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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전근대시대 관리임용제도의 하나.
우리나라의 경우 삼국시대부터 문무관에게 현량(賢良)·효순(孝順)의 천거를 명령한 기록이 보인다.
자세한 규정은 알 수 없으나 피천거자의 자격과 등용에는 집단적·신분적 제한이 보다 강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삼국사기〉 열전 을파소조(乙巴素條)에 왕이 현량의 천거령을 4부(四部)에 내리는 기사는 이런 사례의 하나이다. 천거제가 정규 관료제도로 정리된 때는 고려시대로, 고려는 관료제와 과거제를 정비하면서 천거제도 함께 체계화했다. 987년(성종 6) 8월 최승로(崔承老)의 건의에 따라 12목에 지방관과 경학박사·의학박사를 파견하면서 지방관이 경에 밝은 자(明經), 효제(孝悌)가 있는 자, 의술에 뛰어난 자를 천거하도록 규정했다.
이후 천거는 지방관 임무의 하나가 된 것으로 보인다. 992년(성종 11) 1월에는 문재(文才)나 무략(武略)이 있는 자는 궁궐에 나와 자천(自薦)하게 했으며, 5월에는 5품 이상의 경관은 모두 1명씩 피천자의 덕행과 재능을 적어 천거하게 했다. 1127년(인종 5)에는 부적격자를 추천했을 때 그의 추천자를 처벌하는 법을 시행했다.
그러나 고려 중기부터 지방인물에 대한 천거는 제대로 시행되지 않고 인사는 중앙의 소수 귀족가문에 의해 장악되었으며, 천거제는 오히려 이들의 세력을 증대시키는 방편으로 활용되었다.
특히 고려시대에는 남반(南班)·서리(胥吏)에서 문·무 관료로 승진하는 길이 열려 있었는데, 중앙세가는 천거제를 악용하여 자신의 친척이나 문객(門客)·하수인(下手人)·천예(賤隷)를 하급관료·서리로 임명하고, 이들을 다시 지방관이나 상급관리로 천거함으로써 관료들의 무능과 부패를 촉진시켰다. 이러한 모순을 타개하기 위해 고려 후기에는 지방관에게 현지에서 유일천거하게 하고, 관료후보자의 천거권도 재상만이 아닌 신진관원이나 대간에게 확대하는 조치가 충선왕의 즉위교서를 비롯하여 여러 번 취해졌다.
1353년(공민왕 1) 백문보(白文寶)는 사마광(司馬光)의 안을 따라 매년 경외(京外)의 관리들이 인재를 10과(科)로 나누어 과마다 1명씩 천거할 것을 건의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정계는 소수문벌에 의해 장악되어 이런 조치들은 큰 실효를 보지 못했다.
조선 건국 직후부터 〈경국대전〉 편찬시기까지 천거제는 고려시대의 문제점과 고려말의 방안들을 고려하여 대폭 정리되었다. 전반적인 특징은 ① 식년천거(定期薦擧)의 강화, ② 천거제 운영규정의 관직별·종류별 세분, ③ 관찰사·수령 같은 중요 관직의 특별규정 마련, ④ 서리·음자제(蔭子弟)·기술관의 천거에 시험제도 첨가, ⑤ 지방관의 천거임무 강화 등을 들 수 있다.
조선 건국 후 동반 6품 이상, 서반 4품 이상 관은 3년마다 모여 각지의 인물을 문과·무과·문음·이과(吏科)·역과(譯科)·음양과·의과(醫科)의 7과(또는 9과라는 기록도 있음)로 분류하여 과마다 1명씩 천거하도록 규정했다.
추천자의 범위는 고려와 비슷하지만, 조선 초기 군현제 정비에 따라 외관 파견지역이 대폭 증가하여 천거제 운영범위는 고려 때보다 훨씬 확대되었다. 이때의 피천자들은 바로 관료로 등용되는 경우도 있지만, 관료후보자로 수록되는 경우가 많았다. 무재자와 서리·기술관들을 위해서는 별도의 규정이 마련되었다.
1405년(태종 5)에 동반 6품, 서반 4품 이상의 경외관은 3년마다 3품 이하의 무재자를 추천하게 했다. 처음에는 피천자들을 명부에 올렸다가 갑사에 자리가 생길 때마다 충원하게 했는데, 세종 때는 〈무재록 武才錄〉을 만들어 여기에 수록해 두었다가 지방 무관직, 군관 등의 인사에 〈무재록〉 수록자 중에서 선정하도록 했다. 의(醫)·율(律)·산(算)·천문(天文) 등의 기술관과 수령·서리·음자제에 대해서는 과거와 취재시험을 강화해 시험을 통과한 자를 천거하거나 천거된 자도 시험에 합격해야 해당 관직에 취임할 수 있게 했다.
이렇게 후보자 명부에 수록된 자, 거관(去官) 후 승진대기자 등은 인사행정 때 다시 추천되어야 했다. 이때 대신층의 전횡을 막기 위해 중요 관직에는 반드시 3명을 천거하여 올리면 왕이 낙점법(落點法)으로 선정했다. 6조·대간에서만 감사를 천거할 수 있게 했으며, 전랑에게는 전임자가 신임자를 추천하는 자천권(自薦權)을 부여했다. 사관(史官), 청요직(淸要職), 군영(軍營)의 장 등에는 관직마다 독특한 천거규정을 마련하여 반드시 특정 경력이 있거나, 시험을 거쳐야 했다.
이런 규정들은 조선 후기로 갈수록 더욱 세분화되었다. 한편 거관자나 승진대기자들은 조선시대에도 실직(實職)이 부족하여 누적이 심했으며 이들 중 관직 수여자의 선정은 고과·포폄권을 가진 해당 관서의 당상관이나 제조(提調)들이 주로 담당했다. 관서의 특성에 따라 다음에 받을 수 있는 관직이나 관서를 지정하거나 관례화하여 이들의 천거권이 남용되지 않도록 했다.
〈경국대전〉의 천거규정에 의하면 추천자가 경외관 동반·서반 3품 이상이 되고 1명이 1번에 천거하는 인원도 3명으로 줄었다.
이것은 15세기말 이후 관료군이 확대되고 각종 시험제도와 순자법(循資法) 등 인사규정이 세밀해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훈구파의 세력이 비대해져 여러 조치에도 불구하고 천거제가 다시 이들에 의해 장악되는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다. 조광조(趙光祖)가 주장했던 현량과(賢良科) 시행과 사림파에 의한 천거제 강화운동은 천거제 본래의 의미를 회복하여 소수가문에 의한 권력집중 현상을 타개하기 위한 시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유일천거나 효자·순손 천거도 제기능을 발휘할 수 없었다. 효자·순손의 천거령은 왕의 즉위초나 재해가 있을 경우 수시로 내려졌지만, 명종대 윤원형 일파를 제거한 뒤 이황(李滉)·조식(曺植)·기대승(奇大升) 등 각지 사림의 거두들이 천거되었던 때나, 효종대 송시열과 그의 문인들이 산림인사(山林人士)로 중앙에 대거 진출할 때 등 특별한 정치적 의미가 있던 시기를 제외하고는 형식적으로 운영되었다. 〈속대전〉에서 생원·진사의 천거는 보거(保擧:보증)가 필요 없게 하고, 지방은 도별로 인원까지 규정하여(단 전함관은 인원에 구애되지 않음) 식년마다 향인(鄕人)이 수령에게 유일천거하면, 관찰사가 다시 천거하게 했으나 이것도 점차 유명무실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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