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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한국의 군주들은 북방에서는 킵차크 한국, 동북에서는 차가타이 한국에 있는 같은 몽골의 친족과 때때로 충돌했지만 거의 50년간 대외정책의 목표는 시리아를 정복하는 것이었다. 그때문에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와 충돌하여 한편에서는 십자군과 그리스도교 여러 나라들과 몇 번씩 제휴를 시도했지만 성사되지 못했다. 또 1260, 1303년에는 알레포와 다마스쿠스를 일시적으로 공략했지만 결국 쓰라린 패배만 맛보았다. 내정면에서 일한국의 군주들이 채용했던 정책 가운데 가장 건설적이었던 것은 아제르바이잔을 거쳐 흑해에 이르는 통상을 일으키고 타브리즈를 국제통상의 중심지로 만든 것이었다. 원래 몽골족은 대개 이슬람을 비롯해 그외 모든 종교집단에 대해 관용적이었다.
제3대 왕인 아흐마드 타크달(1281~84 재위)은 1292년에 이슬람교에 귀의했지만 몽골 귀족들에 의해 퇴위당하고 조카인 아르군이 그뒤를 이어 이슬람교도들을 박해했다. 아르군이 88년 유대인의 의사 사드 웃 다울라를 재무대신에 등용했는데, 그 대신이 이슬람교도들에게 가혹한 조치를 취해 나라가 대혼란에 빠지고 불만의 소리가 높아졌다. 그후 사드 웃 다울라는 실각해 처형당하고 모든 지방에서 처참한 유대교도 학살이 행해졌다.
다음해 아르군의 아들 가잔이 이미 이슬람에 개종한 상태에서 왕위에 추대되어 개혁에 착수했다. 개혁의 내용은 몽골족 침입 이전의 무인 봉지 등의 토지제도를 부활시키고 사회 질서의 회복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지만 가잔이 일찍 죽었으므로 성과를 보지 못했다. 다만 이슬람을 국가의 공인종교로 삼은 종교정책만은 그의 사후에도 계속되어 이란에 있는 많은 몽골 귀족과 부족민이 이슬람교로 개종했다.
가잔의 동생 올제이투의 치세는 비교적 평온하고 번영한 시기였다. 가잔의 조카 아부 사이드하에서는 내외의 분열적 세력이 커져 제압할 수 없을 정도로 되었다. 유력한 고관들은 일한국을 지배하려고 싸우고 아부 사이드의 사후 각각 자파가 받드는 왕자들을 앞세워 계승 다툼을 시작했다. 그중 하산 부즈루그가 1336~56년에 걸쳐 세력을 장악하고 몇 사람의 괴뢰 왕자들을 이라크와 아제르바이잔의 왕위에 앉혔다.
일 한국이 쇠퇴해가는 가운데 파르스·헤라트 두 지방이 독립했다. 헤라트는 쿠르드 왕조의 이름으로 알려진 옛 고르 왕조의 왕족에 의해, 한편 파르스는 무자파르 왕조로 독립했다. 또 자라이르 부족 외에 다른 유목부족의 수장들이 이란의 일부, 특히 루리스탄 지방을 지배했다. 호라산 지방에서는 사르다하르로 자칭하고 그 지방의 대부분을 지배하고 있던 무리가 결사체를 형성했다. 이란의 경제는 통상로의 붕괴와 무서운 질병의 만연으로 점점 쇠퇴해갔다. 도시문화의 요소 가운데 이러한 재액에도 불구하고 존속했던 것은 뒤에 티무르에 의해 거의 전부 파괴되어버렸다.
일 한국의 군주들은 간신히 동쪽 경계를 트란스옥사니아의 차가타이 한국의 군주들의 침입에서 보호하고 있었다. 그러나 1370~80년 티무르가 사마르칸트를 중심으로 중앙집권국가를 만들 무렵에는 쿠르드 왕조는 이미 그들에 대해 저항할 힘이 없었다. 그리고 1383년 헤라트가 함락된 뒤 티무르는 별다른 저항도 받지 않고 이란 전지역을 공략해버렸다. 그후 무장봉기는 가차 없이 잔학하게 진압되어 도시는 차차 파괴되고 그 주민은 학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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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일 한국의 이란 통치 – 다음백과,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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