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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로 돌아온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가 유언을 통해 그를 양자이자 제1상속자로 삼았다는 말을 들었다.
의붓아버지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말렸음에도 그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이 유언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하고 당장 로마로 향했다. 이때 그는 불과 18세였다. 카이사르의 수석 보좌관으로서 카이사르의 문서와 재산을 관리하고 있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자신이 카이사르의 제1상속자가 되리라는 기대가 빗나가자 카이사르의 재산을 옥타비아누스에게 한 푼도 넘겨줄 수 없다고 버티었다.
그리고 죽은 독재자가 로마 시민에게 빚진 유산도 옥타비아누스가 재주껏 갚아야 한다고 강요했다. 카이사르를 암살한 브루투스와 카시우스 롱기누스는 옥타비아누스를 무시하고 동부지역으로 떠났다. 로마의 주요 원로정치가인 유명한 웅변가 키케로는 옥타비아누스를 이용하고 싶어했지만 그의 능력을 과소평가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가 로마 시민의 환심을 사기 위해 마련했던 대중오락을 찬양함으로써 카이사르 군대의 충성을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원로원은 키케로의 권유에 따라 안토니우스와 결별하고 옥타비아누스에게 원조를 요청했으며(또한 원로원은 젊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원로원 의원 자리를 주었음), 무티나(모데나) 전투에서 옥타비아누스와 힘을 합해 안토니우스를 갈리아 지방으로 몰아냈다.
원로원 군대를 지휘한 콘술들이 목숨을 잃자 옥타비아누스의 군대는 공석이 된 콘술 자리 가운데 하나를 옥타비아누스에게 주도록 원로원 의원들을 강요했다. 이어서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양자로 정식 승인을 받고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를 비롯해 카이사르 뒤를 이어 대신관이 된 레피두스와 곧 협정을 맺었다.
BC 43년 11월 27일, 세 사람은 나라를 재건하기 위해 5년 임기의 3인 집정관으로서 독재관으로 정식 임명되었다(제2차 삼두정, 제1차 삼두정은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 및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맺은 비공식 협정을 말함). 로마의 동부지역은 브루투스와 카시우스 롱기누스가 점령하고 있어서 세 집정관은 서부지역을 셋으로 나누었다.
그들은 '처벌해야 할' 정적의 명단을 만들고, 안토니우스의 적인 키케로를 포함한 300명의 원로원 의원과 그보다 한 계급 아래인 2,000명의 기사들을 처형했다. BC 42년 1월에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로마 제국의 신으로 인정받자 신의 아들로서 옥타비아누스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그와 안토니우스는 아드리아 해를 건너 동부로 진격했고, 안토니우스가 지휘하는 군대(옥타비아누스는 당시 병중이었음)는 2차례의 필리피 전투에서 브루투스와 카시우스 롱기누스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싸움에 패한 브루투스와 카시우스 롱기누스는 둘 다 자살했다.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안토니우스에게 동부(갈리아 지방 포함)를 배당하고 옥타비아누스는 이탈리아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의 군대에서 제대한 군인들이 정착문제를 둘러싸고 말썽을 부리자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의 형제와 아내를 상대로 페루시아(지금의 페루자) 전쟁을 벌여 승리를 거두었다.
시칠리아 섬과 해상 통로를 장악한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대폼페이우스의 아들)는 또하나의 잠재적인 적이었다. 옥타비아누스는 그를 회유하기 위해 그의 친척인 스크리보니아와 결혼했다(그러나 얼마 후 성격 차이로 이혼했음). 페루시아 전쟁 이후 섹스투스는 옥타비아누스와 인척이 된 뒤에도 안토니우스에 대한 접근을 단념하지 않았지만 안토니우스는 그의 제의를 거절하고 브룬디시움 조약에서 옥타비아누스와 새로운 합의에 도달했다.
이 조약에 따라 옥타비아누스는 레피두스가 보유하고 있던 아프리카를 제외한 서부 전체와 이탈리아를 차지하게 되었다. 동부는 다시 안토니우스에게 돌아갔고, 겨울을 이집트에서 클레오파트라 여왕과 함께 보낸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의 누이인 옥타비아와 결혼하기로 결정되었다. 로마 제국 사람들은 이 조약이 오랫동안 계속된 내전의 종식을 약속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모두 기뻐했다. BC 38년에 옥타비아누스는 리비아 드루실라와 결혼함으로써 귀족계급과 중요하고 새로운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 화해하는 데 실패한 옥타비아누스는 곧이어 섹스투스와 일련의 전투에 빠져들고 말았다.
섹스투스의 근거지인 시칠리아 섬에 대한 최초의 공격이 참패로 끝나자 옥타비아누스는 BC 37년에 타렌툼(타란토)에서 안토니우스와 새로운 협정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타렌툼 조약).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에게 전함을 제공하고 그 대가로 옥타비아누스는 로마 제국의 동부와 국경이 맞닿아 있는 파르티아 및 그 동맹국인 메디아와 전쟁이 일어나면 필요한 육군을 지원하기로 했다.
그러나 안토니우스는 전함을 보내주었지만 옥타비아누스는 끝내 병력을 보내주지 않았다. 이 조약은 또한 BC 33년말까지 5년 동안 제2차 삼두정치를 연장한다고 규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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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아우구스투스의 집권 – 다음백과,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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