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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387년경 플라톤은 철학과 과학의 교육·연구를 위한 기관으로 아카데메이아를 창설했다(→ 과학사). 아카데메이아는 좁은 의미의 철학에만 제한하지 않고, 수학이나 수사학과 같은 다양한 분야에 관해 광범위하게 탐구했다. 여기서 그는 제자들에게 풀어야 할 문제를 제시하고, 대중을 상대로 강연하면서 여생을 보냈다.
플라톤의 만년에 벌어진 사건은 시라쿠사의 정치에 관여한 것이었다. BC 367년 디오니시오스 1세가 죽자, 디온은 왕위를 계승한 디오니시오스 2세가 과학과 철학을 통해 입헌군주로서의 자질을 갖추게끔 플라톤을 초빙하려는 생각을 품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정치적 강자인 디온에 대한 왕의 시기심 때문에 무산되었다. 플라톤은 뒷날 시라쿠사에 머물면서(BC 361~360) 두 사람을 화해시키고자 했으나 실패했다. 디온은 BC 354년 살해당했으며, 플라톤은 BC 348(또는 347)년에 죽었다. "천한 사람들의 입으로는 찬사를 보내는 것조차 그를 모욕하는" 것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보고 하나만으로도 그의 고귀한 인품을 엿볼 수 있다.
원뿔곡선론에 관한 연구와 같은 BC 4세기의 중요한 수학적 작업들은 모두 아카데메이아에서 이루어졌다. 테아이테토스는 입체기하학을 창시했으며, 에우독소스는 비례론과 곡면체의 면적과 부피를 찾는 방법을 고안했다.
그는 플라톤 부재시에 아카데메이아의 교장 역할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플라톤의 친구인 아르키타스는 역학을 창안했다. 플라톤의 조카로서 자연사에 관한 많은 저서를 남긴 스페우시포스와 생물학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초기 저술들처럼 수학 이외의 분야에서도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특히 법학과 실제 법률의 제정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아카데메이아는 플라톤이 죽은 뒤에도 2세기 반 동안 지적 삶의 중심지로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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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아카데메이아와 시칠리아 – 다음백과,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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