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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사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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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우리나라에서 사찰이 최초로 지어진 것은 불교가 고구려에 전래된 372년(소수림왕 2) 이후이다.

375년에 초문사(肖門寺)와 이불란사(伊佛蘭寺)를 건립하고 그후 평양에 9사를 짓는 등 많은 사찰이 조성되었으나 실제 남아 있는 건물들은 없고, 여러 사지(寺址)들이 조사·발굴됨으로써 당시의 사찰을 미루어 생각할 수 있을 뿐이다. 원오리사지(元五里寺址)는 중앙에 8각형의 목조탑지가 있고 좌우에 방형의 금당지가 있다. 나머지 주변의 상황은 알 수 없으나 금당 2개에 탑 1개를 세운 일탑이금당식(一塔二金堂式) 가람배치를 이루고 있다.

이는 중국 초기의 가람인 태위의 불사나 숭악사(嵩嶽寺)의 모습과 비슷하다. 다음 427년에 고구려의 도성을 평양으로 옮기고 또 동명성왕의 능을 옮긴 후 이의 원찰(願刹)로서 지은 것으로 생각되는 정릉사지(定陵寺址)에서도 중심 영역은 같은 모습이다. 그러나 498년에 건립된 금강사지(金剛寺址)는 중앙에 8각형 목조탑이 있고, 탑의 좌우와 북쪽에 방형의 금당이 있는 이른바 일탑삼금당식(一塔三金堂式)의 배치를 이루고 있다.

백제에서는 불교가 전래된 다음해인 385년(침류왕 2)에 한산에 불사를 이룩했다고 하나 그 유지조차도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암사지(巖寺址)의 발굴이 있었으나 백제시대의 사지라는 확증은 찾을 수 없다. 불사에 대해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527년(성왕 5)의 대통사(大通寺) 창건에 관한 기록이며, 당시의 도성인 공산성이 있던 공주를 중심으로 대통사지·서혈사지·수원사지 등이 발굴되었으나 가람배치를 잘 알 수 있는 것은 부여지방의 군수리사지(軍守里寺址)·금강사지·정림사지(定林寺址) 등이다.

이들은 하나의 축을 중심으로 중문·탑·금당·강당이 일직선으로 배치되어 있고 이들을 장방형으로 회랑이 둘러싼 이른바 일탑일금당식(一塔一金堂式) 가람배치이다. 한편 익산미륵사지는 이탑일금당식이 3개 모인, 즉 금당과 탑 그리고 이들을 둘러싼 회랑이 병렬로 늘어서 있고 북쪽 합쳐지는 곳에 커다란 강당을 공동으로 세운 특수한 배치를 이루고 있다.

특히 이 가람에 남아 있는 석탑은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석탑으로서 목탑에서 석탑으로 변화된 석탑양식을 대표해주는 것이다.

신라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5세기초 눌지왕 때로 추정되는데 양나라 사승인 원표(元表)에 의하여 왕실에 전해지고, 이차돈의 순교로서 527년(법흥왕 14)에 국교로 공인되면서 사찰이 조영되기 시작했다. 기록상으로 보이는 최초의 가람은 534년에 착공되어 544년(진흥왕 5)에 완공된 흥륜사(興輪寺)이다.

이 사찰은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탑과 금당, 좌경루, 남문, 좌우회랑, 남지 등이 있었다고 한다. 이 사지는 발굴·조사 결과 전체적인 모습은 잘 알 수 없으나 백제의 일탑일금당식 가람배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 최대의 가람인 황룡사(皇龍寺)는 553년에 착공되어 569년에 완공되었으며, 574년에는 장륙존상이 건립되었고, 583년(진평왕 5)에 금당을 중건하는 등 황룡사의 동종이 조성된 754년(경덕왕 13)까지 중건이 이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통일신라시대

이 시기에 들어서면 금당 앞에 동서로 탑이 2개가 서 있는 이른바 이탑일금당식 가람이 형성되었는데, 사천왕사·망덕사·불국사·감은사 등은 그러한 예이다.

한편 선종(禪宗)과 밀교(密敎)가 성행하면서 평지에 건립되던 사찰들이 산 속으로 들어가 건립되어 평지가람에서 산지가람으로 바뀌게 되었다. 평지가람에서는 중문·금당·강당이 하나의 축을 중심으로 일직선으로 배치되고 그 좌우에 건물을 배치하는 좌우대칭 체계였으나 산지가람으로 바뀌게 되면서 여러 건물들을 지형에 맞추어 배치했기 때문에 건물들의 중심축이 일치되지 않고 공간적인 균형을 추구하게 되면서 좌우비대칭의 체계로 바뀌게 되었고, 이것이 한국 전통사찰의 공간적인 특성이 되었다.

고려시대

그 어느 때보다도 불교가 융성했고, 따라서 개국과 더불어 개경을 중심으로 많은 가람이 조성되었다.

법왕사·자운사·내제석사 등 10개의 큰 가람이 창건되었고, 그후 개국사·불일사·흥왕사·안화사 등이 건립되었다. 산지가람은 고려시대에도 계속되었으며, 한편으로는 일탑일금당식 가람(불일사), 이탑이금당식 가람(흥왕사), 일탑삼금당식 가람(만복사)도 조성되었다. 특히 연복사(演福寺)는 동쪽에 왕궁을 능가할 만한 전각이 있고, 그 서쪽에 탑이 있는 동전서탑의 배치였음을 〈고려도경〉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또한 고려시대에 들어와 본래 부처님이 금빛나는 분이라 하여 부처를 모신 사찰의 중심 전각을 금당이라 부르던 것을 부처의 덕호(德號)인 대웅(大雄)으로부터 이름을 따와 대웅전(大雄殿)이라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토속신앙을 수용하면서 산신각·칠성각 등과 같은 작은 전각들도 건립되었고, 대웅전 이외에도 비로자나불을 모신 대광명전(大光明殿:또는 대적광전), 미륵불을 모신 용화전(龍華殿), 지장보살을 모신 명부전(冥府殿:또는 지광전), 석가모니 제자들을 모신 나한전(羅漢殿)·영산전(靈山殿) 등 여러 전각(堂宇)을 건립하고 이외에도 종을 매단 종루, 북·목어(木魚)·운판(雲板)을 매단 고루(鼓樓), 선당(禪堂)인 심검당(尋劍堂), 승려들의 숙소인 요사채 등이 세워졌다.

오늘날 남아 있는 고려시대의 사찰로는 봉정사 극락전, 부석사 무량수전, 동사 조사당, 수덕사 대웅전,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 등이다.

조선시대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에 의해 사찰창건이 둔화되었고 세종 때에는 도성 내의 사찰을 철거했다.

그러나 태조는 강비의 원찰로서 흥천사를, 태종 때에는 문경사·연경사를, 세조는 용문사를 창건했으며 기존의 사찰에서 많은 당우들이 중건되었다. 조선시대의 가람배치는 전시대의 가람배치를 계승한 것으로 판단되며 특히 산지가람의 배치가 주종을 이루었다. 조선 말기인 고종대(高宗代)에는 대웅전 앞에 넓은 마당을 두고, 대웅전과 마주하는 자리에 대방(大房)이라 부르는 커다란 건물을 짓고 대웅전과 대방 사이의 마당에서 큰 법회를 행했다.

이러한 실례로는 서울 정릉의 흥천사(興天寺) 등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 건립된 당우로서 주심포식 건축물은 조선 초기에 건립된 무위사 극락전, 정수사 법당, 관룡사 약사전, 송광사 국사전 등이 있고, 조선 중기에 건립된 것은 봉정사 화엄강당, 동사 고금당, 장곡사 상대웅전 등이 있다(주심포양식). 다포식 건축물로 조선 초기에 봉정사 대웅전, 개심사 대웅전, 청평사 극락전, 신륵사 조사당 등이, 조선 중기에는 통도사 대웅전, 관룡사 대웅전, 법주사 팔상전, 화엄사 각황전 등이, 조선 말기에는 개심사 대웅전, 내소사 대웅보전, 쌍계사 대웅전, 동화사 대웅전 등이 각각 건립되었다.

설악산 신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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