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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133. 5. 13, 일본 미마사카[美作] 이나오카[稻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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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212. 2. 29, 교토[京都] |
국적 | 일본 |
요약 일본 정토종을 개창한 승려.
본명은 세이시마루[勢至丸]. 겐쿠[源空], 호넨쇼닌[法然上人], 엔코 대사[圓光大師], 간소 대사[元祖大師]라고도 한다.
정토 신앙이 일본 불교의 중심적 신앙의 하나로 확립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호넨은 일본 천태종의 승려들에 의해 중국에서 들어온 정토 교리들을 배움으로써 자신의 정토 신앙을 형성했으며, 누구든지 아미타불의 이름을 부르는 염불을 하기만 하면 구원을 받게 된다고 역설했다.
그는 한 지역의 군권을 담당하는 영주였던 우루마 도키쿠니[漆間時國]의 독자로 태어났다.
호넨이 9세가 되었을 때 그의 아버지는 그 지역의 무장으로부터 기습을 받아 죽었다. 호넨의 아버지는 그에게 승려가 되라고 유언했다. 지방에서 승려 교육을 받으면서 탁월한 재능을 인정받은 호넨은 15세 때 일본 천태종의 중심지인 히에이 산[比叡山]으로 보내졌다. 그곳은 당시에 외관적으로 볼 때 부와 명예 면에서는 번성하고 있었으나, 야심적인 고위 승려들의 권력을 둘러싼 내부 암투와 일반 승려들의 도덕적·정신적 타락으로 인해 내면적으로는 썩어가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호넨은 다른 젊은 승려들과 함께 정토교에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정토교에서는 아미타불이 서방정토에 살고 있으면서 누구든지 그를 신앙하기만 하면 구원하여 자신의 정토로 데려간다고 가르쳤다. 당시 호넨은 그 자신의 말대로 표현하자면 "눈이 멀어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며", 그의 제자 신란[親鸞]의 말대로 표현하자면 "지옥으로 가는 길 외에 아무 것도 택할 능력이 없는" 인간의 무력함을 절실히 느끼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호넨은 10~11세기경 아미타불을 신앙하던 일본의 승려 겐신[源信]의 〈왕생요집 往生要集〉과 특히 7세기 중국 정토종의 위대한 스승 선도(善道)의 〈관무량수경소 觀無量壽經疏〉에서 큰 감명을 받았다. 1175년 43세였던 호넨은 구원을 받는 데 있어서 필요한 유일한 것은 염불이라는 가르침을 천명했다.
호넨이 1198년 저술했으며 그의 대표적 저술로 꼽히는 〈선택본원염불집 選擇本願念佛集〉에서는 불교의 모든 가르침을 성도문(聖道門)과 정토문(淨土門)의 2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부처는 인간의 내면적 자질을 신뢰하고, 계율·명상·지혜를 통해 깨달음에 이르는 성도문을 사람들에게 제시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탐욕과 망상의 차안(此岸)을 벗어나 피안(彼岸)의 궁극적 평안에 이르도록 했다고 한다. 그러나 호넨은 자기 자신의 '죄악으로 가득 차고 탐욕스러운' 본성을 철저히 인식하여, 자신이나 자신과 같은 사람들로서는 성도문을 따르는 것이 이론적으로는 가능하면서도 실제상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열려 있는 유일한 대안이 정토문을 따르는 것이다.
정토문의 근간은 서방정토의 주재자인 아미타불의 본원(本願)을 절대적으로 믿는 것이다. 아미타불은 누구든지 마음을 다해 그의 자비로운 손길을 바라며 그의 성스러운 이름을 부르면 반드시 구원해준다고 하는 깊은 자비를 지닌 부처이다. 곧 〈선택본원염불집〉은 염불을 구원의 대표적인 길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호넨은 기존의 종교 시설들이 몰려 있는 곳과는 멀리 떨어진 세속적인 도시 교토의 한 가운데에 종파의 본거지를 두고, 나중에 정토진종(淨土眞宗)의 개조가 되는 신란을 비롯한 여러 독실한 제자들을 모아들였다.
호넨과 그 추종자들은 석가모니불 입적(入寂)으로부터 1,000년 동안은 정법시대(正法時代)로서 참된 가르침이 번성하며, 그 다음 1,000년 동안은 상법시대(像法時代)로서 경건함은 계속 남아 있으나 진실된 가르침은 쇠퇴하며, 그 다음의 마지막 1,000년 동안은 말법시대(末法時代)로서 불교가 쇠퇴하고 세상은 죄악과 싸움으로 뒤덮이게 된다는 불교 역사설인 삼시설(三時說)을 받아들였다. 그들의 계산에 따르면 말법시대가 이미 1051년에 시작되었다고 한다. 12세기 무렵 일본 사회는 이러한 역사관을 증명이라도 하듯 정치적 불안, 사회분열, 무사 계급을 근간으로 하는 봉건 세력들의 무수한 난립 등으로 인해 매우 혼란스러웠다.
이러한 상황에서 호넨의 간단하고 소박한 가르침은 당시 일본 사회 각계 각층의 사람들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아미타불의 정토에 대한 신앙이 널리 유행하자 기성 불교 종파들이 호넨의 정토종을 시기하게 되었다. 때마침 2명의 궁녀가 호넨의 가르침으로 개종하여 궁정의 전통불교 신앙을 떠나는 일이 일어나자, 호넨이 그 궁녀들을 꾀어냈다는 비난이 일었고, 그는 제자들과 함께 1207년 수도에서 축출되었으며, 그의 제자들 중 몇 사람은 참수되기까지 했다.
호넨은 세속 이름을 사용하도록 강요당하여 이름을 후지이 모토히코[藤井元彦]라고 고치고 시코쿠[四國]의 한 섬으로 유배되었으나, 그곳에서도 훌륭한 포교사로서 자신의 가르침을 폈다. 호넨은 같은 해말 시코쿠 지역을 떠나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으나 1211년이 되어서야 교토로 돌아갈 수 있었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뜻하게 맞이했다.
호넨은 아미타불을 신앙하고 그 이름을 암송하는 것이 구원에 이르는 최선의 방법임을 역설했지만, 대담하면서도 공격적이지 않고 매우 관용적이며 논쟁을 좋아하지 않아서,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다른 부처도 공경하고 불교의 다른 신앙과 수행법에 대해서도 존중하는 마음을 가지라고 권고했다.
그에 따르면 다른 형태의 수행을 통해서도 실제로 아미타불과 그의 서방정토로 나아갈 수 있다고 했다. 호넨은 또한 염불을 하면서 부도덕한 생활을 함께 하려고 하거나, 불교의 생활 계율을 위반한다든지 또는 그밖의 부도덕한 행위를 하면서도 염불만 하면 그 허물을 쉽게 지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에 대해 특히 경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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