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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 예배의 발전과정을 보면, 초대교회의 예배를 시대와 지역 상황에서 창조적으로 발전시키려는 흐름과, 반대로 핵심적인 예배의 틀을 전통적으로 고수하려는 경향으로 크게 구분할 수 있다.
어느 한 편의 경향을 절대화할 필요는 없다. 둘 다 공헌한 부분이 있는 전통교회의 노력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시각에서 그리스도교 예배를 바로 이해하려면 그 발전과정을 개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도교의 예배사를 간추려보려면 그 틀이 확정된 초대교회의 경우로부터 그것이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예배형태로 갈라진 역사를 훑어보아야 한다.
동서교회의 분열은 바로 이 예배의식에 대한 신학적 차이에서 기인했던 것으로 생각되나 오늘의 시각에서 그당시를 회고해보면 신학이나 전례의 차이보다는 정치적·문화적 요인이 오히려 그 분열의 배경이 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문헌상 가장 오래된 초대교회 예배에 대한 기록은 유스티누스(100~165경)의 편지에서 읽을 수 있는데, 150년경 그리스도교도는 매주 일요일에 모여서 성서를 읽고, 설교와 기도를 반복했으며, 성찬을 함께 나누었다. 2세기 후반에는 부활절 전야예배가 1년에 1번씩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특히 이 예배 가운데 신입교도의 세례의식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는 의식으로서 반복했음을 알 수 있다. 옛날의 유월절 신비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신비가 강조되기 시작했다. 3세기초까지도 확정된 예배의식문이 없었던 것 같다. 예배의식문을 전해주고 있는 문헌으로는 히폴리투스(170~236경)의 〈사도들의 전승〉을 들 수 있다. 고증의 문제가 남아 있지만 이 예배의식문의 연대는 더 오래된 것 같고 어쩌면 그리스도교 예배의식 중 최초의 예라고도 생각된다.
성찬 중심의 예배의식이 그때부터 고정되기 시작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숫자가 늘어났는데 임의로 예배를 인도할 만한 지도자가 없어서 그랬을 가능성이 높다. 한편 그리스도교 예배의식의 유연성과 창조성이 유지된 것은 유대교의 배척과 로마 제국의 핍박 속에서도 계승되어온 신자의 가정예배 때문이었다.
밀라노 칙령(313)에 의한 그리스도교의 공인은 그리스도교 축제로서 예배가 발전될 수 있는 좋은 역사적인 계기였지만 적어도 예배의식의 발전에서는 아쉬움을 남겼다.
이교문화나 이방종교와 상호교류하는 과정에서 예배의 고정화가 필연적으로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4~5세기 당시의 예배 언어시리아어와 그리스어였다. 그후 다양하게 콥트어와 아람어 같은 지방언어도 예배언어로 사용되었다.
여기에 로마 제국의 언어인 라틴어가 추가되어 로마 제국이 동로마와 서로마로 나뉘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계기가 되었고, 바로 이것이 교회와 예배가 동방과 서방으로 갈라지게 된 역사적·문화적 배경이다. 긴 역사적인 발전과정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그리스어를 예배언어로 고수한 교회가 비잔틴 중심의 동방교회가 되었고, 라틴어를 새로 수용한 교회가 로마 중심의 서방교회가 된 셈이다. 이 교회 분열은 4, 5세기의 정치적·문화적 갈등에서 비롯되었으나 그것이 신학적인 대립으로, 유월절의 신비와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첨예화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흘렀다.
동방정교회의 예배 전통도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언어와 정치적인 자율성에 따라 그리스 정교회, 콥트어를 고수하는 이집트 정교회, 시리아어를 쓰는 동방정교회와 그후 러시아 정교회로 구분되어 오늘날까지도 존속되고 있다. 동방정교회의 예배 전통은 성격상 크게 둘로 구분할 수 있다. 그 하나는 안티오크 전통으로서 시리아·비잔틴·콘스탄티노플 전례가 여기에 속한다. 다른 하나는 알렉산드리아 전통으로서 콥트 전례와 에티오피아 전례가 이에 해당된다. 중세 이후 널리 행해지고 있는 것은 비잔틴 전례이며, 러시아 정교회도 이 전통을 전수받았다.
동방교회 예배의 특징으로는 다음과 같은 점들을 지적할 수 있다. ① 장엄하고 화려한 예배의식으로서 하늘나라의 예배를 표현해 보려고 한 점, ② 기도하는 방식에 있어서 어떤 중보자가 필요 없이 직접 그리스도나 삼위일체 하느님에게 기도하는 점, ③ 예배에서 성령임재의 기원(Epiclesis)을 강조한 점, ④ 예배에서 신비를 강조하려고 한 점, ⑤ 회중의 적극적인 참여, ⑥ 예식문의 불변성과 다양성 등이다. 교회력에 따른 예배나 일반 예배 때에 예배인도자의 예식문은 거의 고정되어 있으나, 성찬 기도문만은 다양하게 표현되어왔다.
서방교회의 예배의식은 로마에서 예배언어가 라틴어에서 그리스어로 바뀌면서 발전하기 시작했다.
초기 라틴 교부의 영향과 성자숭배를 수용한 셈이다. 동방교회도 예배의 불변의 원칙을 깨고 교회력에 따라 각기 다른 기도와 영창을 성찬 예식에 도입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7세기 중엽에는 서방의 예배의식이 라틴어를 공통언어로 사용했지만, 예배인도자가 기도문을 바꾸는 방식에 따라 '로마 전례'와 '갈리아 전례'가 등장하게 된다.
이때 출현한 '로마 전례'가 후에 다소 변화된 형태로 최근까지 로마 가톨릭 교회 예배의식의 틀로 보전되고 있다. 서방교회 예배의 표본이 된 '로마 전례'가 출현하기까지는 좀 복잡한 절차와 과정이 있는데, 역시 당시의 정치·문화와도 관계가 있었다. 그리스도교 예배가 프랑스에 이식된 후 거기서 지방적인 특색이 가미되고 다시 로마로 역수입되는 과정을 통해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로마 전례'가 형성되었다.
이때 로마의 예배의식에는 예언자적 경향이 거의 사라지고 제사장적인 경향이 두드러지게 되었다. 회중이 알아듣지도 못하는 라틴어가 예배언어로 계속 사용되었고, 예배서가 회중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예배를 인도하는 사제만을 위한 것이 되어버렸다. 결국 그리스도교 예배의 실질적인 의미는 약화되었고, 성찬에 구원사적으로 참여했던 예배가 성직자의 행동을 보기만 하는 예배로 퇴화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예배가 형식적인 전례로 전락해버린 것이 중세 말기의 현실이었음을 당시의 역사적인 자료에서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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