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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21. 12. 12, 프랑스 루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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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880. 5. 8, 크루아세 |
국적 | 프랑스 |
요약 프랑스 사실주의 문학의 창시자로 여겨지며, 걸작 〈보바리 부인〉으로 유명하다. 당대 부르주아 계층의 생활을 사실주의적으로 묘사한 이 소설은 사회 풍속을 해쳤다는 이유로 법정에 고발되기도 했다.
개요
프랑스 사실주의 문학의 창시자로 여겨지며, 걸작 〈보바리 부인 Madame Bovary〉(1857)으로 유명하다.
당대 부르주아 계층의 생활을 사실주의적으로 묘사한 이 소설은 사회 풍속을 해쳤다는 이유로 법정에 고발되기도 했다.
초기생애 및 작품
아버지 아실 클레오파스 플로베르는 상파뉴 출신으로, 루앙 시립병원의 수석 외과의사이자 임상교수였다.
어머니는 노르망디 지방 퐁레베크 출신인 의사의 딸로, 친정은 지방의 부르주아지답게 대대로 저명한 사법관을 배출한 집안이었다. 귀스타브 플로베르는 학교에 다닐 때 이미 작가생활을 시작하여, 1837년에 〈콜리브리 Le Colibri〉('벌새'라는 뜻)라는 작은 잡지에 첫 작품을 발표했다. 그는 젊은 철학가인 알프레드 르 푸아트뱅과 일찍부터 친구가 되어 그의 염세주의적 견해에 강한 영향을 받았다.
또한 아버지의 직업 때문에 접촉하게 된 저명한 외과의사들이나 병원, 수술실, 해부학 교실 같은 남다른 주변환경에서도 그에 못지않은 강한 영향을 받으면서 플로베르의 지성은 전반적으로 활발해졌다. 그는 기존의 선입견들을 몹시 싫어하여 재미 삼아 그런 개념들을 모은 '사전'을 편찬할 계획까지 세웠다. 그는 르 푸아트뱅과 함께 '가르송'(소년)이라는 기괴한 가공 인물을 창조하여, 천박하게 여겨지는 견해는 모조리 가르송 탓으로 돌렸다.
플로베르는 '부르주아'를 싫어했는데, 그가 말하는 부르주아란 '천박한 사고방식을 가진 모든 사람'을 의미했다.
1841년 11월 플로베르는 파리대학 법학부 학생으로 등록했다. 그러나 22세 때 그는 신경병이라는 진단을 받았는데, 특이한 증상은 나타나지 않았지만 이 병은 간질로 해석되었다. 이 때문에 그는 법률 공부를 포기했고, 그결과 모든 시간을 문학에 할애할 수 있었다. 1846년 1월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같은 해 3월에는 사랑하던 누이 카롤린이 딸을 낳다가 죽었다.
그러자 플로베르는 어머니와 함께 갓난 조카딸을 데리고 루앙 근처의 센 강변에 있는 크루아세의 영지로 은퇴했다. 그는 이곳에서 여생의 대부분을 보냈다. 1846년 7월 파리를 방문했을 때, 플로베르는 조각가인 잠 프라디에의 화실에서 루이즈 콜레라는 시인을 만났다. 루이즈는 그의 정부가 되었지만 그들의 관계는 순탄하지 못했다. 그의 자기방어적인 독립심과 루이즈의 질투심 때문에 두 사람의 결별은 불가피했고, 결국1855년에 헤어졌다.
1847년에 플로베르는 법학도 시절에 알게 된 작가 막심 뒤 캉과 함께 루아르 강과 브르타뉴 해안을 따라 도보 여행을 했다.
그들은 '들판과 해안을 가로지르는' 이 여행을 하면서 함께 일기를 썼는데, 이 일기 가운데 플로베르가 쓴 부분은 그의 사후에 〈들판을 건너고 모래밭을 지나 Par les Champs et par les grèves〉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이 책에는 샤토브리앙의 가족 영지인 콩부르를 방문한 일에 대한 묘사를 비롯해서 그의 가장 훌륭한 글들이 들어 있다.
원숙기
플로베르가 원숙기에 쓴 작품의 일부는 그가 초기에 쓰려고 했던 주제를 다루고 있다.
예를 들면 16세 때 그는 엘리자 술레젱제에 대한 파괴적인 열정을 자세히 기술한 〈한 광인의 회고록 Mémoires d'un fou〉 원고를 완성했다. 그가 1836년에 만난 엘리자는 그보다 11세나 연상인 악보 출판업자의 아내였다. 그는 엘리자가 남편을 여의고 과부가 된 35년 뒤에야 비로소 이 열정을 엘리자에게 털어놓았다. 엘리자는 플로베르의 장편소설 〈감정교육 L'Éducation sentimentale〉 에 나오는 마리 아르누의 모델이 되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원고 상태에서 2차례나 개작되어, 전혀 다른 형태의 작품인 〈11월 Novembre〉(1842)·〈감정교육〉(1843~45)이라는 제목의 예비 초고를 거친 뒤에야 비로소 명확한 형태를 얻게 되었다. 한 단계를 거칠 때마다 작품은 7월왕정 치하의 프랑스를 묘사한 방대한 개관으로 확대되었다. 조르주 소렐은 1851년의 쿠데타를 앞둔 시대를 연구하는 역사학도라면 누구나 반드시 이 책을 읽어야 한다고 말했다.
〈성 앙투안의 유혹 La Tentation de Saint Antoine〉 역시 집요하게 완벽성을 추구한 또 하나의 보기이다.
플로베르는 결과에 결코 만족하지 않고, 한번 다루었던 주제로 끊임없이 되돌아가곤 했다. 그가 1839년에 쓴 〈스마르 Smarh〉는 프랑스 문학에 괴테의 〈파우스트 Faust〉 같은 작품을 선사하겠다는 대담한 야망의 첫번째 산물이었다. 그는 1846~49, 1856, 1870년에도 다시 이 주제를 다루었고, 1874년에 마침내 〈성 앙투안의 유혹〉이라는 제목으로 세상에 내놓았다.
같은 주제를 다룬 이 4개의 변형은 작가의 사상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어떻게 변모했는가를 보여준다. 1849년에 쓴 작품은 스피노자 철학의 영향을 받아 허무주의적 결론을 맺고 있다. 2번째 변형은 첫번째보다는 형식이 덜 산만하지만, 내용은 사실상 똑같다. 3번째 유형은 첫번째와 2번째에는 존재하지 않는 종교적 감정에 대한 존중을 보여준다. 그 사이에 플로베르는 허버트 스펜서의 책을 읽고 미지의 세계에 대한 스펜서의 개념과 자신의 스피노자 철학을 조화시켰기 때문이다.
그는 과학과 종교가 서로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사상의 두 기둥이라고 믿게 되었다. 세상에 발표된 4번째 변형은, 〈부바르와 페퀴셰 Bouvard et Pécuchet〉가 수많은 잘못을 과학의 영역에 포함시켰듯이 많은 잘못을 미지의 세계에 포함시켰다.
1849년 11월부터 1851년 4월까지 플로베르는 막심 뒤 캉과 함께 이집트·팔레스타인·시리아·터키·그리스·이탈리아 등지를 여행했다. 그러나 여행을 떠나기 전에 그는 〈성 앙투안의 유혹〉을 완성하여 친구이자 시인인 루이 부예와 뒤 캉에게 보여주고, 그들의 진지한 의견을 듣고 싶었다.
1849년 9월에 그는 3일 동안 그들에게 원고를 읽어주었고, 그들은 그 작품을 무자비하게 비판했다. "불 속에나 던져버리고, 그 작품 얘기는 두 번 다시 꺼내지도 말게" 라고 하고 한마디 더 충고했다. "자네의 뮤즈는 빵과 물만으로 만족해야 돼. 그러지 않으면 과장된 감정이 그 여신을 죽일 거야. 발자크의 〈가난한 부모 Parents pauvres〉처럼 현실적인 소설을 쓰게. 예를 들면 들라마르의 이야기라든가……."
외젠 들라마르는 아내인 델핀(결혼 전 성은 쿠튀리에)에게 속아서 파산한 뒤, 슬픔 때문에 죽은 노르망디의 시골 의사였다.
이 이야기는 사실 〈보바리 부인〉의 줄거리지만 그 소설의 유일한 원천은 아니다. 또다른 원천은 가브리엘 를뢰가 1946년에 루앙 도서관에서 발견한 〈뤼도비카 부인의 회상록 Mémoires de Mme Ludovica〉 원고였다. 이 원고는 조각가 잠 프라디에의 아내인 루이즈 프라디에(결혼 전 성은 다르세)가 자신의 모험과 불행을 직접 구술한 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루이즈 프라디에가 엠마 보바리처럼 자살하지 않는다는 점만 빼고는 엠마 보바리의 내력과 거의 비슷하다.
플로베르는 직업적 호기심 때문만이 아니라 친절한 마음 때문에 '부르주아'가 루이즈 프라디에를 타락한 여인으로 배척한 뒤에도 루이즈를 계속 지켜보았고, 루이즈는 자신이 구술한 그 색다른 원고를 플로베르에게 준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플로베르는 캐묻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엠마 보바리의 모델이 누구냐고 물었을 때, '보바리 부인은 나 자신'이라고 대답했다.
1837년에 이미 그는 엠마 보바리와 비슷한 여주인공 마자가 등장하는 단편소설 〈열정과 미덕 Passion et vertu〉을 썼다. 〈보바리 부인〉을 위해 그는 간통이라는 흔해빠진 소재를 채택했고, 이 소설은 그 심오한 인간애 때문에 앞으로도 영원히 읽힐 책이 되었다. 플로베르는 이 장편소설을 쓰는 동안 "내 가엾은 보바리는 바로 이 순간에도 프랑스의 수많은 마을에서 괴로워 울고 있다"라고 말했다. 〈보바리 부인〉은 그 무자비한 객관성으로 인해 문학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플로베르가 말하는 객관성은 등장인물의 심리상태를 분명히 밝혀주고 그들이 소설 줄거리의 논리적 전개에서 맡는 역할을 설명해줄 수 있는 모든 특징이나 사건을 냉정하게 기록하는 것을 의미했다. 〈보바리 부인〉은 작가에게 5년 동안의 힘겨운 작업을 요구했다. 〈르뷔 드 파리 Revue de Paris〉를 창간한 뒤 캉은 작품을 서둘러 끝내라고 재촉했지만 플로베르는 서두르지 않았다.
〈시골의 관습 Mœrs de province〉이라는 부제를 갖고 있는 이 소설은 결국 1856년 10월 1일부터 같은 해 12월 15일까지 〈르뷔 드 파리〉에 연재되었다. 그후 프랑스 정부는 이 소설이 부도덕하다는 이유로 작가를 기소했고, 1857년 1~2월 계속된 재판에서 플로베르는 겨우 유죄판결을 면할 수 있었다. 이 법정은 그로부터 6개월 뒤에 똑같은 혐의로 기소된 시인 샤를 보들레르에게 유죄판결을 내렸다.
〈보바리 부인〉에서 부르주아지의 지루한 세계에 오랫동안 전념했던 플로베르는 기분을 새롭게 하기 위해, 〈살랑보 Salammbô〉를 쓰기 시작했다.
고대 카르타고를 다룬 이 소설에서 그는 BC 240~237년 카르타고에서 일어난 용병들의 반란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하여 완전한 가공 인물인 하밀카르의 딸 살랑보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묘사하고 있다. 그가 그리스 역사가 폴리비오스의 무미건조한 기록을 화려하고 시적인 산문으로 바꾼 것은 셰익스피어가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 Antony and Cleopatra〉에서 플루타르코스의 서술을 서정적인 묘사로 바꾼 것과 비슷하다.
〈심장들의 성 Le Château des cœurs〉이라는 희곡은 1863년에 완성되었지만, 1880년에야 출판되었다.
말년
1870년에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이 일어나기 몇 개월 전에 발표된 〈감정교육〉은 그 가치를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고, 플로베르는 몹시 실망했다.
〈연약한 성 Le Sexe faible〉·〈지망자 Le Candidat〉라는 2편의 희곡 역시 전혀 성공을 거두지 못했지만, 〈지망자〉는 1874년 3월에 4번 공연되었다. 게다가 경제적인 어려움도 그의 말년을 슬프게 했다. 1875년에는 조카딸 카롤린의 남편인 목재수입업자 에른스트 코망빌이 빚더미에 올라앉게 되자, 플로베르는 그를 파산에서 구하기 위해 자기 재산을 내놓았다. 플로베르는 조르주 상드, 이반 투르게네프 에밀 졸라, 알퐁스 도데, 특히 그의 친구 알프레 르 푸아트뱅의 누이인 로르의 아들이며 플로베르의 제자를 자처한 기 드 모파상 등 젊은 소설가들과 나눈 우정과 일에서 위안을 찾았다.
플로베르는 쓰고 있던 장편소설 〈부바르와 페퀴셰〉를 잠시 중단하고, 〈3편의 이야기 Trois Contes〉를 썼다.
〈3편의 이야기〉는 충직한 한 하녀의 단조롭고 소박한 생활을 다룬 〈순박한 마음 Un Cœur simple〉·〈수도사 성 쥘리앵의 전설 La Légende de Saint Julien I'Hospitalier〉·〈헤로디아스 Hérodias〉라는 3편의 단편소설로 이루어져 있다. 이 책은 다양한 주제를 통해 플로베르의 재능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으며, 그의 대표작으로 간주되는 경우도 많다.
〈부바르와 페퀴셰〉의 주인공은 유산을 받아 함께 시골로 은퇴하는 2명의 서기이다.
그들은 여가를 어떻게 이용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성공할 수 없는 실험을 거듭하면서 바쁘게 보내고, 과학 영농과 고고학, 화학 및 역사 기술에 몰두하는가 하면, 버림받은 아이를 돌보기도 한다. 그들이 책에서 얻은 하찮은 지식은 그들의 판단력 부족을 상쇄해주지 못하기 때문에, 모든 일이 잘 되어가지 않는다. 플로베르가 끝내 완성하지 못하고 그가 죽은 뒤에야 출판된 〈부바르와 페퀴셰〉를 과학의 가치에 대한 부인으로 간주한 비평가들은 이 책의 심오한 의미를 터무니없이 오해한 것이다.
사실상 플로베르가 규탄한 것은 '과학만능주의'로, 과학을 그 자체의 영역에서 끌어내고, 동인(動因)과 목적인(目的因)을 혼동하고, 피상적인 현상조차도 파악하지 못하면서 근본 원리를 이해한다고 확신하는 관행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부바르와 페퀴셰는 공허한 말에 도취해 있다가 대파국이 그들의 모든 노력을 덮칠 때에야 비로소 꿈에서 깨어난다.
플로베르는 그들을 바보로 묘사했다는 비난을 받았지만, 실제로는 그들에 대한 동정심을 표현하고 있다. "그들은 동정받을 만한 자격을 갖고 있다. 그들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인식하고, 더이상 그것을 참지 못한다. 그들은 끝없는 탐구심을 통하여 이해력을 키운다. 그들은 더 많은 생각을 가졌기 때문에 더욱 괴로웠다" 따라서 플로베르의 풍자는 어느 정도는 그가 슬픈 마음으로 이야기하는 자기 체험의 역사이다.
플로베르는 뇌졸중 발작으로 갑자기 죽었다.
그가 죽었을 때, 책상 위에는 미처 채우지 못한 원고와 〈부바르와 페퀴셰〉의 제2부를 쓰기 위한 초고가 놓여 있었다. 이 초고를 보면, 실험에 지친 부바르와 페퀴셰가 서기로 일할 때 했던 일, 즉 서류를 정서하고 베끼는 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그들이 베끼기로 한 것이 무엇이냐가 플로베르의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초고의 주제였다. 플로베르는 그것을 인용문의 발췌나 소화집(笑話集), 또는 어리석은 말들을 모은 선집으로 할 계획이었다. 플로베르가 남긴 초고는 나중에 모아져 책으로 묶여 나왔지만, 이 신랄한 결론이 어떤 형태를 취할 것인지는 플로베르의 초안에서도 아직 결정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었기 때문에 이 결론에 대해서는 그동안 많은 논쟁이 벌어졌다.
창작방식
플로베르가 예술에서 이르고자 한 목적은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생각은 그가 진실을 묘사할 때 도덕적 문제나 사회적 쟁점을 압도하는 경우가 많다. 그는 천천히 신중하게 일했고, 일하는 동안 그 자신의 예술에 대한 생각은 점점 더 엄밀해졌다. 그가 〈보바리 부인〉을 쓰고 있을 때 루이즈 콜레에게 보낸 편지들은 그의 태도가 어떻게 바뀌었는가를 보여준다. 그의 야망은 '운문처럼 율동적이고, 과학 언어처럼 정확한'(1852년 4월 24일의 편지) 문체를 완성하는 것이었다(운율학). '말이 생각에 더 빨리 달라붙을수록, 결과는 더욱 아름다워진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동의어 따위는 존재하지 않으며, 작가가 자신의 생각을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오직 하나뿐인 올바른 낱말'을 찾아내야 한다는 말을 자주 되풀이했다. 그러나 동시에 플로베르는 그의 산문이 독자의 지성에 호소할 뿐 아니라 마치 음악처럼 잠재의식에도 호소하여, 액면 그대로의 낱말 뜻만이 아니라 그보다 좀더 감동적인 효과를 거둘 수 있도록, 그의 산문을 이루는 음절들이 아름다운 가락과 조화로운 화음을 갖기 원했다.
그에게는 글을 쓰는 것이 문자 그대로 고통이었다. 플로베르는 글에서 다른 무엇보다도 객관성을 추구했다. "작가는 작품에서 우주의 신처럼 어디에나 존재해야 하지만, 어디에서도 눈에 띄면 안 된다" 따라서 그의 모든 작품에서 그의 성격이 그토록 뚜렷이 나타나고, 그가 친구들에게 보낸 격식을 차리지 않고 쾌활하고 거친 표현과 더불어 거짓 없는 솔직함, 섬세한 감정과 우아한 부드러움으로 가득 찬 편지가 일부 비평가들에게 그의 걸작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음은 역설적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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