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출처 다음백과

사산 왕조 멸망과 사파위 왕조 성립

다른 표기 언어

아랍인에게 정복된 뒤 이란의 대부분은 후지스탄·메디아·호라산·시스탄 등의 4주로 분할되었다. 아랍 부족들의 군대는 쿰과 시라즈와 같은 많은 주둔도시에 배치되었지만 최대규모의 병단은 중앙 아시아 방면까지 정복의 손을 넓히기 위한 세력으로 하기 위해 호라산에 배치되어 있었다. 아랍인은 이란의 민중과 그들의 종교에는 거의 간섭하지 않았다.

디후칸(대지주계급)과 동부의 소제후들은 대체로 자신들의 토지와 특권을 보유하는 대신 아랍의 지배를 순순히 받아들이며 일정한 조세 또는 공물을 징수하는 책임을 졌다. 아랍계 통치자와 지주계급과의 관계는 대체로 원만했다. 아랍과 이란 민중과의 혼인이 널리 행해졌고 또 이들 두 민족의 언어가 혼합되었기 때문에 근대 페르시아어의 기초가 일찍이 이 무렵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우마이야 왕조 말기에 재정이 궁핍해지면서 농경민·도시민뿐만 아니라 많은 디후칸들 사이에서도 불만이 생겼다.

이슬람에 개종한 이란인에게까지 지시아(jizyah)가 부과되었던 것이 불만을 더욱 가중시켰다. 아바스가의 아부 무슬림은 혁명에 이들 이란인들의 불만을 이용했다.

아부 무슬림은 교묘한 술책을 이용하여 호라산의 아랍 사회가 부족간의 항쟁으로 분열되어 있었던 것을 이용하고 또 예멘계 주민이 총봉기한 데 힘입어 우마이야 왕조를 멸망시켰다(750). 이때의 공로로 그는 호라산의 총독이 되었다. 그런데 아부 무슬림의 세력 신장에 위협을 느낀 아바스 왕조 제2대 칼리프인 만수르는 그를 살해했고 그뒤 거의 50년간에 걸쳐 호라산에는 반란이 잇따랐다.

803년에 바르마크가가 칼리프 하룬 알 라시드에 의해 타도된 뒤 대반란이 폭발하고 하룬은 반란진압에 나섰지만 도중 투스에서 병사했다.

호라산의 통치권은 하룬의 아들 마문의 손으로 옮겨졌다. 마문은 치안을 회복했지만 칼리프와 갈등을 일으켜 새로 호라산군을 조직하여 타히르의 지휘하에 두었다.

타히르는 바그다드를 포위하여 점령하고 아민을 살해했다(813). 호라산군은 몇번의 전투 후 여러 주에 대한 칼리프 마문의 통치를 회복했다. 그뒤 마즈다크교도의 세력이 확대되었던 이란에 반란이 일어나게 되자 마문은 타히르를 호라산 동쪽의 총독에 임명할 필요를 인정했다. 타히르가는 872년까지 사실상 독립왕조로서 존속하고 동시에 바그다드에 있는 호라산 출신의 칼리프 친위부대의 지휘권을 장악했다.

타히르 왕조의 지휘하에 있었던 반세기 동안 이란 동북지방의 대부분은 어느 정도 안정을 유지했고 전례 없는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타히르 왕조가 실제로 지배하고 있었던 것은 수도 니샤푸르를 중심으로 하는 호라산 지방뿐이었다. 그렇지만 그 일족 중에는 바그다드와 사마라 등에서 요직을 점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으므로 이 왕조의 세력은 보다 넓은 범위에 미쳤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출처

다음백과
다음백과 | cp명Daum 전체항목 도서 소개

다양한 분야의 전문 필진으로 구성. 시의성 이슈에 대한 쉽고 정확한 지식정보를 전달합니다.

TOP으로 이동
태그 더 보기
세계사

세계사와 같은 주제의 항목을 볼 수 있습니다.



[Daum백과] 사산 왕조 멸망과 사파위 왕조 성립다음백과, Daum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