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고르기아스〉는 수사술의 가치와 본성에 관한 탐구에서 시작한다.
삶을 지배하는 최고의 도덕성을 위해 필요한 것이 웅변술인지 아니면 논리적 능력인지의 논쟁으로 발전한 다음 올바른 혼의 소유자와 사악한 혼의 소유자가 갖는 영원한 운명을 그려 보이면서 끝을 맺는다. 고르기아스는 수사술이 '기술(techne)의 여왕'이라고 주장한다. 반면에 소크라테스는 기술이 아니라 청중들의 비위만 맞추는 한갓 '기교'일 뿐이라고 단언한다.
혼의 건강에 도움이 되는 기술로는 입법가의 기술과 재판관의 기술이 있다. 쾌락을 선의 기준으로 생각함으로써 소피스트는 입법가처럼, 웅변가는 재판관처럼 가장한다. 웅변가는 국가의 질병을 치료하는 의사가 아니라 아첨꾼일 뿐이다. 이 신랄한 비판에 대해 고르기아스를 지지하는 폴로스는, 성공한 웅변가는 실제로는 공동체의 독재자이며, 그런 사람만이 그가 좋아하는 모든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에 행복의 정점에 도달할 수 있다는 반론을 편다.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반론을 "부당함을 감수하는 일도 나쁘지만, 고통을 가하는 일은 더욱 나쁘다"라는 역설로써 거부한다.
만일 수사술이 실제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된다면, 범죄자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수사술을 이용해서 재판관의 마음을 돌리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극단적인 비도덕주의자인 칼리클레스가 이제까지의 주장을 모두 부정한다. 대중의 관습에서는 사람들을 해치는 것이 나쁜 일일지 모르나, '자연의 관습'에서는 힘센 자들이 그가 바라는 대로 힘을 사용하는 것은 정당하며 약한 자는 강한 자에게 굴복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제국주의적 민주주의를 만든 사람들이 참된 정치가, 즉 민주주의를 보살피는 의사가 아니라 그들의 입맛대로 민주주의를 요리하는 하인들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이들은 밑빠진 독에 물을 채우라는 영원한 벌을 받은 신화의 주인공들과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러나 행복한 삶은 욕구의 끊임없는 충족이 아니라, 정의와 절제로 조절된 욕구의 적정한 만족에 있는 것이다(정치권력).
〈메논 Menon〉에서는 훌륭함이란 무엇이며, 그것은 가르쳐질 수 있는 것인가의 문제에 대해서 고찰하고 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그의 탐구의 주제에 관해 무지하다면, 그가 그것을 발견했다 하더라도 알아볼 수 없을 것이며, 반면에 그것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이라면,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알려고 하는 것이므로 탐구 자체가 쓸데없는 일이 된다"라는 메논의 역설은 훌륭함에 관한 탐구의 가능성마저 위협한다.
그러나 만일 혼이 사멸하지 않는 것이며, 오래 전에 진리를 모두 배웠기 때문에 이제 진리들을 다시 기억해내는 일만 필요하다면, 메논의 역설로 인한 어려움은 사라질 것이다.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 소크라테스는 기하학을 배운 적이 없는 노예 소년이 수학적 진리들을 인식하기에 이르는 과정을 보여준다.
노예 소년은 '그 자신으로부터' 정답을 이끌어낸다. 결국 지식은 '상기'(想起 anamnesis)이다(회상이론). 그런 다음 소크라테스는 훌륭함이 지식(episteme)이라고 주장하고, 그것이 가르칠 수 있는 것임을 추론한다. 그러나 아니토스가 등장해서 "훌륭함을 가르치는 전문가라고 자칭한 소피스트들은 공동체를 해치는 사기꾼이며, 아무리 '훌륭한 사람'도 그 훌륭함을 자기 자식에게 가르칠 수는 없었다"라고 주장한다.
〈메논〉은 지식과 참된 믿음(alethes doxa)을 구별하고, 훌륭함은 교육에 의해서가 아니라 신의 선물로 이루어지는 것임을 암시하면서 끝난다.
〈프로타고라스〉에서는 유명한 소피스트인 프로타고라스가 등장하여 자신의 직업이 '훌륭함을 가르치는 일', 즉 개인의 삶과 국가를 성공으로 이끄는 기술을 가르친다고 말한다. 반면에 소크라테스는 사는 것을 가르칠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이어서 일상적으로 알고 있는 여러 가지 훌륭함들은 실제로 서로 다른 것들인가 아니면 그 모두가 하나의 동일한 것인가 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프로타고라스는 훌륭함은 지혜와 동일시할 수 있지만 용기의 경우만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용기있는 자의 훌륭함이란 고통과 위험에 직면해서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사실에 있으며, 따라서 모든 훌륭함이 쾌락과 고통의 신중한 헤아림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다.
여기에 "아무도 나쁜 행위를 원해서 하지는 않는다"라는 소크라테스의 2번째 '역설'이 있다. 즉 나쁜 행위는 잘못 헤아린 결과이다. 소크라테스가 쾌락주의를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이 대화편의 방법적(독자들을 궁지로 몰아넣는) 특징 때문이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서양철학과 같은 주제의 항목을 볼 수 있습니다.
백과사전 본문 인쇄하기 레이어
[Daum백과] 윤리적·정치적인 대화편 – 다음백과, Daum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