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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35경, 히스파니아타라코넨시스 칼라구리스나시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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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96(?), 로마 |
국적 | 로마 |
요약
수사학에 관한 책 <웅변교수론>(12권)은 교육이론과 문학평론에 중대한 공헌을 했다.
로마에서 당시의 훌륭한 수사학자인 도미티우스 아페르의 지도를 받았으며 그 후로 한동안 법정에서 변론가로 활동했다. 대표작인 <웅변교수론>은 그가 죽은 지 얼마 안 되어 발간되었다. 그는 유아기 이후의 전체 교육과정이 웅변가 훈련의 주된 내용과 연관된다고 믿었다. 1권과 2권은 교육원리에 대한 전반적인 견해를 담고 있고, 인간 본성에 대한 훌륭한 감각과 통찰력을 제시한 것으로 유명하다. 3~11권은 기본적으로 구상, 각색, 문체, 기억, 전달 등 수사학의 전통적인 5개의 '영역'에 관심을 두었다. 그 중 10권은 유명하고 높은 평가를 받은 개론으로서 젊은 웅변가들의 학습서로 추천되었다. 12권은 훈련을 완전히 받은 후 활동 중인 이상적인 웅변가를 다뤘다.
그가 쓴 수사학에 관한 책 〈웅변교수론 Institutio oratoria〉(12권)은 교육이론과 문학평론에 중대한 공헌을 했다.
퀸틸리아누스는 스페인 북부지방에서 태어났지만, 로마에서 교육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나중에 그곳에서 당시의 훌륭한 수사학자인 도미티우스 아페르의 지도를 받았으며 그후로 한동안 법정에서 변론가로 활동했다. 57년 이후에 고향인 스페인으로 떠났으나, 68년에 로마로 돌아와 수사학을 가르치기 시작했으며, 동시에 법정에서 변론가로도 활동했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치하(69~79)에서 라틴어 수사학을 가르치는 대가로 최초로 국가로부터 봉급을 받았으며, 티투스 황제와 도미티아누스 황제 치하에서는 로마에서 지도적인 교사로서의 직위를 갖게 되었다.
88년에 이 자리에서 물러난 것 같다. 도미티아누스 통치(81~96) 말엽에 황제의 두 상속자(그의 손자들)의 교육을 위임받았으며, 그 소년들의 아버지인 플라비우스의 호의로 집정관(ornamenta consularia)이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다. 아마도 그는 도미티아누스가 암살된 직후에 죽은 것 같은데, 이때 젊은 아내와 두 아들을 남겼다.
퀸틸리아누스의 대표작인 〈웅변교수론〉은 그가 죽은 지 얼마 안 되어 발간되었다.
그는 유아기 이후의 전체 교육과정이 웅변가 훈련의 주된 내용과 연관된다고 믿었다. 1권에서는 수사학교육에 들어가기 전의 단계를 다루고 있고, 2권에서는 수사학교육 단계를 기술하고 있다. 이 첫 2권은 교육원리에 대한 전반적인 견해를 담고 있고, 인간 본성에 대한 훌륭한 감각과 통찰력을 제시한 것으로 유명하다. 3~11권은 기본적으로 구상·각색·문체·기억·전달 등 수사학의 전통적인 5개의 '영역'에 관심을 두었다.
또한 수사학의 본질·가치·기원·기능을 다루었으며, 특히 법적 절차에 사용되는 법정 변론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면서 다양한 변론의 유형도 제시했다. 또한 구상에 대해 논의하는 부분에서는 웃음을 유발하는 기술에 관한 장을 포함하여 이어 내려오는 형식적인 변론형식을 다루었다. 그중 10권은 유명하고 높은 평가를 받은 개론으로서 그리스와 고대 로마 작가를 다룬 내용이 들어 있고, 이것은 젊은 웅변가들의 학습서로 추천되었다.
퀸틸리아누스는 종종 다른 작가의 평가에 일반적으로 동의하지만, 특히 고대 로마의 작가에 대해 논의할 때는 독자적인 견해를 제시한다. 12권은 훈련을 완전히 받은 후 활동중인 이상적인 웅변가에 대해 다루고 있다. 예를 들면 법정에서 변론할 때 지켜야 할 규칙, 웅변가가 갖추어야 할 성격, 웅변 스타일, 은퇴해야 할 때 등이 있다. 〈웅변교수론〉은 교사로서의 풍부한 경험의 산물이었다.
그는 자신의 목적은 수사학에 관한 새로운 이론을 만들어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것들 중에서 타당한 것을 판단하는 데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을 아주 철저하고 분별력 있게 해냈는데, 이때 터무니없다고 생각되는 것은 배제하고, 실제 경험과 올바른 판단이 없는 이론적 지식은 거의 쓸모가 없다는 것을 인식했다.
더욱이 〈웅변교수론〉은 학생들의 심성을 계발하는 것뿐만 아니라, 인품을 형성하는 데 역점을 두었기 때문에 도덕성의 교육 측면에서도 뛰어나다.
그의 주된 생각은 훌륭한 웅변가란 우선 훌륭한 시민이어야 한다는 것과, 웅변은 공익에 부합해야 하고 이로 인해 덕스러운 실제 생활과 접목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동시에 전문적이고 실력있는 대중 웅변가가 양성되기를 바랐다. 그는 법정에서 경험한 것들 덕분에 다른 교사들에게는 부족한 실제적인 안목을 얻을 수 있었다. 실제로 그는 피상적으로 문체상의 재주만을 강조하는 당시의 교수법에서 많은 문제점을 발견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는 1세기초의 작가이자 정치가인 소(小)세네카의 영향력이 퍼져 있음을 한탄했다. 그는 문체상의 기교가 즉각적인 효과를 나타낸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법률상의 공적 변론이라는 현실에서는 결국 웅변가에게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타락한 문체'라고 부른 것들을 공격하면서, 그는 키케로(BC 106~43)가 주장한 엄격한 표준형식과 옛 전통들로 되돌아갈 것을 주창했다. 그는 키케로를 높이 평가했지만, 학생들에게 키케로의 문체를 예속적으로 모방하지는 말라고 가르쳤다.
이것은 당시의 요구가 키케로 시절과는 아주 다르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퀸틸리아누스는 국가와 도시의 정책에 좋은 영향을 끼쳐왔던 옛 웅변정치가에 대해 가졌던 이상이 로마 정부의 구(舊)공화정치의 폐지와 함께 더이상 타당성을 갖지 못한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웅변가의 미래가 밝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퀸틸리아누스의 것이라고 판단되는 2개의 웅변술 모음집이 지금도 남아 있다.
〈대변론집 Declamationes majores〉은 대체로 가짜인 것으로 판단되었고, 〈소변론집 Declamationes minores〉은 학생 중 한 사람이 퀸틸리아누스가 강의한 것을 기록한 판본일 가능성이 있다. 〈웅변교수론〉이라는 교재는 피렌체 사람인 포조 브라치올리니에 의해서 재발견되었다. 그는 1416년에 외교 업무로 스위스의 생갈 성당을 방문했다가 그곳에서 우연히 낡았지만 완전한 사본을 발견했다. 이 사본에서 도덕성·지성 훈련을 모두 강조한 경향은 15, 16세기 인문주의자들의 교육사상에 큰 영향을 끼쳤다.
비록 이것이 미친 직접적인 영향력은 17세기 후에 고전을 존중하는 경향이 일반적으로 쇠퇴하면서 사라졌지만, 학생들에게 자신의 생을 준비시키는 전인적 인품을 추구하는 현대의 교육관은 이와 같은 1세기 로마인들의 이론과 일맥상통하는 데가 있다. 퀸틸리아누스는 교사들이 학생들의 성격이나 능력에 따라 다른 교수법을 사용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그는 젊은이들이 학습을 즐기며 놀이와 오락의 가치를 알고 있다고 믿었다.
지나치게 엄격한 수업으로 학생들의 기를 꺾을 위험성에 대해서도 경고했다. 체벌을 설득력 있게 비판했으며 교사를 부모를 대신하는 사람으로 묘사했다. 그는 "학생들은 올바르게 교육받기만 하면 교사에게 애정과 존경심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얼마나 기꺼이 모방하는지를 말할 수도 없을 정도입니다"라고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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