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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생애

하룬 알 라시드는 제3대 아바스 왕조 칼리프인 알 마디(775~785 재위)와 예멘 출신의 전 노예 소녀 알 하이주란의 아들로 태어났다.

알 하이주란은 남편과 아들의 통치기간중 국정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한 강한 성격의 여인이었다. 하룬이 태어났을 때 형인 알 하디는 4세였다. 왕자들은 바그다드에 있는 궁궐에서 성장했으며 〈코란〉, 시, 음악, 예언자 마호메트에 관한 일화, 초기 이슬람 역사 및 당대의 법률관행에 대해 교육받았다.

하룬은 어머니의 충성스런 지지자인 바르마크 가문의 야히아의 가르침을 받았다. 780, 782년에 하룬은 비잔틴 제국 원정대의 명목상의 지휘자였는데 군사적 결정권은 그를 보좌하는 숙련된 장군들이 행사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782년의 원정은 콘스탄티노플 맞은편의 보스포루스에 이르렀고 이슬람교도들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평화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원정의 성공으로 하룬은 '올바른 길을 따르는 자'라는 뜻의 명예로운 알 라시드라는 칭호를 받았고 칼리프의 제2계승권자로 임명되었다. 또한 그는 튀니지·이집트·시리아·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의 총독이 되었으나 실제 행정은 그의 선생 야히아가 맡아 처리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아마도 알 하이주란과 야히아에 의해 꾸며진 것 같다.

이둘은 심지어 알 마디를 유인하여 하룬을 그의 직접 후계자로 임명하도록 했다고까지 말하나 알 마디는 후계자를 공식적으로 바꾸지 않은 채 785년 8월에 죽었다. 알 하디가 칼리프가 되었고 하룬은 마지못해 이를 따랐다. 소문에 의하면 알 하디가 786년 9월 의문의 죽음을 당했을 때, 알 하이주란이 그 죽음의 배후에 관계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알 하디가 그녀의 독주에 항거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결국 하룬 알 라시드는 786년 9월 14일 서부 지중해에서 인도까지 이르는 제국의 통치권을 계승하여 칼리프가 되었다.

그는 바르마크가의 야히아를 와지르, 즉 총리로 임명했다. 야히아와 함께 그의 두 아들 알 파들과 자파르도 행정에 참여했다. 이 시대의 와지르는 정책입안자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결정을 수행하는 한 무리의 행정가들도 그 밑에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알 하이주란은 789년 죽을 때까지 정부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후 803년까지 바르마크가가 제국의 대부분을 통제했다.

그러나 국가의 일부 직책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주어졌기 때문에 칼리프가 전적으로 그들에게만 의존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재위중 수많은 국내문제들에 시달렸다. 이집트·시리아·예멘을 비롯한 몇몇 동부의 주(州)들에서 지역적 갈등으로 인한 반란이 수차례 일어났으나 중앙정부는 강력한 힘으로 이 반란들을 진압하고 질서를 회복할 수 있었다. 아프리키야, 즉 튀니지는 연이어 무능력한 총독에게 맡겨진 후 800년에 이브라힘 이븐 알 아글라브에게 위임되었는데, 그는 상당한 액수의 돈을 매년 바그다드에 바치는 대가로 반독립적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이 조치는 당장에는 하룬에게 재정적으로 유익했으나 칼리프의 권한이 손상되는 시초가 되었다. 그것은 아글라브 가문이 1세기 이상이나 이 지역을 바그다드로부터 아무런 간섭도 받지 않고 계속 통치했고 비슷한 지위가 다른 지방왕조들에게도 허용되었기 때문이다. 비록 당시에 반란들이 역사서를 가득 채우고 있기는 하지만 제국의 대부분 영역은 그의 통치기간중 대체로 평화로웠다.

이때문에 섬유·금속제품·제지(製紙) 등의 산업이 발전하고 무역이 확대되었다. 이러한 번영 속에서 칼리프와 제국의 지도적 남녀인사들은 막대한 재물을 축적했다.

하룬 통치시기 아바스 왕조의 부

〈천일야화〉에서 하룬과 그의 궁전을 전설적으로 묘사하여 이상화하고 낭만화시켰는데 그것은 사실 상당한 근거가 있었다.

762년 바그다드가 새 수도로 건설된 이래 막대한 재물이 이곳으로 흘러들어왔다. 지도적 인사들은 재력을 과시하려고 경쟁적으로 소비했고 그들의 아내들은 더욱 심했다. 하룬의 통치기간중에 이러한 형태는 전례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아바스가의 일원인 그의 아내 주바이다는 보석이 점점이 박힌 금·은 그릇만을 식탁에서 사용했다.

하룬의 궁궐은 수많은 환관, 첩, 노래 소녀, 남녀 하인들이 갖추어진 거대한 집단이었다. 그 자신도 음악과 시에 조예가 깊었고 뛰어난 음악가와 시인들에게 아낌없이 선물을 주었다. 그러나 왕실의 뛰어난 문화도 그 한계가 있었는데 그 이유는 언어학을 빼고는 아라비아의 학문분야들이 아직 초보단계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거칠고 우울한 면들도 있었다. 음악을 듣지 않을 때는 하룬은 닭싸움과 투견을 구경했을 것이다.

그는 칼리프로서 생살여탈권(生殺與奪權)을 쥐고 즉각적인 처형을 명할 수 있었다. 변장하고 바그다드를 야간에 순회하는 그의 이야기에서 그는 바르마크가의 자파르와 명석한 시인 아부누와스와 같은 친구뿐만 아니라 사형집행인 마스루르도 대동했다.

바르마크가의 몰락

하룬의 성격에서 별로 좋지 않은 면들이 바르마크가의 몰락에 의해 두드러졌는데, 이 가문은 16년 이상 제국의 행정을 책임지고 있었으며, 왕실의 사치와 낭비에 필요한 자금을 제공했다.

더구나 바르마크가의 자파르는 하룬의 각별한 친구였기 때문에 동성연애 관계였다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또한 소문에 의하면, 하룬은 자파르가 신방에 들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그의 여동생 아바사와 극비리에 결혼하도록 짜놓았으나 자파르가 그녀와 사랑에 빠졌고 그녀는 임신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때문이거나 아니면 다른 이유로 하룬은 분노하여 자파르를 803년 1월 29일 처형했다.

이 가문의 다른 사람들도 투옥되었고 재산은 몰수되었다. 현대 역사가들은 하룬이 자파르를 처형한 것은 소문과는 다른 이유때문이라고 한다. 즉 하룬이 바르마크가에 의해 지배당한다고 느꼈고 나아가 그들의 부를 몹시 탐냈기 때문이라고 한다. 더구나 제국 내의 잡다한 세력들이 둘로 갈라져 상반된 양극화 현상으로 나타났다. 한쪽은 '비서들', 즉 민간관리들로서 그 대부분은 페르시아인들과 동부 지방으로부터 온 사람들이었고, 다른 한 세력은 종교학자들(울라마)로서 그 대부분은 아랍인들과 서부지방으로부터 온 사람들이었다.

바르마크가는 비서들을 좋아했으나 새 와지르 알 파들 이븐 알 라비는 울라마를 더 선호했기 때문에 이러한 정치적 분열은 장관들의 경질문제로까지 확대되었다.

두 세력간의 투쟁은 적어도 50년 동안 지속되었다. 하룬은 이라크와 서부지역을 태자인 알 아민에게 맡기고 제2계승권자인 아들 알 마문에게는 동부지방을 맡김으로써 이 분열을 인정했다.

전자는 아랍계의 공주 주바이다의 아들로 803년 이후 알 파들 이븐 알 라비를 스승으로 모시고 있었다. 반면에 알 마문은 페르시아 노예 소녀의 아들로 803년 이후 바르마크가의 부하 알 파들 이븐 살을 스승으로 모셨다. 하룬이 죽은 후 두 아들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 제국을 분배함으로써 분열을 더욱 조장한 데 대해 세인의 비난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이 분열을 명확히 함으로써 하룬은 850년 이후 제국이 결정적으로 와해하는 데 공헌한 셈이었다.

와지르인 알 파들 이븐 알 라비에게는 바르마크가라는 후광이 없었기 때문에 하룬의 개인적 결정이 더욱 큰 비중을 차지한 듯하다.

비잔틴 제국에 대한 군사작전은 계속 성공적이었으나 808년 가을 호라산(이란에 있음)에서 2년이나 끈 심각한 반란을 직접 진압하러 진군해 가던 중 하룬은 투스(지금의 마슈하드 근처)에서 병에 걸려 몇 개월 후 그곳에서 죽었다. 알 아민이 칼리프를 계승했다. 하룬은 예술의 아낌없는 후원자였지만 위대한 통치자도, 호감을 주는 인품의 인물도 아니었다. 그의 명성은 왕실에서 누린 미증유의 부와 사치, 아라비아 전설에서 그가 차지한 위상에 힘입은 것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