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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417(태종 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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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468(세조 14) |
국적 | 조선, 한국 |
종교 | 불교 |
재위 | 1455년~1468년 |
시호 | 혜장승천체도열문영무지덕융공성신명예흠숙인효대왕(惠莊承天體道烈文英武至德隆功聖神明睿欽肅仁孝大王) |
능묘 | 광릉(光陵) |
요약 조선 제 7대 왕이자 세종의 차남으로 이름은 유, 자는 수지. 어린 단종이 즉위한 후로 대신들에게 권력이 집중되고 왕권이 약화되자 1453년에 계유정난을 일으켜 반대파를 숙청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왕권과 중앙집권체제 강화를 위해 집현전 폐지, 군현제 정비, 직전법 시행 등의 여러 사회, 경제 정책들을 시행했다. 또한 민족 의식의 고양을 위해 불교를 진흥시키고 우리 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려는 통사 편찬 사업을 진행시켰다.
목차
접기개요
재위기간 동안 왕권강화, 군현의 정비, 직전법(職田法)의 실시, 군액(軍額)의 증강, 불교의 진흥 등의 정책을 실시해 조선 초기 왕권 강화에 공헌했다.
이름은 유(瑈). 자는 수지(粹之). 세종의 둘째 아들이고, 문종의 아우로, 어머니는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이다. 비는 윤번(尹璠)의 딸 정희왕후(貞熹王后)이다.
계유정난과 즉위
1428년(세종 10) 진평대군(晉平大君), 1432년 함평대군(咸平大君)에 책봉되었다가 이해 7월 진양대군(晉陽大君)으로, 다시 1445년 수양대군(首陽大君)으로 책봉되었다.
세종은 왕위에 오르자 유가정치(儒家政治)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세자(뒤의 문종)를 성균관에 입학시킴은 물론 왕업을 튼튼하게 하기 위해 왕자들의 교육에도 힘썼다. 이러한 세종의 배려 속에 왕자들 가운데 다재다능했던 수양대군은 세종의 병약함을 기회로 국정전반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는 대군으로 있으면서 전제상정소(田制詳定所)를 설치해 도제조(都提調)가 되어 토지제도의 재개혁을 맡았으며, 〈치평요람 治平要覽〉·〈역대병요 歷代兵要〉·〈의주상정 儀註詳定〉 등의 책을 찬술했고 중국의 〈운회 韻會〉를 한글로 번역하기도 했다.
세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문종이 재위 2년 3개월 만에 죽고 12세의 어린 단종이 즉위하자 세종 때의 안정된 왕권과 정치는 크게 약화되어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 등 의정부 대신들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현상이 초래되었다.
수양대군은 권람(權擥)·한명회(韓明澮) 등을 모사로 삼고, 1453년 10월 홍달손(洪達孫)·양정(楊汀) 등 심복무사를 친히 동원해 김종서·황보인·정분(鄭苯) 등을 비롯해 조극관(趙克寬)·이양(李穰)·조수량(趙遂良) 등 정부의 핵심인물들을 추살(椎殺) 또는 주살(誅殺)해 제거했으며, 대군 중에서 가장 강력한 경쟁자인 안평대군(安平大君)을 모반의 죄명을 씌워 강화로 축출한 뒤 사사했다.
중앙의 권신을 제거한 수양대군은 그 후환을 막기 위해 함길도도절제사로 동북지방의 군권을 장악하고 있던 김종서의 여당인 이징옥(李澄玉)을 파면하고 그 후임에 박호문(朴好問)을 임명했다. 이에 반발한 이징옥이 박호문을 죽이고 스스로 대금황제(大金皇帝)를 칭하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곧 진압되었다.
무단적인 방법으로 실권을 장악한 수양대군은 스스로 영의정부사·이조판서·병조판서·내외병마도통사 등 여러 중직을 겸해 전권과 병권을 독차지하고 정인지(鄭麟趾)를 좌의정에, 한확(韓確)을 우의정에 임명하도록 하여 새 정부를 구성했다. 이렇듯 대세가 수양대군에게 기울어진 것을 알아챈 단종은 수양대군 추대세력의 압력에 굴복해 마침내 스스로 왕위를 수양대군에게 물려주었다.
왕권강화와 제도의 정비
즉위 후 세조는 정인지·이사철(李思哲)·정창손(鄭昌孫)을 의정부 재상에 임명하고, 원년 9월에 자신의 찬위(簒位)에 공이 있는 44명을 좌익공신(佐翼功臣)에 임명했다.
세조의 즉위로 세종조 말기부터 적극적인 정치 참여를 희구해 오던 집현전 유신들은 자신들의 뜻을 펼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왕의 전제권을 확립하려는 세조와 관료지배체제를 유지하려는 집현전 출신의 유신 사이에 대립이 벌어졌다. 세조는 1436년(세종 18)에 부활되었던 의정부서사제도(議政府署事制度)를 폐지하고 6조직계제(六曹直啓制)를 실시했는데, 이같은 세조의 전제권 강화에 불만을 품은 일부 유신들은 표면적으로는 세조의 불의의 찬탈을 명분으로 내세우며 세조를 왕좌에서 몰아내고 단종을 복위시켜 관료지배체제를 구현시키려 했다.
그리하여 성삼문·박팽년·이개·하위지·유성원·유응부 등 전직·현직 집현전 출신들은 1456년(세조 2) 6월 창덕궁에서 명의 사신을 향응하는 기회를 이용해 세조를 시해할 계획을 세웠으나, 이 모의에 참여했던 김질·정창손 등의 밀고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세조는 이 사육신 사건을 계기로 대규모 숙청을 단행했으며 단종을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해 영월로 유배시켰다. 또한 금성대군(錦城大君)이 영남의 유생들과 단종복위운동을 벌이다 발각되자 노산군을 다시 서인으로 폐하고 1457년 10월 관원을 시켜 사사했다.
세조는 사육신 사건을 숙청으로 마무리한 뒤 집현전 유신의 유교적 이상주의가 왕권강화에 저해된다고 생각해 집현전을 혁파했다. 그러나 세조는 식년시 이외에도 매년 별시를 시행했고, 1465년에는 발영(拔英)·등준시(登俊試)라는 특별시험을 실시해 친히 문제를 제출하는 등 자신의 주도하에 인재를 선발해, 이들로 하여금 왕권을 밑받침하는 하료집단(下僚集團)을 구성하고 훈신세력을 견제하게 함으로써 왕권의 안정을 도모했다.
한편 세조는 자신의 정치이념을 신법전에 반영시키기 위해 최항(崔恒)·한계희(韓繼禧)·노사신(盧思愼) 등으로 하여금 〈경국대전 經國大典〉 편찬에 종사하게 했으며, 감수와 교열을 직접 담당했다. 1460년 호전(戶典)을, 이듬해에는 형전(刑典)을 반행(頒行)했다.
세조는 사회·경제적면에서 많은 치적을 남겼다.
즉 군현병합사목(郡縣倂合事目)을 만들어 토지와 인구의 비례에 의해 합리적으로 군현을 재조정함으로써 군현제를 정비했으며, 면리법(面里法)·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실시해 하부행정기구를 조직화했다. 또한 국가재정을 보충·확보하기 위해 각종 둔전(屯田)의 설치, 공해전(公廨田)의 국용전(國用田)으로의 편입, 과전법에서 직전법으로의 전환 등을 실시했다. 한편 재정지출의 일원화와 중앙집중제에 병행해 예산제도도 양입위출(量入爲出)에서 계출제입(計出制入)으로 바꾸었다.
특히 국가재정수입 확대의 일환으로 실시된 직전법(1466)은 과전(科田)의 지급을 현직관리에게만 국한시키는 법제로서 조선 초기부터 일관되게 추진되어 온 과전억제정책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아울러 직전법의 실시는 산관(散官)에 대한 군역부과 강화 등 일련의 특권억제정책과 관련해 그들의 경제적 기반을 약화시키는 것이었으며, 이는 곧 관료의 특권을 배제함으로써 관료제도의 합리적 운영을 도모하고 이를 통한 왕권 및 집권체제의 강화를 추구하는 것이었다.
세조의 중앙집권적 왕권강화는 군액(軍額)증강정책에 집중적으로 나타났다. 호적법·호패법·면리법·오가작통법 등의 호구 파악방법을 실시해 군액증강을 도모했으며, 종래의 3정1호(三丁一戶)로 하는 군호(軍戶)편성을 2정1보(二丁一保)로 하는 보법(保法)으로 바꾸고 교생들에게 교생낙강정군법(校生落講定軍法)을 적용하여 군역대상자를 대폭 늘렸다. 이러한 보법의 실시와 군역의 평준화로 군액은 약 2배 정도로 늘어났으며 이것을 기초로 해 기존의 국방체제인 오위체제(五衛體制)와 진관체제(鎭管體制)를 재정비했다.
이러한 사회·경제 정책과 함께 불교의 진흥과 출간사업에도 진력했다.
유교가 통치에 필요한 실천윤리라면 불교는 왕실의 안녕과 미래를 보장하는 종교적인 신앙으로서 필요했다. 세조는 불교가 가지고 있는 호국성에 근거한 국가·민족 의식의 고양을 통해 국방력과 집권체제의 강화를 도모하고자 원각사(圓覺寺)를 세우고 〈월인석보 月印釋譜〉를 간행했으며, 1461년에는 간경도감을 설치해 많은 불경을 국역하기도 했다. 한편 이 시기의 국가·민족 의식의 고양은 우리 역사를 총체적으로 체계화해 종합·정리하려는 통사 편찬사업으로도 나타났다.
즉 〈국조보감 國朝寶鑑〉의 편수, 〈동국통감 東國通鑑〉의 편찬, 〈경제육전 經濟六典〉의 정비 등의 일련의 편수·편찬 작업이 이루어졌다. 이밖에도 〈오륜록 五倫錄〉·〈역학계몽도해 易學啓蒙圖解〉·〈주역구결 周易口訣〉·〈대명률강해 大明律講解〉·〈금강경언해 金剛經諺解〉·〈동국지도 東國地圖〉·〈해동성씨록 海東姓氏錄〉 등의 편찬사업을 적극 추진했으며, 규형(窺衡)·인지의(印地儀)라고 불리는 토지측량 의상(儀象)을 스스로 제작하기도 해 15세기 천문학 발달에 크게 이바지했다.
묘호는 세조, 능호는 광릉(光陵)이며, 시호는 승천체도열문영무지덕융공성신명예흠숙인효대왕(承天體道烈文英武至德隆功聖神明睿欽肅仁孝大王)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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