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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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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유교이념을 구현하는 인격체 또는 신분계층을 가리킨다. 선비는 한자어의 '사'(士)와 같은 뜻이다. 우리말의 '선비'는 몽골어에 어원을 둔 '어질고 지식이 있는 사람'을 뜻한다는 설이 있다. 한자의 '사'는 '벼슬하다’로서 일정한 지식과 기능을 갖고 어떤 직분을 맡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하거나, '일하다·섬기다’로서 낮은 지위에서 일을 맡는 기능적 성격으로 보기도 한다. '사'는 주 나라의 봉건사회에서 하급관리에 속하는 계급이었으나, 춘추시대부터 '사'의 인격적 측면이 강조되었다. '사'는 신분적 의미에서 대부와 결합하여 '사대부'라 일컬어지며, 인격적 의미에서 군자와 결합시켜 '사군자'로 일컬어진다. 한편 '사'는 독서로 학문을 연마하여 관료가 될 수 있는 신분으로서, 농·공·상의 생산활동에 종사하는 서민들과 병칭되어 사민(사·농·공·상)의 첫머리에 놓인다. 삼국시대 초기에 유교문화가 수용되면서, 선비에 관한 자각과 이해가 발생한 것으로 보이며, 조선 건국 이후 유교이념을 통치원리로 삼으면서 선비는 유교이념의 실천적 담당자로 등장했다.

선비

ⓒ Kang Hui-eon/wikipedia | Public Domain

특히 유교이념을 구현하는 인격체 또는 신분계층을 가리킨다.

선비는 한자어의 '사'(士)와 같은 뜻이다.

우리말의 '선비'는 몽골어에 어원을 둔 '어질고 지식이 있는 사람'을 뜻한다는 설이 있다. 한자의 '사'는 '사'(仕 : 벼슬하다)로서 일정한 지식과 기능을 갖고 어떤 직분을 맡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하거나, '사'(事 : 일하다·섬기다)로서 낮은 지위에서 일을 맡는 기능적 성격으로 보기도 한다. '사'는 주대(周代)의 봉건사회에서 하급관리에 속하는 계급이었으나, 춘추시대부터 '사'의 인격적 측면이 강조되었다. '사'는 신분적 의미에서 대부와 결합하여 '사대부'(士大夫)라 일컬어지며, 인격적 의미에서 군자와 결합시켜 '사군자'(士君子)로 일컬어진다.

'유'(儒)도 선비와 같은 뜻으로 유교이념을 담당한 인격을 의미한다. 한편 '사'는 독서로 학문을 연마하여 관료가 될 수 있는 신분으로서, 농·공·상의 생산활동에 종사하는 서민들과 병칭되어 사민(四民 : 士·農·工·商)의 첫머리에 놓인다.

삼국시대 초기에 유교문화가 수용되면서, 선비에 관한 자각과 이해가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2세기 말엽 고구려의 을파소(乙巴素)는 재상으로 부름을 받자, "때를 만나지 못하면 숨어 살고 때를 만나면 나와서 벼슬하는 것이 선비의 떳떳한 일이다"라 하여 선비의 나가고 물러서는 도리를 제시하고 있다.

고구려의 태학(太學)을 비롯하여 삼국은 교육기관을 두어 인재를 가르치면서 선비를 배양하는 것을 제도적으로 확립했다. 고려 때에는 한층 더 교육제도와 과거제도가 정립되어 선비들이 관직에 나아갈 수 있는 길이 확보되었다. 고려 말엽 안향(安珦) 등에 의하여 원나라로부터 주자학(朱子學)이 도입된 뒤에 선비의 자각이 심화되었다. 조선 건국 이후 유교이념을 통치원리로 삼으면서 선비는 유교이념의 실천적 담당자로 등장했다.

조선초 사림파(士林派)는 도학이념을 철저히 수련하고 실천할 것을 주창했다. 이에 대해 훈구파(勳舊派)가 사림파를 과격한 이상주의자로 배척하여 억압하자, 사화(士禍)가 일어나 사림파의 선비들이 엄청난 희생을 치렀다.

그러나 선조 때를 전후하여 선비들이 정치와 문화의 중심세력으로 등장해 조선시대를 이끌어갔다. 한말에 이르면 도학이 다시 활기를 찾으면서 선비정신도 새로운 활력을 얻는다. 한말 위정척사파(衛正斥邪派)의 선비들은 당시에 전파되던 천주교를 이단으로 배척하고, 서양의 세력을 오랑캐로 거부하면서, 이질적 가치관을 배척하고 도학의 정통성과 민족의 문화적 우월성에 대한 신념을 확고하게 지켰다. 1876년 개항 이후 정부가 개화정책을 취하게 되자 한말 유학자들은 정부의 입장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유중교(柳重敎)는 "선비란 조정에서 아무 것도 받은 바가 없을지라도 그의 자리는 천위(天位)요, 그의 임무는 천직(天職)이다"라 하여, 천명에 따르는 선비의 지위와 직책을 내세워 군주의 세속적 권력을 넘어설 것을 주장했다. 따라서 그는 왕권에 지배되지 않는 선비의 지조와, 왕명이 부당할 때는 거부할 수 있는 선비의 천직을 강조했다. 일본의 침략에 저항해 의병을 일으켜 선비의 저항정신을 밝혔던 유인석(柳麟錫)은 국가존망의 위기에 선비의 대처방법으로, '의병을 일으켜 침략자를 쓸어내는 일'(擧義掃淸), '멀리 떠나서 옛 제도를 지키는 일'(去之守舊), '죽음으로써 지조를 온전히 하는 일'(到命遂志)의 3가지를 제시했다.

활동

조선시대 선비들의 생활은 매우 엄격한 규범을 지니고 있었다.

선비는 관직에 나가면 임금을 도와 정치를 담당하고, 물러나 산림에 은거하여도 도(道)를 강론하여 밝히고 실천하는 임무를 수행하며, 유교적 도덕규범을 실천하는 모범으로서 대중들을 교화하는 사회적 책임을 졌다. 선비는 평생 동안 학문을 중단하지 않으며, 그 학문의 성격은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도리를 체득하고 실천하여 인격적 성취를 목표로 한다. 선비들은 과거시험을 통해 벼슬에 나가면 위로는 임금을 섬기고 아래로 백성을 돌보아야 하는 책임을 진다. 선비는 학문으로써 닦은 신념으로 세상을 위해 봉사하려는 포부를 지닌 만큼, 관직을 통하여 자신의 학문과 신념을 펴고자 한다. 특히 선비들이 조정에서 담당하는 청환(淸宦)의 직책으로 어전강의를 담당하는 경연관, 임금의 잘못을 간언하는 언관(言官) 및 역사를 기록·편찬하는 사관 등을 들 수 있다. 선비와 임금의 관계는 의리로 맺어져 있기 때문에, 신하로서 무조건 복종하는 것은 아니며, 의리에 맞지 않으면 사직 상소를 올리고 떠남으로써 나아가고 물러서는(出處) 의리를 분명히 했다. 선비가 벼슬에 나아가기를 어려워하고 물러서기를 쉽게 여기는 것은 부귀의 욕망을 버리고 불의에 거부하는 비판정신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의 선비들은 의리를 밝히는 도학공부에 방해된다고 하여 과거시험을 외면하는 경향이 강했고, 처음부터 과거 공부를 멀리하고 도학공부에 전념하는 것을 선비의 고상한 태도로 여겼다. 선비는 벼슬에 나가지 않더라도 스승을 만나 학문과 도리를 연마하고 후진을 가르치며 벗들과 권면하는 데 힘썼다. 선비가 벼슬을 떠나 초야에서 학문을 연마하는 데 전념하는 경우를 산림이라 일컬으며, 이들을 대표하는 산림종장(山林宗匠)은 정치적 영향력도 컸다. 산림의 선비로서 학문이 높고 명망이 있으면 왕이 이들을 높은 관직으로 부르는 유일(遺逸)의 제도가 있다. 선비가 물러나면 한적하고 풍광이 아름다운 곳을 찾아 서실(書室)을 짓고 학문과 도리를 강론하는 데 자족한다. 특히 선비들은 서원(書院)·서당(書堂)을 중심으로 학문을 연마하고 그 지방의 선현(先賢)을 제향하며, 서로 모여 향음주례(鄕飮酒禮) 등 의례를 행했다. 이렇게 형성되는 사제관계의 학통은 결속력이 강한 공동체를 이루는데, 선비는 자신의 학문을 제자들에게 전하는 동시에 저술을 통해 후세에 가르침을 내려주는 임무를 지녔다. 즉 선비의 일생은 도를 밝히고 자신을 연마하여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 도를 실천하는 노력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선비정신의 구현

선비

ⓒ Tkv4~commonswiki/wikipedia | Public Domain

역사적으로 선비가 지향하는 핵심적 가치는 세속적 이익을 억제하고 인간의 성품에 뿌리한 '의리'(義)이다. 따라서 선비정신은 곧 의리정신으로 나타난다. 공자가 "군자는 의리에 밝고 소인은 이익에 밝다"고 한 언급에서도 의리와 이익의 대립적 분별의식(義利之辨)과 군자와 소인의 대립적 분별의식(君子小人之辨)을 확인할 수 있다.

고려말에서 조선초로 전환하는 왕조 교체기의 선비들 사이에는 고려 왕조를 위해 '절의'를 지킨다는 정몽주 등과 '혁명'의 당위성에 따라 새 왕조를 세워야 한다는 정도전(鄭道傳) 등의 상반된 입장이 충돌했다. 그러나 혁명기를 지나 세종 때에 들어오면 선비의 의리는 충절로 확인되었으며, 세조의 왕위찬탈에 절의를 지켰던 사육신이나 생육신 등은 선비의 의리정신을 실천한 모범으로 추존되었다. 절의보다 한층 더 큰 의리로서 '춘추대의'(春秋大義)는 '존화양이'(尊華攘夷 : 중화를 존숭하고 오랑캐를 물리칠 것)를 제기한다. 도학적 의리의 가장 큰 과제는 정통과 이단을 구별하여 이단을 배척하고, 중화와 오랑캐를 가려서 중화문화를 수호하도록 요구한다. 이러한 중화문화의 존숭은 사대주의라는 문제점을 지니고 있지만, '춘추대의'는 특히 외민족 침략자를 오랑캐로 항거하는 신념으로 나타났다. 임진왜란 때 선비들은 의병을 일으켜 항전했고, '의리'에 따라 죽는 순의(殉義) 정신을 발휘했다. 병자호란 때에도 마지막까지 오랑캐에 대한 화친과 항복을 거부하는 척화론(斥和論)이 의리정신으로 나타났다. 인조가 병자호란에서 항복하는 굴욕을 당하자 만주족의 청나라에 대한 '복수설치' 의식이 이 시대 선비들의 의리정신의 중심과제를 이루었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선비의 품격과 지조를 철저히 각성했다. 조광조(趙光祖)는 선비란 "자신을 돌보지 않고 오직 나라를 위하여 도모하며, 일을 당해서는 과감히 실행하고 환난을 헤아리지 않는다"라고 하고, 소인이란 "감히 저항하는 지조와 곧은 말로 원망과 노여움을 부르지 못하며, 머리를 숙여 아래 위를 살피고 이쪽 저쪽을 주선하여 자신을 보존하는 자"라고 하여 선비(군자)와 소인을 엄격하게 분별했다. 이황(李滉)은 "선비는 천자와 벗하여도 참람하지 않고, 왕이나 공경으로서 빈곤한 선비에게 몸을 굽히더라도 욕되지 않다"라고 하여, 절의 있고 당당한 선비의 고귀함을 강조했다.

이이는 "사림이 조정에 있어서 사업을 베풀면 나라가 다스려지나, 사림이 조정에 못 있고 공허한 말을 하면 나라가 어지러워진다"라고 하여, 선비가 국가를 바르게 다스리는 주체임을 강조했다.

선비에 대한 성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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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kv4~commonswiki/wikipedia | Public Domain

조선 후기에 선비가 정치를 담당하게 되자 그들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나 서로 대립하는 당쟁의 심각한 폐단을 낳았다. 조선시대의 선비문화는 중국문화에 젖어 민족문화의 자주성을 손상시켰으며, 서민문화를 더욱 천시하는 문제점을 낳았다. 선비문화의 규범체계는 사회의 도덕질서를 확보하는 기능을 했지만, 이 규범들이 선비의 계층적 권위를 강화하여, 양반과 상민의 차별을 더욱 심화시키면서 계층 사이의 분열을 확대하는 폐단을 일으켰다.

조선 후기의 새로운 학풍인 실학파(實學派)의 선비들은 도학전통의 폐단과 성리학의 관념성을 예리하게 비판했다. 정약용(丁若鏞)은 "선비는 어찌하여 손발을 움직이지도 않으면서 땅에서 생산되는 것을 삼키며 남의 힘으로 먹는가"라고 반문하며, 선비가 무위도식하는 유식계급(遊食階級)임을 비판함으로써, 노동의 신성성을 적극적으로 긍정했다. 박지원(朴趾源)은 농사를 밝히고 상품을 유통하게 하고 공장에게 은혜롭게 하는 것을 선비의 실학이라 지적하고, 그의 소설을 통하여 사대부의 기만성을 비판했다. 선비의 바른 기풍을 추구하는 것은 도학자들 사이에도 있었지만 선비의 허위적 면모를 성찰하고 진실한 모습을 추구하는 것은 실학의 중요한 과제이기도 했다. 개화파에 의해서 한말도학(위정척사론)이 폐쇄적 수구론(守舊論)으로 비판받으면서, 박은식 같은 애국계몽사상가는 '옛날 책만 연구하고 새 이치를 연구하지 않으며, 공허한 의리를 논하고 경제를 강구하지 않는' 고루한 유림가(儒林家)를 '개명한 시대의 큰 장애물'이라 비판했다. 일제강점기에 전통도학의 선비들은 한편으로는 혹독한 비판을 받았지만, 산간에 은둔하여 창씨개명(創氏改名) 등 일제의 끈질긴 동화정책을 전면적으로 거부함으로써 민족정기를 지켰다는 긍정적 의미를 인정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들의 강인한 지조는 존중될 수 있지만, 이미 새로운 시대에서 지도적 기능을 상실한 것이 사실이었다.

선비는 전통사회에서 그 사회의 지성인으로 인식되었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그 사회가 요구하는 이념적 지도자를 의미할 수 있다. 이러한 보편적 선비상은 세속적 욕구에 매몰되지 않고 더욱 높은 이상을 지향하는 가치의식을 지니며, 신념의 실천을 위해 꺾이지 않는 용기가 요구된다. 또한 자신의 과오를 반성할 줄 아는 성찰자세가 필요하며, 사회의 모든 계층을 통합하고 조화시키는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선비는 이제 더이상 신분적 존재가 아니라 인격의 모범이요 시대의 양심으로서 인간의 도덕성을 개인 내면에서나 사회질서 속에서 확립하는 인격체로 이해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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