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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학

다른 표기 언어 西學

요약 조선에서 천주교는 서양학문으로 이해되어 서학이라 했다.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전래된 것은 16세기말~17세기초였다. 처음에는 학문적 관심의 대상이었으나 18세기 후반 일부 남인학자들이 천주교를 신앙으로 받아들였고, 천주교의 평등사상과 내세사상은 서민층에게도 호응을 얻었다. 천주교는 1785년 사교로 규정되어 금령이 내려졌다. 순조의 즉위 후 노론벽파는 반대파를 제거할 명목으로 1801년 사교·사학에 대한 금압을 명하고 수많은 신자를 처형하는 신유사옥을 일으켰다. 이어 1839년에도 기해사옥이 발생했다. 그러나 교세가 더욱 확장되자, 대원군은 1866년 대대적인 탄압을 통해 9명의 프랑스 신부와 수천 명의 신도를 처형하는 병인사옥을 일으켰다. 서학은 실학과 함께 봉건사회 해체기에 개혁사조의 하나였다.

좁은 의미로는 천주교만을 뜻하기도 하는데, 조선에서 천주교는 종교로서보다도 서양학문의 하나로 이해되어 서학이라고 불렸다.

서양의 학문과 종교가 중국에 전해진 것은 16세기경부터이며, 임진왜란 때 일본에 있던 선교사가 왜군을 따라 조선에 일시 들어온 일이 있었지만 서양의 천문학·지리학과 함께 천주교가 본격적으로 전래된 것은 16세기말부터 17세기초에 걸쳐 명과 청에 사신으로 드나들던 조선인 학자들을 통해서였다. 1603년(선조 36)에 마테오 리치가 만든 서양식 세계지도가 들어왔으며, 그후 1631년(인조 9)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정두원(鄭斗源)이 선교사로부터 천리경·자명종·홍이포(紅夷砲) 등과 함께 세계지도·천문도·서양소개서 등을 얻어왔다.

또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가 1644년 귀국한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중국에서 과학기술활동을 크게 벌였던 아담 샬과 친분을 맺고 서양문물을 가지고 귀국한 일도 있다. 조선에 소개된 서양의 문물은 당시 새로운 학문·사상을 정립하기 위해 노력하던 실학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유교적인 천문학·지리학과는 세계관을 달리하는 서양의 학문이 실학자들에게 새로운 자극이 되었다. 천주교의 경우에는 1610년(광해군 2)에 명에 사신으로 갔던 허균(許筠)이 천주교의 기도문인 게(偈) 12장을 얻어왔으며, 역시 광해군 때의 이수광(李晬光)은 〈지봉유설 芝峰類說〉에서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 天主實義〉의 내용을 요약하여 소개했고, 유몽인(柳夢寅)도 〈어우야담 於宇野談〉에서 천주교 교리를 더욱 자세히 설명하고 유교·불교·도교와의 차이점을 논했다.

처음에는 천주교 역시 학문적 관심의 대상에 불과했으며, 그에 대한 비판도 신후담(愼後聃)의 〈서학변 西學辯〉에서와 같이 유교의 입장에서 천주교의 사상적 오류를 지적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이벽(李蘗)·이가환(李家煥)·이승훈(李承勳)·정약전(丁若銓)·정약종(丁若鍾)·정약용(丁若鏞)·권일신(權日身)·권철신(權哲身) 등 일부 남인학자들이 천주교를 신앙의 대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특히 이승훈은 1783년(정조 7) 베이징[北京]에서 세례를 받고 귀국하여 조선에서 천주교가 종교로 정착하는 데 기여했다. 이들의 천주교 신앙은 선진(先秦) 유교에 제시된 이상적인 유교국가건설을 위한 개혁이념과도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었으며, 천주교의 평등사상과 내세사상은 서민층에게도 쉽게 호응을 얻어 신자가 늘어갔으나 그 신앙이 유교국가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효의 상징인 제사의식을 무시하는 경향을 보임으로써 커다란 사회문제를 일으켰다.

마침내 1785년(정조 9)에는 사교(邪敎)로 규정하여 금령을 내리고 베이징으로부터의 천주교 관계 서적수입을 금지했으며, 1791년(정조 15)에는 어머니 제사에 신주를 없앤 윤지충(尹持忠)을 사형에 처했다.

그러나 정조 일대에는 천주교에 대하여 비교적 관대한 정책을 써서 큰 탄압은 없었다. 정조가 죽고 순조가 즉위하자 당시 집권세력인 노론벽파(老論僻派)는 자신들의 정치적 반대파를 제거하는 명목으로 천주교 신앙을 문제삼았다. 이에 1801년(순조 1) 사교·사학에 대한 철저한 금압을 명하고 수많은 신자를 처형했는데, 이를 신유사옥(辛酉邪獄)이라 부른다. 1839년(헌종 5)에도 프랑스인 신부 3명과 수십 명의 신도를 처형한 탄압조치가 있었는데, 이를 기해사옥(己亥邪獄)이라 한다.

그러나 정부의 거듭된 탄압에도 불구하고 이미 1821년(순조 21)에 조선교구가 북경교구로부터 독립하고, 서양인 신부들이 계속 들어와서 포교활동을 했으며, 조선인으로는 최초로 신부가 된 김대건(金大建)이 귀국하여 포교활동에 나서는 등의 노력으로 천주교의 교세는 더욱 확장되어 철종조에 이르면 신도수가 3만 여 명에 이르렀다.

이와 같이 19세기에는 천주교의 교세가 확장되어가는 한편, 조선 해안에는 서양 선박들이 나타나 통상을 강요하는 일이 많아지면서 정부와 일반 국민들 사이에 천주교와 외세의 결탁을 우려했으며, 그 우려는 1860년(철종 11) 영국-프랑스 연합군에 의해 베이징이 함락되면서 사실로 확인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강력한 쇄국정책을 추진하던 대원군은 1866년(고종 3)에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시작하여 9명의 프랑스 신부를 비롯하여 수천 명의 신도를 처형했다.

이를 병인사옥(丙寅邪獄)이라 한다. 서학은 조선 후기에 반주자학적인 세계관을 보급하는 데 기여했고, 실학과 함께 봉건사회 해체기에 새로운 사회를 수립하기 위한 개혁사조의 하나로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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