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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집(結集)과 근본분열
석존의 생존시에 승가 내에 교리나 수행상의 문제가 발생한다 하더라도 언제나 그의 권위 있는 가르침에 의존할 수 있었기 때문에 승가의 화합은 심각한 도전을 받지 않았다.
석존은 그의 높은 인격과 카리스마로 인해 승가의 절대적 귀의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스스로를 교단의 우두머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누구도 그러한 역할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석존은 그의 종형제였던 데바닷타가 자신을 교단의 우두머리로 세워달라는 요청을 거부했다. 그러나 석존은 사후 승가의 화합문제가 발생할 수 있음을 예견했던 것 같다.
석존의 마지막 날들의 행적에 대하여 상세히 전하고 있는 〈대반열반경〉에 의하면 석존은 사후 자신이 가르쳐준 법과 율을 스승으로 삼을 것을 부촉했다고 한다. 그러나 문제는 석존의 입적 후 그의 교설에 관한 상이한 이해와 전승이 생기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승가는 곧 석존의 교설내용을 확정지을 필요를 느꼈으며, 이를 위해 승가의 대표자들이 모여 이른바 결집회의를 개최하게 된 것이다. 결집이란 석존의 가르침을 모인 사람들이 합송(合誦 saṁgῑtῑ)하여 확인하는 행위로서 제1차 결집은 500명의 아라한(阿羅漢:수행을 완성한 자)들이 모여 가섭의 주재로 열렸다고 한다.
이때 석존의 교법은 그를 항시 가까이 모시고 있던 아난다에 의해 암송되었으며 율은 계율에 정통한 우파리에 의해 송출되었다고 한다. 물론 이들에 의해 송출된 법과 율이 지금의 팔리어 장경이나 한역 대장경에 들어 있는 형태의 경과 율의 내용을 완전히 갖춘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고 다만 그 근본적인 사상만이 간단한 단문이나 게송(偈頌) 형태로 읊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지금의 경과 율은 오랜 기간에 걸쳐 내용이 확장되면서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경·율·논(論)을 일컬어 삼장(三藏)이라 부르지만 그 가운데 논장을 구성하는 논서들은 경이나 율보다 훨씬 후에 형성된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결집으로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석존의 가르침의 내용뿐만 아니라 그 해석을 둘러싸고도 이론(異論)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불교가 지역적으로 중인도를 중심으로 해서 서쪽과 남쪽으로 확장되고 비구승의 수도 많아지게 됨에 따라 계율의 실천문제를 둘러싸고 대립이 생겨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팔리어 율장에 의하면 석존의 입적 후 100경에 야사(Yaśa)라는 비구가 당시 상업적으로 번창하고 있던 도시 바이샬리에 갔다가 그 지방 비구들이 신자들로부터 금·은 등을 보시받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 이의를 제기했으나 오히려 그들로부터 빈축을 사게 되자 그 지방 서쪽 지역에 있는 비구들에게 도움을 청한 결과 700명의 비구들이 모여 회의를 개최했다고 한다.
이 회의에서 계율의 엄격한 준수를 요구하는 비구들은 바이샬리 비구들이 행한 10개 사항(十事)을 심의하여 불법임을 판정했다고 한다. 여기까지가 율장이 전하는 바이나 실론의 사서 〈도사(島史) Dῑpavaṃsa〉에 의하면 그 회의의 결정에 승복하지 않은 수많은 비구들이 따로 모여 대중부(大衆部)라는 파를 형성함으로써 승가는 보수적인 상좌부(上座部)와 대중부로 분열되었다고 한다.
이것을 그후 다시 양파로부터 일어난 분열들과 구별하기 위하여 근본분열이라 부른다. 바이샬리 비구회의는 십사의 심의가 목적이었지만 〈도사〉에 의하면 레바타(Revata)를 수좌로 한 700명의 장로들에 의해 다시 한번 석존의 계율에 대한 결집이 이루어졌다고 하기 때문에 이것을 제2차 결집이라 부른다. 실론의 전승에 의하면, 아소카 왕 때 제3차 결집이 있었다고 하나 오늘날 많은 학자들은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부파불교의 전개와 사상
실론의 〈도사〉에서는 근본분열이 있은 후 100년 동안 지말분열(支末分裂)이 일어나 대중부·상좌부로부터 18부파가 생겨 도합 20부파가 성립되었다고 한다.
이것이 모두 아소카 왕의 통치 이전이라고 하나 아소카 왕이 선교사들을 인도 각지에 파견한 일이나 당시 승가 내에 분쟁이 있음을 못마땅하게 여겼다는 사실들로 보아 아소카 왕 때까지만 해도 승가는 비교적 단합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며 지말분열은 아소카 왕 이후에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여하튼 불교는 마우리아 왕조의 아소카 왕의 즉위(BC 270경) 전부터 이미 인도 전역으로 확산되어 가고 있었으나 왕의 지원 아래 더욱더 번창하게 되었다.
승가의 지말분열은 이와 같은 불교의 양적 팽창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소카 왕은 즉위 8년이 지나 인도 동쪽의 칼링가라는 지방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비참한 고통을 주게 된 것을 뉘우치고 독실한 불교도가 되었다. 그로부터 그는 폭력에 의한 정복 대신 법에 의한 정복(dhammavijayā)을 정치이념으로 추구했으며, 인도는 물론 실론·시리아·이집트·마케도니아 등의 국왕들에게 사신을 보내어 불법을 전파했다.
그는 암벽이나 석주에 자신의 정책과 불교의 윤리적 가르침을 담은 칙령을 새겨서 당시뿐만 아니라 후대에까지 전하게 했다. 그는 불교 이외의 교단들도 지원했지만 특히 불교 승가에 많은 물질적 지원을 했으며, 석존의 유적지들을 참배하고 수많은 불탑을 건립하기도 했다. 아소카 왕의 사후 마우리아 왕조는 얼마 가지 않아 멸망했지만 불교의 역사를 통해 그는 불법에 의한 선정을 베푼 가장 이상적인 군주로서 추앙되어왔다. 근본분열 이후 18개의 지말분열이 어떻게 발생했는지 그 역사적 과정을 정확히 알기는 매우 어려우나, 아소카 왕의 불교에 대한 지원 이후 승가가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지고 지역적으로 확장되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석존의 교설 자체에 후세 사람들의 오해와 논란을 일으킬 만한 점들이 없지 않았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경제적으로 안정된 사원에 거주하는 수도승들 가운데는 불법을 이해하는 데 있어 석존이 설한 것 이상으로 복잡하고 까다로운 이론을 발전시키는 현학적이고 사변적인 태도가 등장했으며 석존의 교리에 대한 이해를 둘러싸고 갖가지 철학적 입장이 정립되게 되었다. 각 부파들은 자신의 입장을 밝히는 논서를 만들었으며 이러한 논서들은 결국 논장(論藏)을 형성하게 되었다. 논을 뜻하는 '아비달마'(abhidharma)라는 말은 '다르마', 즉 석존의 교설을 분류·분석하는 연구를 뜻하는 말로서 논의 원초적 형태는 이미 경들 속에서 발견되고 있었으나 부파불교의 전개와 더불어 본격적인 논서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석존의 교설 가운데 부파간의 철학적 견해 차이를 보이게 한 문제들은 주로 무아설(無我說)과 업보에 관한 문제, 인간존재를 구성하는 요소들인 법(dharma)의 수와 종류 및 본성에 관한 이론, 그리고 불타관이었다.
석존은 인간존재 및 경험세계를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이라는 제요소들로 구성된 존재로 보았으며 이러한 제요소들 자체가 인간존재이지 그것들을 소유하고 있는 항구불변의 자아란 따로 존재한다고 보지 않았다. 부파불교는 인간을 이렇게 분석적으로 보는 견해를 더욱 발전시켜 12처(處), 18계(界), 72법(法) 등 다양한 법에 관한 이론을 전개했다. 여기서 법이란 석존의 교설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 및 경험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기본적인 요소들을 가리킨다. 법에 관한 가장 체계적인 이론을 전개한 부파는 상좌부로부터 분리되어나온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간단히 有部라고 함)였다.
유부는 인간존재를 구성하는 요소들로서 조건에 따라 생멸하는 무상한 유위법(有爲法) 72법을 들고 있으며, 열반 등 조건에 따라 생기지 않는 영원한 법인 무위법(無爲法) 3법을 들고 있다. 유부에 의하면, 모든 법은 고유의 자상(自相)과 자성(自性)을 지니고 있으며 과거·현재·미래 3세를 통하여 실체로서 항존한다고 한다(三世實有法體恒有). 제법의 작용은 현재세에 찰나적으로 생멸하지만 법의 본체는 3세에 걸쳐 항존한다는 이론으로서 모든 유위법의 무상함을 가르치는 석존의 설을 계승하면서도 우리가 범하는 업의 실재성을 어떤 형태로든 인정하려는 입장을 취했다.
그래야만 이미 지은 업이 초래하는 과보를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후에 전개된 대승불교는 유부의 이와 같은 철학적 입장을 아공법유(我空法有), 즉 인간의 자아는 존재하지 않으나 인간을 구성하는 법들은 실재한다는 이론으로 규정한다. 그런가 하면 논서들의 권위를 부정하고 오직 경에만 의지할 것을 주장하는 경량부(經量部)에서는 모든 법은 찰나에 생멸하는 것으로서 오직 현재에만 존재하는 것이며 과거와 미래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여 법의 실체성을 부정하고 모든 유위법의 무상성을 강조했다.
한편 석존의 무아설은 윤회와 업보의 사상과 조화시키기 어렵다는 생각을 낳게 되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이론들이 제시되었다.
만약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 모두 순간적이고 무상한 법들뿐이며 어떠한 항구한 것도 없다면 내가 지은 업은 어디에 존재하며 누구에 의해 그 과보를 받게 되는 것일까? 그리고 무상한 제법을 하나로 묶어주며 인격의 통일성과 연속성을 제공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 문제에 대하여 유부에서는 인간의 생명력의 중심인 명근(命根 jῑva)이라는 것을 실체로서 인정했으며 상좌부에서는 표면심과 구별되는 무의식적 잠재심으로서 유분심(有分心 bhavaṇga-citta) 혹은 유분식(有分識)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한편 경량부는 종자(種子 bῑja)의 개념을 도입하여 심의 연속성을 설명하려 했다. 이 이론에 의하면 인간의 과거 경험은 종자와 같은 잠재적 형태로 마음에 보존되어 있다가 이 종자들의 상속(相續)·전변(轉變)·차별(差別)에 의해 우리의 일상적인 심리 현상들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종자들을 보존하고 있는 표현심의 배후에 지속적으로 미세한 인식작용을 하고 있는 일미온(一味蘊)이라는 것이 담겨져 있다고 하며 이러한 세의식(細意識)으로써 경량부는 행위주체의 연속성을 설명하려고 했다. 경량부의 이같은 이론은 대승불교의 유식(唯識) 사상에 의해 계승·발전되었다. 그런가 하면 독자부(犢子部)와 정량부(正量部)는 푸드갈라(Pudgala)라는 비즉비리온(非卽非離蘊), 즉 오온과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은 어떤 인아(人我)가 있어서 업보를 받는 주체가 되며 해탈하여 열반에 드는 주체가 된다고 한다.
또한 유부 등 여러 부파들은 중유(中有:또는 中陰)라 하여 사후에 다음 생으로 이어지는 어떤 중간적 존재를 인정하기도 했다. 건달바(乾闥婆)라 불리기도 하는 이 중유는 미세한 형태의 오온이라고 한다. 그러나 팔리 상좌부는 그러한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밖에도 대중부는 근본식(根本識), 화지부(化地部)는 궁생사온(窮生死蘊)이라는 개념으로써 인간의 지속적 주체를 인정했다.
이 모든 개념들은 석존의 엄격한 무상·무아 사상의 철학적 수정이라고 볼 수 있다.
부파불교에서는 불법에 대한 해석뿐만 아니라 불타관에 있어서도 새로운 견해들이 제시되었다. 석존의 사후에는 세월이 흐름에 따라 역사적 존재로서의 그에 대한 기억은 점차 흐려지고 신자들 가운데는 그를 이상화시켜 신앙의 대상으로 삼으려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석존은 외모에 있어서 위대한 인간(mahāpuruṣa)이 갖추어야 하는 32상(相), 80종호(種好)의 모습을 갖추고 있으며 10력(十力), 4무소외(四無所畏)와 같은 초월적 힘들을 지닌 존재로 여겨졌다. 뿐만 아니라 석존이 현세에서 이룬 위대한 업적은 결코 한 생애의 짧은 수행만으로는 이룰 수 없는 것이므로 그는 전생에 수많은 삶을 거치면서 보살(菩薩)로서 한량 없는 공덕을 쌓았다는 생각이 일어났으며 이에 따라 석존의 전생담(前生譚 Jātaka)들이 만들어졌다.
대중부에서는 석존을 전적으로 신격화하여 그를 완전히 초세간적(超世間的)인 존재로 간주했다. 그는 일체의 번뇌로부터 자유로우며, 그의 몸과 위력과 수명은 한이 없으며, 그의 말은 모두 설법이고 한 찰나의 마음에 일체법을 안다. 지상에 나타난 그의 몸은 변화신(變化身)일 뿐이다. 그는 부처가 되기 이전 보살이었을 때에도 청정한 몸으로 모태에 들어갔으며 모든 보살은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원하는 대로 악취(惡趣:낮은 형태의 존재)에 태어날 수 있으며 원하는 만큼 세상에 머물러 있을 수 있다고 한다.
대중부는 다른 한편으로 중생의 마음은 본래 청정하나 번뇌에 의해 더럽혀지는 것뿐이라는 심본청정설(心本淸淨說)을 주장했다. 대중부의 관념들은 대승불교의 발전에 영향을 준 것으로 여겨진다.
부파불교시대에는 불교의 우주관도 체계화되었다. 생사윤회(生死輪廻)의 세계는 욕계(欲界)·색계(色界)·무색계(無色界)의 3계로 구성되어 있다. 욕계는 욕망을 벗어나지 못한 중생들이 머무는 세계로서 33천(天)들이 머무는 6욕천(六欲天)도 포함되어 있다.
색계는 욕계를 벗어난 신들이 머무는 곳이며 선정(禪定 dhyāna)을 닦은 사람이 깨달음 없이 죽는 경우 태어나는 곳이다. 신체는 존재하지만 육체적 욕망은 없는 세계다. 무색계는 신체나 장소가 없는 정신적 세계로서 공무변처(空無邊處)·식무변처(識無邊處)·무소유처(無所有處)·비상비비상처(非相非非想處)의 4처가 있다.
모든 생명을 지닌 존재(有情 또는 衆生)는 생사를 반복하는 가운데 각기 지은 업에 따라 5가지 존재형태(五趣 gati), 즉 지옥·아귀·축생·인간·천(天) 가운데 하나로 태어난다고 하며 여기에 아수라(阿修羅 asura)를 더하여 6취(六趣)를 말하는 학파도 있다.
한편 인간이 생사의 악순환을 반복하는 과정에 대한 이론도 체계화되어 이른바 십이지연기설(十二支緣起說)로 정리되었다. 과거세의 무명(無明)·행(行)을 인(因)으로 하여 현재세의 과(果)인 식(識)·명색(名色)·육입(六入)·촉(觸)·수(受)가 생기고 현재세의 애(愛)·취(取)·유(有)가 인(因)이 되어 미래세의 생(生)·노사(老死)가 과(果)로서 생기게 된다.
이것을 유부와 팔리 상좌부는 3세양중(三世兩重)의 인과(因果)라 부른다.
삼장(三藏)의 구성
부파불교 논서들의 형성과 더불어 불교 경전은 경·율·논 등, 삼장의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소부는 유명한 〈법구경 法句經〉·〈수타니파타 Suttanipāta〉, 석존의 전생의 행적을 담은 〈본생경 本生經 Jātaka〉 등을 포함하고 있다.
석존의 교설은 오랫동안 구전으로 전수되다가 1세기경에 실론에서 처음으로 문자화되었다. 현존하는 삼장 가운데 석존의 교설을 가장 충실히 보존한다고 여겨지는 것은 팔리어로 전수된 상좌부의 삼장이다(→ 색인:팔리 삼장). 팔리어 경장은 경의 길이, 주제의 수에 따라 5부(nikāya)로 나누어져 있다. 즉 장부(長部 Dῑghanikāya) 34경, 중부(中部 Majjhima-nikāya) 152경, 상응부(相應部 Saṃyutta-nikāya) 2,872경, 증지부(增支部 Aṅguttara-nikāya) 2,198경, 소부(小部 Khuddaka-nikāya)의 5부 경전들이다.
율장은 계경(戒經 Pāṭimokkha-sutta), 즉 비구 221계를 해석하는 경분별(經分別), 승가 운영의 규칙(磨)을 다루고 있는 건도부, 부록과 같은 부수(附隨)로 구성되어 있다. 상좌부의 논장은 〈법집론 法集論〉·〈분별론 分別論〉·〈논사 論事〉·〈인시설론 人施說論〉·〈계설론 界說論〉·〈쌍대론 雙對論〉·〈발취론 發趣論〉의 7논서로 되어 있다.
상좌부에서는 이상의 삼장에 대하여 팔리어 주석서가 씌어졌으며 특히 5세기에 인도로부터 실론에 온 붓다고사(Buddhaghosa佛音)의 주석서가 권위적이다. 상좌부 외에 유부 등 타 부파들도 각기 삼장을 전수한 것으로 생각되나 상좌부 삼장처럼 완벽하게 남아 있지는 않다. 산스크리트 원문이나 한역, 혹은 티베트어로 부분적으로 남아 있을 따름이다.
한역 대장경 가운데 상좌부의 5부 경장에 해당되는 것이 아함경(阿含經)으로서 여러 부파에서 전수되던 것이 한역된 것이다. 장아함경(長阿含經:法藏部 전승, 413 한역)·중아함경(中阿含經:有部 전승, 398 한역)·잡아함경(雜阿含經:有部 전승, 443 한역)·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부파는 불명, 384 한역), 그리고 소부(小部)에 해당하는 〈법구경〉·〈본생경〉 등의 한역이 현존한다.
한편 한역 율장으로서는 유부의 사분율(四分律) 등 5종의 한역 율장이 부분적으로 남아 있다.
논장은 상좌부 외에 7논서로 된 유부의 것이 한역으로 거의 완벽하게 전해지고 있다. 7논서는 〈발지론 發智論〉·〈품유족론 品類足論〉·〈식신족론 識身足論〉·〈법온족론 法蘊足論〉·〈시설론 施說論〉이다. 상좌부와 유부 외에 다른 부파들도 논장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나 극히 부분적인 한역 외에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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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부파불교의 기원과 역사 – 다음백과,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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