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유학
고려말에 보급된 성리학은 조선 건국 후에 정치·사회·문화·외교 전반을 지배하는 기본이념이 되었다.
조선은 성균관과 교육제도를 정비하고, 집현전·홍문관 등을 통해 유교 원리에 입각한 문물제도와 문화의 정비를 시행했다. 조선 초기 중앙의 정치세력들은 관학파를 형성했는데, 경세(經世)와 사장(詞章)을 중시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러나 15세기말부터 경학 연구에 치중하고 국가와 정치 운영에서도 도학(道學)의 구현을 중시하는 사림파가 대두했다. 이들은 성종에서 중종연간에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훈구파와 대립했으나 거듭되는 사화로 큰 타격을 입었다.
이후 이들은 지방에서 서원건립을 주도하면서 학문연구에 주력했다. 그결과 16세기 이후에는 성리학의 기본개념에 대한 철학적 연구가 크게 발전했다. 당시의 철학적 흐름은 주리파와 주기파로 나뉘었다. 주리파는 이황에 의해 집대성된 것으로, 도산서원을 중심으로 영남지방에 보급되어 영남학파를 형성했다.
주기파는 서경덕·이이·송시열로 계승되며 기호학파를 형성했다. 17세기 이후 전통적인 사회체제가 동요하자 사회안정을 위한 성리학의 실천적 규범으로서 예학 연구가 크게 발달하여 이기론과 함께 조선시대 성리학의 독특한 체계를 이루었다. 그러나 주자(朱子)를 절대화하고 그외의 학설은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규정하여 탄압하는 폐단이 발생했다. 16세기에는 명나라로부터 양명학이 소개되었는데, 양명학자로는 정제두·이건창을 중심으로 한 강화학파가 있다.
그러나 양명학은 이단으로 밀려 널리 연구되지는 못했다.
한편 17세기 이후 신분제가 해체되면서 상공업이 발달하고, 지주제의 발달에 의한 농민분해가 급속히 진행되었다. 이같은 변화에 대응하여 성리학의 한계를 비판하고 합리적·현실적·실천적인 학문을 탐구하는 새로운 학풍이 발생했는데, 이를 실학이라고 한다.
실학은 학술·문화·예술 전반에 걸쳐 매우 다양하게 나타났다. 경학에서는 고증학적 방법에 의한 고문(古文) 연구와 경전·유교개념의 재해석이 이루어졌으며, 지리·군사·의학·자연과학·농학 등에서 새로운 방법론과 업적이 속출했다. 이중 일련의 지식인들은 전통사회의 모순과 한계를 비판하고, 토지제도와 신분제를 비롯하여 국가체제 전반을 개혁함으로써 사회발전과 부국강병을 이룩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이들은 경향에 따라 유형원·이익·정약용을 중심으로 하는 경세치용학파와, 유수원·박제가·박지원 등에 의해 주도된 이용후생학파로 분류된다.
전자는 농업과 국가·사회 개혁에, 후자는 상업발달과 기술개발에 관심을 보이는 특징이 있다.
불교
조선은 배불정책에 따라 교단을 선교양종으로 통합했으며, 상당수의 사찰을 혁파하고 토지와 노비를 국가에 환수했다.
이로써 많은 사찰들이 사라졌다. 또 국가가 주최하던 불교행사와 승직(僧職)을 폐지하고 도첩제를 실시하여 민간인의 출가를 제한했으며, 사대부들이 불교식으로 장례나 제사를 지내는 것을 금지했다. 그러나 왕이나 왕실에서는 불교를 신봉하는 경우가 간간이 있었으며, 양반층 부녀자들이 불교를 믿는 경우가 많았다. 또 유학자들도 개별적으로 승려들과 친분을 맺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조선 중기 이후에는 도첩제 실시에도 불구하고 많은 농민이 국역부담을 피해 승려가 되었는데, 이것은 임진왜란 때 승병들이 활약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 이후 남한산성 축조 등 승군들이 국방에 끼친 영향은 매우 컸다. 교세도 서산대사의 계열이 우세해져 조계종(曹溪宗)이 지배적이었다. 사찰의 경제력과 문화활동도 고려시대에 비해 크게 위축되었으나, 지방특산물의 공납과 건축업·제지업·인쇄업 등에서는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도교
조선시대에는 도교 역시 많이 위축되었는데, 태종 때에는 각종 도참서들이 소실되었으며 도교식 국가제사들이 축소되었다.
16세기에는 마침내 사림의 맹렬한 반대로 소격서마저 혁파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도교는 다른 종교나 민간신앙과 결합하여 존속되었으며, 임진왜란 이후에는 성리학에 대한 반발로 일부 지식인층에서 도교적인 사고방식이 나타나기도 했다. 또 일부 도인들은 단군과 김시습을 내세우며 독자적인 계보를 형성했고, 민간에서는 〈정감록〉·〈토정비결〉 등이 크게 유행했다.
무속·민간신앙
조선은 기우제·성황·산천제사 같은 전통적인 제사의 일부를 국가의 사전(祀典) 체제에 흡수하여 유지했으며, 단군신앙도 국가에서 수용하여 삼성사(三聖祠)·기자묘 등을 주관하게 했다.
그러나 이외의 민간의식은 음사(淫祀)로 규정하여 유교의례로 대체했다. 중기 이후에는 서원건립과 관련하여 향촌의 각종 사당의 배향인물도 선현이나 지역출신 명사들로 대체되었다. 초기에는 국가에서 국무당(國巫堂)을 두기도 했으나, 뒤에는 무속을 배척하여 무당을 도성에서 추방하는 정책을 펴나갔다. 그러나 민간에서는 질병치료와 관련하여 무속이 꾸준히 유지되었으며, 최영·임경업 등 실존인물들이 신격화되기도 했다.
천주교
17세기 이후 청나라를 통해 천주교가 전래되었는데, 상인 등을 통해 민간에도 조금씩 유포되었다.
18세기에는 남인 학자들을 중심으로 양반 지식인 사회에도 전파되었다. 이후 교세를 확장하여 선교사와 교회조직 없이도 자생적으로 성장하는 특이한 발전을 보였다. 그러나 유교적 제사의 부정과 평등의식은 마찰을 일으켜 마침내 정부는 천주교를 사교(邪敎)로 규정하고 탄압했으나 교세는 계속 확장되어 1821년에는 조선교구가 설립되기에 이르렀다.
동학
1860년 최제우는 경주에서 유·불·선의 교리와 민간신앙을 결합하여 동학을 창시했다.
동학이란 서학에 대항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동학은 정부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폭정과 사회혼란, 개항 이후 외세의 침입 속에서 고통받던 민중들 사이에 급속도로 유포되었다. 마침내 동학은 교조신원운동과 합법화 시위를 전개하기에 이르렀는데, 전봉준 등은 동학의 조직으로 농민의 힘을 결집하여 사회운동으로 발전시켰으며 1894년에는 동학농민혁명을 일으켰다. 이후 동학은 손병희에 의해 교리가 정비되고 천도교로 개칭하여 계속되었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조선과 같은 주제의 항목을 볼 수 있습니다.
백과사전 본문 인쇄하기 레이어
[Daum백과] 조선의 사상과 종교 – 다음백과, Daum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