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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BC 6세기말에서 4세기초경 동북인도에서 창시된 종교가 일본에 전파되어 독특하게 발전된 종교.
일본불교는 한국과 베트남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로 중국불교의 테두리 안에서 전개되었다.
일본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6세기초 백제를 통해서였다. 당시 일본은 백제와 친밀한 문화적 교류를 하고 있었으며 552년(긴메이[欽明] 덴노 13) 백제 성왕(聖王)은 불상과 을 보내 불교를 받아들일 것을 권했다고 한다. 당시 일본 조정에는 새로운 종교를 지지하는 파와 반대하는 파의 대립이 있었으나 우여곡절 끝에 왕실과 귀족들 간에 수용되었다. 특히 스이코[推古] 덴노의 섭정이었던 쇼토쿠[聖德] 세자 594년 삼보흥륭(三寶興隆)의 칙서를 내리고 17개조헌법을 제정해서 불교의 국가적 숭앙을 촉구함으로써 일본 불교의 초석을 놓았다.
쇼토쿠 태자는 불교에 의해 씨족간의 갈등을 해소하고 강력한 중앙집권적 국가를 형성하고자 했던 것이다. 불교의 보급은 또한 발달된 대륙문화의 수입을 뜻하기도 했다. 그는 스스로도 여러 경전을 연구하여 〈유마경〉·〈승만경〉·〈법화경〉에 대한 주석서를 지은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일본 불교의 지식층은 대부분 고구려와 백제로부터 건너간 한국 승려들이었으며, 그들 가운데는 혜총·혜자와 같이 쇼토쿠 태자의 스승이 된 사람도 있었다. 이들 한국 승려들과 중국에 유학한 일본 승려들에 의해 7세기 일본에는 〈삼론〉·〈성실론 成實論〉·〈구사론〉의 연구를 주로 하는 학파들이 각각 세워졌으며 중국의 법상종도 들어와서 강력한 교단을 형성하게 되었다.
나라 시대[奈良時代:710~784]에는 화엄종도 수입되어 이른바 남도육종(南都六宗)의 성립을 보게 되었다.
즉 율종·구사종·성실종·삼론종·법상종·화엄종으로서 주로 학승들이 경전과 교리를 연구하며 국가의 평안을 기원하는 통제된 국교적 성격을 띤 불교였으며 민간포교활동은 허락되지 않았다. 그 가운데서 율종·법상종·화엄종이 가장 영향력 있는 교단을 형성했으며 현재까지도 남아 있다.
특히 도다이 사[東大寺]를 본거지로 한 화엄종은 나라 시대의 불교를 대표하다시피 했다. 도다이 사에 안치된 대불(大佛) 비로자나불상(毘盧遮那佛像)은 나라 불교의 상징으로서 우주만물에 편재해 있는 법신불의 세계와 사사무애의 법계를 나타내고 있다.
교토[京都]로 수도를 옮긴 헤이안 시대[平安時代:794~1185]에는 중국으로부터 천태종과 진언종(眞言宗)이 들어와서 일본불교의 주류를 형성하게 되었다.
천태종은 사이초[最澄:767~822]에 의해 수입되었으며, 히에이 산[比叡山]에 자리를 잡고 대승 계단을 설치하고 나라를 위한 승려들의 훈련에 힘썼다. 사이초는 천태종뿐만 아니라 율·진언밀교·선 등도 들여왔기 때문에 일본 천태종은 매우 융합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신·구·의 3업을 통해 즉신성불(卽身成佛)을 목적으로 하는 진언종은 사이초와 함께 당에 갔던 구카이[空海:774~835]에 의해 도입되어 고야 산[高野山]에 자리를 잡았다.
진언종은 물론 성불을 목적으로 하나 현세 이익을 추구하는 기복적 성격이 강했으며 귀족들 사이에 매우 인기가 있었다. 천태와 진언은 모두 현세적 성격이 강한 일본의 토착신앙인 신도(神道)와 습합된 형태로 공존했다.
헤이안 시대 말기에는 극심한 사회적 혼란을 겪는 가운데 말법사상이 유행했으며, 종래의 융합적 성격을 띤 불교를 배척하고 오로지 하나의 구원의 길만을 선택해서 따르려는 전수(專修)운동이 강하게 일기 시작했다. 이러한 경향은 무사들이 지배하는 가마쿠라 시대[鎌倉時代:1192~1333]에 들어오면서 더욱 강화되어 새로운 종파들이 출현했으며, 일본불교의 특이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가마쿠라 시대에 성립된 이러한 전수 불교적 종파들을 남도육종이나 천태종과 진언종으로부터 구별하여 신불교(新佛敎)라 부르기도 한다.
전수 불교의 가장 대표적인 사람은 전수 염불을 주창한 호넨[法然:1132~1212]으로서, 오직 진실한 마음으로 아미타불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정토에 왕생한다는 단순한 신앙운동을 전개하여 많은 대중적 호응을 얻었으며 일본 정토종(淨土宗)의 원조가 되었다.
호넨의 제자들 가운데는 염불의 행(行)을 중시하느냐 아니면 아미타불의 본원을 믿는 믿음(信)을 중시하느냐에 대한 문제로 대립이 발생한 가운데 믿음을 중시하는 신란[親鸞:1173~1263]의 출현과 함께 정토진종(淨土眞宗)이라는 새로운 종파가 성립되었다.
신란은 신(信)의 일념이 발생하는 순간 정토왕생이 결정되며, 염불은 단지 아미타불의 은총에 대한 보은의 행위일 뿐임을 강조했다.
그는 믿음도 염불의 행도 모두 아미타불의 회향(廻向)의 힘에 의한 것이지, 자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순수타력신앙을 강조했다. 따라서 계율의 준수도 필요없게 되었으며 신란과 그의 제자들은 자유로이 결혼을 하게 되었다. 현재 정토진종은 일본불교의 최대 종단을 형성하고 있다.
가마쿠라 시대에는 또한 매우 투쟁적인 승려 니치렌[日蓮:1222~82]이 등장하여 니치렌 종[日蓮宗]을 개창했다.
그는 〈법화경〉 신앙을 고취했으며 염불을 모방하여 법화경의 이름을 부르는 창제행위(南無妙法蓮華經)로써 구원받을 수 있다는 대중적인 신앙을 전파했다. 소카갓카이[創價學會] 등 전후 일본에 출현한 신흥 종교들은 니치렌 종 내지 법화신앙 계통에서 파생한 것들이 많다. 가마쿠라 시대에는 중국으로부터 선불교의 종파들도 수입되었다. 에이사이[榮西1141~1215]는 임제종(臨濟宗), 그리고 도겐[道元:1200~53]은 조동종(曹洞宗)을 개창했다.
선불교와 함께 일본 중세에는 다도·서도·하이쿠[俳句:17음절의 짧은 시] 등이 유행했으며 선은 일본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상의 가마쿠라 신불교의 지도자들은 모두 천태종에 몸담고 있던 승려들이었으나 기성 교단에 불만을 품고 새로운 불교 운동을 일으켰던 것인데, 그들에 의해 수립된 종파들은 가마쿠라와 아시카가 시대[足利時代:1338~1573]를 통하여 급성장했고, 오늘날에는 천태종과 진언종을 누르고 일본 불교의 대종을 이루고 있다.
도쿠가와 시대[德川時代:1603~1867]에는 그리스도교를 추방하기 위해 불교를 국교로서 보호했기 때문에 각 종파의 교단조직이 정비되고 교학도 다듬어졌으나 종교적 창의성과 역동성은 없었다.
메이지 시대[明治時代:1868~1912]가 되어 국왕을 중심으로 한 국수주의가 대두하면서, 신도(神道)와 불교를 분리시키고 불교를 배격하는 운동이 전개됨에 따라 불교는 국교적 위치를 상실하고 침체기에 들어갔으며, 메이지 정부의 명에 따라 승려들의 대처(帶妻)가 일반화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서유럽의 근대적 불교 연구 방법이 도입되어 산스크리트·팔리어·티베트어 불전에 대한 연구와 불교사의 연구가 크게 발전하기 시작했다. 일본불교는 전반적으로 종파적 성격이 매우 강하고 종파의 개조에 대한 숭배가 성하며 계율준수의 전통이 사라져 승려들은 대부분 결혼을 하고 사찰들도 대다수 대를 이어 운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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