때 비로소 올바른 문학이 나올 수 있다고 했다. 따라서 문학은 문학을 목적으로 삼아서는 안 되므로 문학을 전공하는 것을 사장학이라 하여 배격했다. 예를 들면 이황은 제자들에게 "유가(儒家)의 의미는 스스로 구별되니, 문예에 힘쓰는 것은 유가의 일이 아니며, 과제(科第)도 유가의 일이 아니다"라고 하여 과거와 문예에 힘쓰는 태도를 비판했다. 사림파에 있어서 진정한 문학은 도학자가 아니고는 이룰 수 없는 것이었다.

이황(李滉)

이황 동상, 서울 남산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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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은 "문학을 어찌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문을 배우는 이유는 마음을 바로 하는 데 있다"고 했다. 이에 따르면 도학이 원래 인격의 수양과 떨어질 수 없듯이 문학도 내면적 수양의 한 방편으로 인식되었다.

이 문학관의 바탕은 처사문학(處士文學)이며 16세기 이후의 관각문학(館閣文學)은 이 영향권 아래 있었다. 이 문학은 인간의 다양한 욕구를 부정적으로 보고 인욕을 억제하고 천리(天理)를 보존해야 한다는 도학의 사상이 그 바탕이었으므로 정감을 자유롭게 펴는 것을 꺼렸다.

이때문에 사림문학은 예술적인 내용과 생동감이 부족하게 되었다.

이 시기 사림파들이 지녔던 미의식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① 기교주의를 반대해 솔직담백한 충담소산(沖澹簫散)을 최고의 경지로 보았다. ② 현실을 멀리하고 외물(外物)에 집착하지 않고 초연한 자세를 취했다. 자연에 대해서도 사물의 개성보다는 고상하고 깊은 맛을 느끼는 한미청적(閒美淸適)을 추구했다.

③ 인욕을 씻고 청징(淸澄)한 정신을 찾으려 했다. 맑고 깨끗한 마음의 상태를 자기수양의 지표로 삼아 청신쇄락(淸新灑落)의 경지를 추구했다. 이러한 미의식의 공통된 특징은 미적 가치보다 윤리적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는 점이다. 또한 대립과 갈등보다는 질서와 평정을 추구하고 인간적 현실을 뛰어넘어 고답적인 미의 경지에 높은 가치를 두었다.

사림문학의 평가

사림파의 문학론은 문학을 출세의 수단으로 삼고 기교에 치중하던 사장파의 문학 경향에 비한다면 참신하고 진지한 것이었다.

그러나 도를 지나치게 절대화해 규범성·보편지향성과 같은 역작용을 불러일으켰다. 이때문에 가장 효용론적인 입장을 취하면서도 사림파의 문학은 현실과 유리되었다. 다양한 인간 감정 중에서 특정의 것만 받아들여 개인이나 민족의 개성, 독자성을 무디게 만드는 부정적인 측면이 나타난 것이다. 이는 문학을 도학에 종속시켜 그 독자성을 인정하지 않고, 인간 현실의 다양한 경험을 반영한 문학의 창출을 억제했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는 이러한 사림문학의 부정적인 측면들이 극복되는 과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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