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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그리스도교 신앙행위의 핵심.
예배가 동양문화에 수용되면서 문자적인 의미로서는 '예의를 갖추어 하느님을 경배'하는 그리스도교도의 공동체적인 행위를 뜻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어원과 전통은 다양하다. 영어 'worship'은 하느님에게 '최고의 영광과 찬미'를 드리는 행위를 뜻하며, 라틴어 'cult'는 '종교의식'이라는 의미가 지배적이다.
독일어 'Gottesdienst'는 '하느님을 섬김'이라는 합성어로 되어 있는데, 하느님의 '사람 섬김'(구원·해방) 행위에 대한 인간의 응답행위를 가리킨다. 고전적인 그리스어에서 온 표현 'liturgy'는 본래 '하느님 백성의 공동행위'라는 의미를 지녔으나, 실제로는 '의식화된 전례'라는 뜻이다. 이런 전통의 다양성을 간추리면, '말씀' 중심의 행위를 강조하는 교회 전통에서는 그것을 '예배'라고 표현하고, '성찬' 중심의 행위를 강조하는 교회에서는 '전례'로 통용하고 있다.
'예배'가 개신교회의 용어인 반면, '전례'는 로마 가톨릭 교회와 동방정교회의 용어이다. 전통적으로 강조점의 차이는 있지만 오늘날에 와서는 어떻게 표현하든지 같은 것을 의미하고 있다.
의미
그리스도교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구원행위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며, 감사와 찬양이 그 핵심을 이루고 있다. 이 행위는 하느님과 그 백성 사이의 '대화'로 이해되기도 한다. 이때 사귐과 하나됨의 측면이 강조된다. 인간은 예배행위로써 하느님을 만난다. 그러나 이런 만남은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와 인간의 회개를 통해서 일어난다. 외양으로는 말씀 선포와 성찬에 참여함으로써 이런 만남이 가능하지만, 실제로는 성령의 임재를 통해서만 가능해진다. 하느님을 만나는 일이 예배행위의 알파요, 오메가이다. 이 만남의 신비는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때문에 가능하다. 인간의 노력보다는 하느님의 선행은총이나 주권적인 개입으로서만 가능하게 된다.
배경
그리스도교의 경전인 성서 자체가 예배 전통의 산물이라고 해도 지나친 표현이 아니다. 예배가 그리스도교의 생명을 담고 있다면 그 생명은 역시 성서에 나타나 있는 하느님의 계시행위이기 때문이다. 이 행위가 예배를 통해서 사건화되지 않고서는, 이 사건 자체가 하느님의 주도로 이루어졌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교의 태동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구약성서〉와 〈신약성서〉 전체에서 바로 이런 예배의 뿌리를 추적할 수 있다. 초대교회의 문헌과 〈신약성서〉의 단편들에서 그리스도교 예배의 배경을 추적하기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사도행전〉에서는 초대교회의 원초적인 예배의 모습을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그날에 새로 신도가 된 사람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듣고 서로 도와주며 빵을 나누어먹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했다…… 그리고 한마음이 되어 날마다 열심히 성전에 모였으며 집집마다 돌아가며 같이 빵을 나누고……하느님을 찬양했다"(사도 2 : 42, 46~47). 이 부분에는 성령강림 후 초대교회 예배의 요소들이 집약되어 표현되고 있다.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구원행위에 대한 인간들의 응답이었다. 성령이 이 사실을 깨닫게 했을 때 그 백성들의 회개가 뒤따랐다. 또한 그 하느님의 구원행위에 대한 응답으로서 말씀선포·성찬·기도·사귐·찬양이 반복되었고, 이 행위의 반복으로 그들은 하느님을 만나는 체험을 했던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이 초대교회 예배의 원형을 지금까지 계승해오고 있다. 역사와 문화의 영향 때문에 어느 한 요소가 더 강조되기도 하고 덜 강조되기는 했으나 이것들이 예배행위의 중심이 되어온 것이다. 어느 한 전통을 고수하거나 절대화하기보다는, 모든 공통요소를 포괄해 재현함으로써 예배 본래의 모습을 보전해갈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예배 전통에서 빠진 요소를 다른 예배 전통에서 보완할 수도 있다.
형성
그리스도교 예배가 형성된 모태와 토양은 지중해 연안의 히브리 종교였다. 즉 그리스도교의 발상지인 팔레스타인에서 행해졌던 히브리 민족의 예배행위가 그 뿌리라고 말할 수 있다. 굳이 구분하자면 예루살렘의 성전예배와 디아스포라의 회당예배로 나누어 생각할 수는 있으나 그 뿌리는 하나이다.
BC 6세기의 바빌론 포로기 이전까지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느님을 예배했으며 희생제사를 드리는 것이 중심이었다. 하느님과의 화해는 이 희생제사의 속죄물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믿고 실천했다. 안식일의 갖가지 규례가 율법으로 제정되어 엄격하게 준수되었다. 그러나 바빌론 포로기 이후에는 이 성전 중심의 예배가 어렵게 되었다. 현실적으로도 불가능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예언자들의 영향을 받아 희생제사가 아닌 순수한 영적인 예배가 중요시되었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회고하는 예배, 즉 이집트에서의 유월절,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과 맺은 새로운 계약, 광야에서의 장막생활을 기념하는 회당예배의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바빌론 포로기 이후 이스라엘 민족이 각지에 흩어지면서 가는 곳마다 회당을 세우고 거기에서 안식일의 규례를 지켰다. 이런 예배 때마다 성서(토라)를 읽고 가르쳤다. 또한 함께 기도를 드리고 〈시편〉을 노래하는 예배 모임이 계속되었다. 바빌로니아 포로들이 예루살렘으로 되돌아온 후 예루살렘 성전이 다시 세워졌기 때문에 성전예배와 회당예배가 병존하게 된 셈이다. 그리스도교의 혁신적인 예배, '영과 진리를 드리는 예배'(요한 4 : 22)는 이와 같은 유대교의 전례에서 그 뿌리를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지중해 연안의 유대교에서 드리던 하느님 예배의 규례가 그리스도교 예배의 모태가 된 것이다.
그리스도교가 확산되면서 초대교회의 예배 원형이 갖추어지게 되었다(사도 4 : 22~). 안식일이 아니라 안식 후 첫날에 성전과 회당, 교도들의 가정에서 모임이 계속되었다. 후에는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공동체 사이에 분명한 구분이 생겨서, 안식일 규례가 아니라 '주의 날'의 예배가 된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주일예배'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의 증언과 그 축제가 중심이 되었다. 성서를 읽는 일과 사도의 가르침이 중요시되었고, 기도를 드리고 빵을 떼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리스도교도의 친교와 함께 하느님을 찬미하는 일이 항상 곁들여지게 되었고, 이런 요소들이 그리스도교 예배의 중심을 이루었다. 성서낭독도 초창기에는 율법서(토라)만 반복하다가 사도들의 편지(서신서)가 추가되었고, 후에 예수의 삶과 가르침에 대한 어록들이 본격적으로 읽혀지기 시작했다. 오늘날 예배의식에서 성서를 이런 순서로 읽는 것은 역사적인 발전과정을 반영한 것이다. 초대교회의 예배에서 사도들의 가르침이 오늘날의 '설교'(강론)가 되었고, 빵을 떼는 규례가 감사의 전례인 '성찬'(Eucharist)이 되었다.
예수의 부활을 핵심으로 한 이 '설교'와 '성찬'은 그리스도교 예배에서 분리할 수 없는 2개의 축을 이루게 되었다. 이 2개의 축을 중심으로 찬미·친교·기도가 모여 하나의 축제를 이룬 것이 그리스도교 예배의 참모습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발전
그리스도교 예배의 발전과정을 보면, 초대교회의 예배를 시대와 지역 상황에서 창조적으로 발전시키려는 흐름과, 반대로 핵심적인 예배의 틀을 전통적으로 고수하려는 경향으로 크게 구분할 수 있다.
어느 한 편의 경향을 절대화할 필요는 없다. 둘 다 공헌한 부분이 있는 전통교회의 노력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시각에서 그리스도교 예배를 바로 이해하려면 그 발전과정을 개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도교의 예배사를 간추려보려면 그 틀이 확정된 초대교회의 경우로부터 그것이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예배형태로 갈라진 역사를 훑어보아야 한다.
동서교회의 분열은 바로 이 예배의식에 대한 신학적 차이에서 기인했던 것으로 생각되나 오늘의 시각에서 그당시를 회고해보면 신학이나 전례의 차이보다는 정치적·문화적 요인이 오히려 그 분열의 배경이 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문헌상 가장 오래된 초대교회 예배에 대한 기록은 유스티누스(100~165경)의 편지에서 읽을 수 있는데, 150년경 그리스도교도는 매주 일요일에 모여서 성서를 읽고, 설교와 기도를 반복했으며, 성찬을 함께 나누었다. 2세기 후반에는 부활절 전야예배가 1년에 1번씩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특히 이 예배 가운데 신입교도의 세례의식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는 의식으로서 반복했음을 알 수 있다. 옛날의 유월절 신비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신비가 강조되기 시작했다. 3세기초까지도 확정된 예배의식문이 없었던 것 같다. 예배의식문을 전해주고 있는 문헌으로는 히폴리투스(170~236경)의 〈사도들의 전승〉을 들 수 있다. 고증의 문제가 남아 있지만 이 예배의식문의 연대는 더 오래된 것 같고 어쩌면 그리스도교 예배의식 중 최초의 예라고도 생각된다.
성찬 중심의 예배의식이 그때부터 고정되기 시작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숫자가 늘어났는데 임의로 예배를 인도할 만한 지도자가 없어서 그랬을 가능성이 높다. 한편 그리스도교 예배의식의 유연성과 창조성이 유지된 것은 유대교의 배척과 로마 제국의 핍박 속에서도 계승되어온 신자의 가정예배 때문이었다.
밀라노 칙령(313)에 의한 그리스도교의 공인은 그리스도교 축제로서 예배가 발전될 수 있는 좋은 역사적인 계기였지만 적어도 예배의식의 발전에서는 아쉬움을 남겼다.
이교문화나 이방종교와 상호교류하는 과정에서 예배의 고정화가 필연적으로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4~5세기 당시의 예배 언어시리아어와 그리스어였다. 그후 다양하게 콥트어와 아람어 같은 지방언어도 예배언어로 사용되었다.
여기에 로마 제국의 언어인 라틴어가 추가되어 로마 제국이 동로마와 서로마로 나뉘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계기가 되었고, 바로 이것이 교회와 예배가 동방과 서방으로 갈라지게 된 역사적·문화적 배경이다. 긴 역사적인 발전과정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그리스어를 예배언어로 고수한 교회가 비잔틴 중심의 동방교회가 되었고, 라틴어를 새로 수용한 교회가 로마 중심의 서방교회가 된 셈이다. 이 교회 분열은 4, 5세기의 정치적·문화적 갈등에서 비롯되었으나 그것이 신학적인 대립으로, 유월절의 신비와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첨예화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흘렀다.
동방정교회의 예배 전통도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언어와 정치적인 자율성에 따라 그리스 정교회, 콥트어를 고수하는 이집트 정교회, 시리아어를 쓰는 동방정교회와 그후 러시아 정교회로 구분되어 오늘날까지도 존속되고 있다. 동방정교회의 예배 전통은 성격상 크게 둘로 구분할 수 있다. 그 하나는 안티오크 전통으로서 시리아·비잔틴·콘스탄티노플 전례가 여기에 속한다. 다른 하나는 알렉산드리아 전통으로서 콥트 전례와 에티오피아 전례가 이에 해당된다. 중세 이후 널리 행해지고 있는 것은 비잔틴 전례이며, 러시아 정교회도 이 전통을 전수받았다.
동방교회 예배의 특징으로는 다음과 같은 점들을 지적할 수 있다. ① 장엄하고 화려한 예배의식으로서 하늘나라의 예배를 표현해 보려고 한 점, ② 기도하는 방식에 있어서 어떤 중보자가 필요 없이 직접 그리스도나 삼위일체 하느님에게 기도하는 점, ③ 예배에서 성령임재의 기원(Epiclesis)을 강조한 점, ④ 예배에서 신비를 강조하려고 한 점, ⑤ 회중의 적극적인 참여, ⑥ 예식문의 불변성과 다양성 등이다. 교회력에 따른 예배나 일반 예배 때에 예배인도자의 예식문은 거의 고정되어 있으나, 성찬 기도문만은 다양하게 표현되어왔다.
서방교회의 예배의식은 로마에서 예배언어가 라틴어에서 그리스어로 바뀌면서 발전하기 시작했다.
초기 라틴 교부의 영향과 성자숭배를 수용한 셈이다. 동방교회도 예배의 불변의 원칙을 깨고 교회력에 따라 각기 다른 기도와 영창을 성찬 예식에 도입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7세기 중엽에는 서방의 예배의식이 라틴어를 공통언어로 사용했지만, 예배인도자가 기도문을 바꾸는 방식에 따라 '로마 전례'와 '갈리아 전례'가 등장하게 된다.
이때 출현한 '로마 전례'가 후에 다소 변화된 형태로 최근까지 로마 가톨릭 교회 예배의식의 틀로 보전되고 있다. 서방교회 예배의 표본이 된 '로마 전례'가 출현하기까지는 좀 복잡한 절차와 과정이 있는데, 역시 당시의 정치·문화와도 관계가 있었다. 그리스도교 예배가 프랑스에 이식된 후 거기서 지방적인 특색이 가미되고 다시 로마로 역수입되는 과정을 통해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로마 전례'가 형성되었다.
이때 로마의 예배의식에는 예언자적 경향이 거의 사라지고 제사장적인 경향이 두드러지게 되었다. 회중이 알아듣지도 못하는 라틴어가 예배언어로 계속 사용되었고, 예배서가 회중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예배를 인도하는 사제만을 위한 것이 되어버렸다. 결국 그리스도교 예배의 실질적인 의미는 약화되었고, 성찬에 구원사적으로 참여했던 예배가 성직자의 행동을 보기만 하는 예배로 퇴화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예배가 형식적인 전례로 전락해버린 것이 중세 말기의 현실이었음을 당시의 역사적인 자료에서 읽을 수 있다.
변천
그리스도교 예배사의 흐름에서 보아도 16세기의 종교개혁은 역사적인 필연이었다.
마르틴 루터나 장 칼뱅이 아니었다 해도 예배를 포함한 교회개혁 운동은 일어났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예배를 포함한 공동 신앙고백적 교회생활에 대한 요청이 밑바닥에서부터 일고 있었다. 예배의식이 각 나라의 언어로 표현되어 예배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는 의식도 높아져가고 있었다. 당시 금속활자의 발명으로 인쇄술이 발달되자 이런 경향은 가속화되었다. 당시의 정치적·사회적 변화가 종교개혁운동에 더욱 박차를 가해준 셈이다. 봉건사회의 붕괴는 교황의 교권 약화를 자초했고, 시민사회의 발흥은 사제가 독점하는 예배행위를 방관할 수 없게 했다.
뒤에 안 사실이지만 그당시 종교개혁자들의 의도는 교회의 분열에 있지 않았고 그 개혁에 있었다.
이 교회의 개혁 속에는 예배의 개혁이 중요한 사안 가운데 하나였다. 그것이 당시의 개혁의지를 표출한 문헌에서도 반영되어 있다. 종교개혁자들은 성서와 초대교회의 예배로 돌아갈 것을 주창했다. 당시 예배에서 거의 사라져버린 성서의 말씀에 의한 '설교'의 복원을 강조했고, 예배를 독점하는 사제와 성직자의 횡포를 비난하면서 만인사제직을 들고 나왔다. 그렇다고 그리스도교 예배의 또 하나의 핵심인 성찬을 배척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예배 본연의 의미를 회복하려는 데 주안점이 있었다. 루터는 전체 회중이 참여할 수 있는 성찬을 1개월에 1번은 베풀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 주장은 루터교에서 지켜지고 있다. 장 칼뱅도 1개월에 1번의 성찬을 포함한 예배를 말이나 글로 강조한 바 있는데, 당시 시민사회의 현실이 이를 수용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나 오늘날의 개신교는 이제라도 이 종교개혁자의 개혁의지를 존중하는 것이 예배갱신운동의 필수조건이라고 본다. 칼뱅은 예배에서 사제나 선창자의 주도적 역할을 개혁하는 시도로서 회중의 찬양을 강조하고 그것을 실시했는데, 이것은 동방교회의 예배에서 중요한 요소를 복원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이해된다. 오늘날 개신교의 예배가 종교개혁자들의 의도와는 다르게 예배 본연의 모습에서 벗어난 현실을 초래하기도 했지만 이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줄기차게 일고 있다.
그것은 성찬을 제외한 설교 중심의 예배로 퇴행해가고 있음에 대한 반성이다. 바람직한 그리스도교 예배는 말씀과 성찬이 함께 조화를 이룬 통전성(統全性)이 전제되어야 함을 새삼 인식하고 있다.
개신교의 예배 전통이 왜 설교중심이라는 극단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는가? 여기에도 인류 문명사적인 변화가 작용했음을 의식하게 된다. 르네상스 운동과 더불어 지성적인 진리 전달을 높이 평가하게 되었다. 활자문명과 수사학적인 흐름도 상징과 신비를 통한 진리의 전달을 경시하도록 했다.
그리스도교 예배의 형태 변화를 추적하는 연구들은 개신교 예배에서 성찬식이 경시되거나 아예 사라져버린 배경으로 다음과 같은 역사적인 사실을 들고 있다. 유럽 대륙의 경우 종교개혁과 더불어 예배에서 성찬식이 경시된 것을 중세부터 있었던 예배형식의 연장으로 보는 입장이 있다. 중세 이래 도시의 성당에서는 언제나 예배 때 성찬이 포함되었지만 그 도시 주변의 지방 교회에서는 성찬이 생략된 예배의식(Pronaus)이 보편화되어 있었다는 주장이다. 이렇게 다소 변칙적인 예배형태가 종교개혁과 더불어 보편화되었다는 입장을 견지하는 학자로는 J. J. 알멘이 있다.
영어를 예배언어로 사용하는 개신교의 예배 전통에서는 예배 개혁과정에서 성찬이 점차로 도외시된 이유를 다른 데서 찾고 있다.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는 본래 주일예배 외에 오늘날의 수도원 공동체처럼 매일 아침·점심·저녁 기도회의 전통이 있었다. 그 가운데 주로 영국 교회의 전통에서 비롯된 아침 찬양예배(Quire Office)가 개신교의 주일예배뿐만 아니라 다른 예배와 기도회의 틀로 고정되어버렸기 때문에 성찬이 사라졌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대표적인 학자로 윌리엄 D. 맥스웰이 있다.
그리스도교 예배의 변천과정에서 성찬을 경시한 설교 중심의 예배형태의 출현은 역사적으로는 어찌할 수 없었다고 해도 그것을 정당화할 수 있는 예배신학적인 근거는 빈약하다. 오히려 역사적인 변천과정에서 많이 빗나간 오늘의 예배 현실을 새롭게 인식하고 그것을 초대교회의 예배 전통으로 갱신해가려는 노력들이 오늘날 세계 교회의 지배적인 흐름인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예배 갱신의 과제
그리스도교 예배의 관점에서 교회는 획기적인 전환점에 와 있다. 오늘의 세계와 교회현실이 예배의 역사와 그 현실을 베일 속에 가두어 둘 수 없게 되었다. 교회마다 이 사실을 인정하여 예배갱신의 과제를 본격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로마 가톨릭 교회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65)는 교회의 자체 개혁에 새로운 이정표를 설정했다. 특히 예배에 대해 공의회가 내놓은 〈성례에 대한 헌장〉은 아주 중요한 문헌이다. 이 헌장을 출발점으로 오늘날 가톨릭 교회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예배개혁이 일어나고 있다. 1969년 이후 예배에 관한 모든 내용이 새롭게 바뀌어가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동방교회를 포함한 세계 개신교협의회인 세계교회협의회(WCC)도 이런 세계교회의 예배에 관한 흐름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이미 페루의 리마에서 '세례·성찬·교역'(BEM)에 관한 세계교회의 합의문서(Lima Documents)를 내놓은 바 있고, 이것을 중심으로 세계교회가 예배의 일치를 지향하는 신학적이고도 실제적인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이에 대해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도 관심을 보이며 대표자를 파송했는데, 여기에는 예배일치를 위한 역사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오늘날 예배갱신운동은 이 다양한 예배 전통에 개방적일 뿐만 아니라, 지구촌의 현실을 감안하면서 각 지역의 교회가 뿌리를 내리고 있는 전통문화에도 개방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 운동은 저마다 선 자리에서 그리스도교의 공동 예배유산과 우리의 전통문화가 어떻게 창조적인 조화를 이루어갈 수 있느냐에 따라 좌우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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