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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

다른 표기 언어 Jean-Paul Sart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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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905. 6. 21, 파리
사망 1980. 4. 15, 파리
국적 프랑스

요약 실존주의의 대표적 사상가였던 사르트르는 하이데거와 후설의 영향아래 그 자신의 현상학적 존재론을 전개하였다. 그는 인간이 하나의 실존임을 밝히고 도구와 달리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고 주창했다. 그는 적지 않은 소설과 희곡을 통해 인간의 의식과 자유의 구조를 밝히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사르트르

ⓒ wikipedia | Public Domain

개요

개별적 인간 존재의 자유를 주창하는 철학인 실존주의의 대표적 사상가이다.

1964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되었지만 이를 거절했다.

초기생애와 작품활동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외할아버지 집에서 자랐다.

외할아버지 샤를 슈바이처는 의료 선교사로 유명한 알베르트 슈바이처의 삼촌으로 소르본대학 독문학과 교수였다. 같이 놀 친구를 찾아 파리의 뤽상부르 공원을 배회하던 소년 사르트르는 키가 작았고 사팔뜨기였다. 그의 뛰어난 자서전인 〈말 Les Mots〉(1963)은 어머니와 어린이가 공원에서 자신들을 받아주었으면 하는 헛된 희망을 품고 이런저런 무리에 기웃거리다가 결국 "꿈이 머무는 언덕에 있는" 그들의 아파트 6층으로 돌아가는 모험담을 그리고 있다.

〈말〉은 사르트르를 구해주었다. 사르트르의 끝없는 글쓰기 작업은 자신을 거부한 세계, 그러나 자신의 상상 속에서 재구성될 세계로부터 탈출구였다.

사르트르는 파리에 있는 앙리 4세 리세에 들어갔으나, 얼마 뒤 어머니가 재혼하고 나서는 라 로셸에 있는 리세로 옮겼다. 거기서 그는 유명한 고등사범학교에 입학, 1929년에 졸업했다. 사르트르는 자신이 이름붙인 '부르주아적 결혼'에 저항했지만, 아직 학생이던 시절 시몬 드 보부아르와 결합하여 평생동안 안정된 동반관계를 유지했다.

시몬 드 보부아르의 회고록 〈얌전한 처녀의 회고담 Mémoires d' une jeune fille rangée〉(1958)과 〈나이의 힘 La Force de l'âge〉(1960)은 학생시절부터 50대 중반 때까지 사르트르의 생활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는 고등사범학교와 소르본 대학에서 장차 매우 유명한 문필가가 될 여러 사람을 만났는데, 그중에는 레몽 아롱, 모리스 메를로 퐁티, 시몬 베유, 에마뉘엘 무니에, 장 이폴리트, 클로드 레비 스트로스 등이 있었다.

1931~45년에 사르트르는 르 아브르, 라옹, 마지막으로 파리의 리세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 활동은 2차례, 즉 한번은 베를린에서 1년 동안의 연구생활과 또 한번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기 위해 1939년 징집되면서 중단되었다. 그는 1940년에 포로가 되었다가 1년 뒤 풀려났다.

르 아브르에서 가르치는 동안 〈구토 La Nausée〉(1938)를 출판해서 처음으로 명성을 얻었다.

일기체 형식으로 쓴 이 소설은 로캉탱이란 사람이 사물 세계와 마주치면서, 즉 다른 사람들의 세계뿐만 아니라 바로 그 자신의 신체를 인식하면서 겪는 감정의 급작스런 변화를 묘사한 것이다. 몇몇 비평가는 〈구토〉를 병리학적인 증상으로, 즉 신경증적인 현실도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비평가들은 이 작품이 매우 독창적이고 지극히 개인주의적이며 반사회적인 작품이고, 나중에 전개할 철학적 주제가 담겨 있는 작품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르트르는 독일의 철학자 에드문트 후설로부터 현상학적 방법을 이어받았는데, 이 방법은 연역보다는 주의깊고 편견 없는 기술(記述)을 제안한다.

그는 이 방법을 매우 능숙하게 사용하여 연속적인 세 작품, 〈상상력 L'Imagination〉(1936)·〈감정 이론 개요 Esquisse d'une théorie des émotions〉(1939)·〈상상적인 것:상상력에 관한 현상학적 연구 L'Imaginaire:Psychologie phénoménologique de l'imagination〉(1940)를 썼다. 그러나 뛰어난 재능을 지닌 대가의 면모를 드러낸 작품은 〈존재와 무 L'Être et le néant〉(1943)이다.

그는 인간의식 또는 비사물성(néant 無)을 존재, 즉 객관적 사물성과 대비시킨다(무). 의식은 바로 이 특징 때문에 모든 결정성에서 벗어나 있다. 이 작품의 메시지는 그 모든 내용과 더불어 희망적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노력이란 지금도 앞으로도 쓸모없는 것이라는 끊임없는 여운 때문에 이 작품은 비극적이기도 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작품활동

개인의 자유와 인간의 존엄을 옹호한 사르트르는 사회적 책임이라는 개념에 눈을 돌렸다.

수년 동안 그는 가난한 사람과 온갖 종류의 불이익을 받는 사람에게 큰 관심을 보였다. 그는 교사였지만 넥타이 매기를 거부했다. 넥타이와 더불어 자신의 사회 계급과도 결별하고 노동자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전 작품들에서는 가치있는 특정 목적이나 목표가 필요하지 않은 무상의 활동으로 여겨졌던 자유 자체가 소책자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L'Existentialisme est un humanisme〉(1946)에서는 인간의 투쟁 수단이 되었다. 이제 자유는 사회적 책임을 포함하게 되었다(자유의지). 사르트르는 소설과 희곡으로 세계 만방에 윤리적 메시지를 전하기 시작했다.

그는 1945년 〈자유에의 길 Les Chemins de la liberté〉이라는 4권짜리 소설을 쓰기 시작해서 그 가운데 3권, 즉 〈이성의 시대 L'Âge de raison〉(1945)·〈집행유예 Le Sursis〉(1945)·〈영혼의 죽음 La Mort dans l'âme〉(1949)을 완성했다. 그는 제3권을 출판한 후 의사소통 매체로서 소설의 유용성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바꾸어 희곡으로 돌아갔다.

그에 따르면 작가는 인간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려고 노력해야 한다.

행위하고 있는 인간이야말로 가장 참다운 인간이며, 희곡은 바로 이것을 그린다. 그는 이미 전쟁기간에 이 장르로 글을 썼고 계속해서 〈파리떼 Les Mouches〉(1943 공연)·〈닫힌 방 Huis-clos〉(1944)·〈더러운 손 Les Mains sales〉(1948)·〈악마와 선신(善神) Le Diable et le bon dieu〉(1951)·〈네크라소프 Nekrassov〉(1955)·〈알토나의 유폐자 Les Séquestrés d'Altona〉(1959) 등 희곡작품을 썼다.

인간의 다른 인간에 대한 생경한 적대성을 강조한 이 모든 연극은 지극히 비관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르트르 자신의 고백에 따르면 그 내용은 구원의 도덕이라는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같은 시기의 다른 출판물은 〈보들레르 Baudelaire〉(1947)와 프랑스의 작가이며 시인인 장 주네에 관한 다소 모호한 윤리적 연구서인 〈성(聖) 주네, 희극배우와 순교자 Saint Genet, comédien et martyr〉(1952)가 있고, 그밖에 수많은 글이 사르트르와 보부아르가 창간하고 편집한 월간지인 〈현대 Les Temps Modernes〉에 실렸다.

이 글들은 나중에 〈상황 Situations〉이라는 제목 아래 몇 권으로 묶어졌다.

정치활동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사르트르는 프랑스 정치운동에 적극적 관심을 보였고 공공연하게 좌익으로 기울었다.

또 비록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하지는 않았지만 소련에 대한 열렬한 찬양자가 되었다. 1954년에는 소련·스칸디나비아·아프리카·미국·쿠바 등을 방문했다. 그러나 1956년 부다페스트에 소련 탱크가 진입하면서 공산주의에 대한 희망은 처참하게 짓밟혔다. 그는 〈현대〉에 〈스탈린의 환상 Le Fantôme de Staline〉이란 긴 글을 써서 소련의 침공과 모스크바의 독재에 굴복한 프랑스 공산당을 모두 비난했다.

몇 년이 지나 이러한 비판적 태도 때문에 '사르트르적 사회주의'란 형식이 나타났는데, 이것은 새로운 주요저서 〈변증법적 이성 비판 Critique de la raison dialectique〉(1960)에서 표현되었다. 사르트르는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데 착수했고 소련식 변증법은 살아날 수 없음을 발견했다. 그는 여전히 마르크스주의가 당대의 유일한 철학이라고 믿었지만, 마르크스주의는 화석처럼 굳어졌으며 특정 상황에 적응하는 대신 그 특정 상황을 미리 정해진 보편성에 따라 억지로 짜맞춘다고 인정했다.

그에 따르면 마르크스주의는 그 근본적·일반적 원칙이 무엇이든 다른 구체적 실존상황을 인정하는 법과 인간의 개인적 자유를 존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변증법적 이성비판〉은 빈약한 구성이 문제이지만 지금보다 좀더 관심을 끌 만한 인상적이고 유려한 책이었다. 그는 이 책의 제2권을 기획했다가 포기했다. 대신 〈말〉을 출판할 준비를 했는데, 이 책이 1964년 노벨 문학상을 받게 된 것을 알고는 수상을 거부했다.

만년

1960~71년 주로 〈플로베르 Flaubert〉란 제목의 4권으로 예정된 저서를 쓰는 데 관심을 쏟았다.

2,130쪽에 달하는 2권은 1971년에 출간되었다. 이 방대한 기획은 유명한 프랑스 소설가인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총체적 전기'를 제시하려는 것이었는데, 그는 여기서 2가지 수단, 즉 카를 마르크스의 역사 및 계급 개념과 지크문트 프로이트의 방법을 사용했다. 프로이트의 방법은 어린시절과 가족관계를 해명함으로써 인간 정신의 어두운 구석을 조명하는 것이다.

때때로 사르트르의 천재성이 곳곳에 나타나고 박식함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넘치지만, 어마어마한 분량과 플로베르의 하찮은 말들에 대한 극히 미세한 묘사 때문에 이 책을 아주 즐겁게 읽기는 힘들다. 사르트르 자신이 그 저작의 지나친 분량에 짓눌려 1971년에는 거의 쓰지 않았다. "참여는 행위이지 말이 아니다"란 신념으로 사르트르는 폭동, 좌익 문학활동, 그밖에 '혁명'을 촉진한다고 생각한 활동에 참여하기 위해 자주 거리로 뛰쳐나갔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같은 급진적인 사회주의자가 1972년 〈플로베르〉의 제3권 〈집안의 천치 L'ldiot de la famille〉를 출판했는데, 이 책도 부르주아 지식인만이 읽을 수 있는 또 하나의 어려운 책이었다.

사르트르의 엄청난 필력(筆力)은 이무렵 고갈되고 있었다.

그의 정신은 여전히 기민하고 적극적이어서 인터뷰를 하고 영화 시나리오를 썼으며 윤리학에 관한 책도 썼다. 그러나 그는 더이상 충실한 생산성을 지닌 비상한 위력을 펼칠 수 없었다. 눈이 멀고 건강이 악화되어 1980년 4월 폐암으로 죽었다. 약 2만 5,000명이 참석하여 매우 성대하게 치러진 그의 장례식은 빅토르 위고의 장례식을 연상시키는 것이었지만, 그의 훌륭한 선임자 위고가 받았던 국장(國葬) 승인은 없었다. 그곳에 참석한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이었고, 사르트르가 항상 그의 글로써 권리를 지켜준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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