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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1860년 최제우에 의해 창도된 한국 근대의 신종교.
19세기 후반 서양 세력의 침투와 조선 사회의 내재적 위기 속에서 보국안민·광제창생을 내세우면서 등장했다. 당시의 유교는 성리학적 명분주의에 빠져 변화하는 사회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했고 불교 역시 조선시대 500여 년 간 정책적으로 탄압받아왔으므로 새로운 사회를 주도할 자체의 역량이 부족했다. 또한 서양의 천주교가 서학이라는 이름으로 조선사회에 들어와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이러한 서학의 침투에 대항하는 한편, 새로운 이상세계의 건설을 목표로 하여 등장한 것이 동학이었다.
창도 및 전개과정
몰락양반의 후예이자 서자였던 최제우는 당시 사회에서 입신출세할 수 없었다.
그러한 자신의 상황을 한탄하면서 40세가 될 때까지 여러 곳을 돌아다니다가 1860년 4월 5일 전통적인 무속에서의 신병체험과 유사한 일종의 강신체험(降神體驗)을 했다. 이 체험을 통해 한울님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었고 이 한울님을 마음에 성심껏 모시는 것이 바로 도를 깨우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한울님으로부터 받은 도를 일반 백성들에게 전파하기 위해 자신이 깨달은 도를 논리적으로 정립하는 일에 착수했다. 그래서 한문으로 되어 나온 것이 〈동경대전 東經大全〉이고 일반 대중들을 위해 한글 가사체로 쓴 것이 〈용담유사 龍潭遺詞〉이다.
이 과정에서 동학교도들은 점차 늘어나 교도들을 조직하고 관리할 필요성이 대두되어 각 지역의 동학교도들을 통솔할 책임자로 '접주'(接主)들을 임명했는데 그 지역을 '접소'(接所)라고 명했다.
동학 세력이 확대되자 조선 정부는 동학을 위험한 세력으로 간주해 최제우를 혹세무민의 죄로 처형했다. 그러나 동학 세력은 약화되지 않았다. 오히려 교조의 억울한 죽음을 풀어보려는 신원(伸寃)운동이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마침내 최제우에 의해 도통(道統)을 이어받은 제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을 비롯한 많은 동학교도들은 1890년대에 본격적인 교조신원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주장은 교조 최제우는 결코 서학의 모리배가 아니었으며 그가 펼친 동학은 서학과는 완전히 다른 것으로 동학교도의 정당한 종교활동을 보장해달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조선 정부는 매우 미온적인 반응을 보일 뿐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부의 소극적인 반응에 대해 동학교도들은 의견이 2가지로 갈라졌다.
남접을 중심으로 한 동학교도들은 동학을 합법화시키기 위해서는 부패한 봉건정부를 폭력적으로 타도하는 수밖에 없다고 하는 강경론을, 최시형을 중심으로 한 북접 세력은 현단계에서 동학이 해야 할 일은 정부당국에 대한 직접적 공격보다는 지속적인 교세확장으로 힘을 키워야 한다는 온건론을 주장했다. 그리하여 두 파 사이에는 단순한 의견대립을 넘어 상대방에 대한 비방과 비난이 행해지기도 했다.
삼정(三政)의 문란으로 대표되는 조선 말기의 사회적 부패와 억압적 상황은 혁명적 상황을 예고하고 있었다.
마침내 1894년 전라남도 고부에서 일어난 농민봉기가 기점이 되어 전국적인 농민항쟁이 일어났다(동학농민혁명). 이 전쟁에서 동학교문(東學敎門)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즉 남접이 주장하던 봉건정부의 타도를 통한 동학교문의 합법화와 사회개혁의 논리가 이 농민항쟁의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당시 북접 세력은 전쟁의 초기 단계에는 가담하지 않았으나 동학교도에 대한 정부의 무차별한 공격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전쟁의 전반부에서는 동학교도를 중심으로 한 농민군측이 파죽지세로 정부군을 공격해 나아갔으나 후반부에 이르러 청과 일본의 지원을 받은 정부군에 대패했다. 전쟁에 참패한 동학교도들은 그후 지하에서 동학교단의 재건을 추진해 나아갔다. 전쟁에서 잔존한 북접 접주들을 중심으로 한 동학교단은 1900년 손병희(孫秉熙)를 제3대 교주로 내세워 천도교라는 합법적 교단으로 등장했다.
그러나 손병희를 중심으로 한 천도교가 과연 과거의 동학을 진정으로 계승한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 벌어져 천도교에 반대해 별도의 교단이 생겨나기도 했다.
교리
동학의 교리는 3단계의 발전과정을 겪었다. 교조인 최제우 단계에서는 '시천주'(侍天主) 사상, 2대 교주인 최시형 단계에서는 '사인여천'(事人如天) 사상, 그리고 3대 교주인 손병희에 의해 개창된 천도교 단계에서는 '인내천'(人乃天) 사상으로 변화되었다. 물론 이 3단계의 교리발전 과정이 전적으로 단절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그 안에는 동학의 시천주 사상이 기본적으로 깔려 있다. 시천주라는 말은 〈동경대전〉의 21자 주문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다. 즉 최제우가 종교체험을 할 때 상제(上帝)로부터 받은 '지기금지원위대강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至氣今至願爲大降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至)에서 처음 등장했고 이것이 뜻하는 바가 최제우 자신에 의해 해석되었다. 그러나 그가 시천주에 대해 해석을 붙인 "내유신령(內有神靈)하고 외유기화(外有氣和)하여 일세지인(一世之人)이 각지불이자야(各知不移者也)"의 뜻은 명확하게 이해되지 않는다. 따라서 동학의 경전을 전체적으로 검토해 시천주의 뜻을 간접적으로 살펴보면 초월적이면서도 내재적인 천주를 정성껏 내 마음에 모신다는 의미이다. 우선 최제우에게서 초월적 신은 상제·천주·한울님 등으로 나타나며 내재적 신은 지기(至氣)로서 나타난다. 즉 인간의 외부에 존재하면서 인간과 우주를 주재하는 초월적 신과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 내재해 있는 내재적 신의 성격이 동시적으로 나타난다. 전자의 예는 〈용담유사〉 〈안심가 安心歌〉의 "호천금궐(昊天金闕) 상제님을 네가 어찌 알까 보냐"에 잘 나타나 있고 후자의 예는 〈용담유사〉 〈교훈가〉의 "네 몸에 모셨으니 사근취원(捨近取遠)하단 말가"에 잘 나타나 있다. 이처럼 최제우의 경우 한울님은 초월적 숭배 대상으로서의 성격과 내재적 성격을 상호보완적으로 가지고 있다. 그러나 초월적 성격이 더욱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최시형의 경우, 천주는 인격적·초월적 개념 대신에 천(天)이라는 비인격적 개념이 우세하게 나타났다. 즉 사인여천·양천주(養天主)·인즉천(人卽天) 등의 개념이 등장해 사람을 하늘처럼 섬길 것을 강조하고 마음속에서 천주를 기르고, 나아가 사람이 바로 하늘이라는 주장이었다. 이것은 한울님에게서 인격적 개념을 탈각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나아가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우주만물에도 하늘이 깃들어 있다는 '물물천(物物天) 사사천(事事天)'의 범천론적(凡天論的) 사상까지 주장했다. 그러나 최시형 단계에서는 내재적인 천의 개념이 우세해지면서 초월적인 신의 개념은 부분적으로만 수용되었다. 손병희 단계에서는 전통적인 천주개념은 거의 사라지고 인간을 천과 완전히 동일시하는 인내천사상이 등장했다. 그것도 인간을 중심으로 천이 이해되어 있다. 따라서 현재 천도교 교단에서는 시천주 사상과 인내천 사상을 어떻게 통일적으로 파악할 것인가가 주요과제로 남아 있다.
의례
동학 당시의 종교적 의식은 체계화되어 있지 않았고 천도교에 와서 의식절차가 본격적으로 제정되었다. 최제우 단계에서는 그가 종교체험 당시 받은 21자 주문이 중시되었을 뿐이었다. 최시형 단계에서는 전통적인 제사형식인 '향벽설위' 대신에 인즉천의 입장에서 '향아설위'가 제창되었다.
이는 자기 자신 속에 천과 조상, 그리고 스승의 정령이 들어 있으므로 자기 자신을 향해서 정성껏 제사드리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제사라는 것이다. 이처럼 최제우와 최시형 단계에서는 주문을 외우는 것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겼고 유교식의 복잡한 제사 대신에 간편한 제사행위를 행했다. 그후 천도교 단계에 와서 시일·주문·성미·기도·청수의 5가지 의식을 기본적인 의례로 하는 '오관제'를 정립했다.
교단조직
초기에는 별도의 조직이 없었으나 교도가 늘어남에 따라 교단 조직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그래서 최제우 당시에는 경주 지역을 관장하는 책임자를 '접주'라고 불렀다. 그후 최시형이 교단을 이끌면서 교세가 삼남지방으로 점차 확대되자 접주 위에 '대접주'를 임명했다.
갑오농민전쟁 당시에는 '포'(包)라는 명칭이 등장하는데 접(接)과의 관계가 명확하지 않다. 아마 포는 '기포'라는 말에서 드러나듯이 접과 비슷한 의미를 지니고 있거나 접의 상부조직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포접제의 운영은 6임제의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즉 교장을 비롯하여 교수·도집·집강·대정·중정의 6가지 직임이 교화활동을 주도했다. 이러한 교단의 총괄기관으로는 중앙에 법소가, 각 지역에 도소가 있었다.
그리고 교단의 조직원리는 연원제에 의해 이루어졌다. 즉 도통연원이라는 원칙하에 도를 전하는 자가 도를 받는 자의 연원이 되는 것이다. 이때 새로 입교한 자는 자신을 교인으로 인도한 연원을 마음대로 바꿀 수 없었다. 또 교인을 많이 끌어들인 자는 전체 교단 내에서 포교성적에 따라 그에 상응하는 지위를 획득했다.
따라서 이러한 연원제는 포교활동의 활성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연원간의 파벌을 조성하고 경쟁하는 역작용도 일어났다. 결국 동학은 19세기말이라는 변혁기에 창립된 신종교로 당시 대다수 민중들의 종교적 욕구와 사회변혁에 대한 갈망에 상당히 기여했으며 후에 한국 신종교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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