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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노동운동은 임금노동자가 형성된 개항기부터 싹트기 시작했다.
1870년대 이후 주로 광산과 부두 노동자들은 이미 자연발생적이고 산발적인 집단행동이나 폭동을 일으키고 있었으며, 1900년대에 들어서 조합 또는 노동조합이라는 명칭의 노동단체들이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대부분 친목단체의 성격을 띠고 출발한 이들 조직이 언제나 노동자들의 편에만 섰던 것은 아니며, 오히려 그들 자신이 노동자를 수탈·단속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후 노동야학·노동회 등의 계몽·취업알선 단체들이 결성되면서 노동자들의 의식이 강화되고 노동쟁의도 빈번해졌으나, 근대적 노동조합운동의 형태로 보기는 어렵다.
본격적인 노동조합운동은 3·1운동 이후에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개항 이후로 축적된 노동자들의 의식이 민족의식과 결합되었으며, 당시 점차 확산되고 있던 사회주의 운동과도 연계되었다. 그결과 중앙에서는 전국적 노동자조직 결성을 위해 일관된 노력이 전개되었다. 1920년 최초로 '조선노동공제회'가 결성된 뒤, 1922년 '조선노동연맹회'를 거쳐 1924년 노동자·농민의 통합단체인 '조선노농총동맹'이 그 뒤를 이었고, 이는 다시 1928년 '조선노동총연맹'과 '조선농민총연맹'으로 분리되었다.
이러한 중앙의 움직임과 달리, 지방에서는 직종별·직업별 노동조합이 산업별노조로 개편되면서, 지역연합체를 중심으로 일본인 사용자의 수탈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예로 1929년 원산총파업이 발생했는데, 이 사건 이후 일제의 탄압이 더욱 가혹해짐에 따라 지방 노동조합운동은 비합법화·좌경화·폭력화되었고 마침내 1937년 중일전쟁을 계기로 민족독립운동과 사회주의운동에 흡수되었다.
1920년대 조선노농총동맹과 1930년대 적색노조로 이어진 노동운동은 해방 이후 좌익의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 결성과 더불어 본격적으로 활성화되었다.
전평은 1945년 11월 전국 1,194개 조합, 55만 3,408명 조합원으로 조직된 뒤 해방정국에서 노동자들의 요구를 하나로 결집해 활동을 전개했다. 한편 이에 대한 대응으로 우익은 1946년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대한노총)을 결성했고, 마침내 전평은 미군정과 우익진영의 탄압으로 1947년 활동이 불법화되면서 유명무실한 세력으로 남았다.
이후 대한노총이 유일한 전국조직으로 1950년대를 주도했으나, 이들은 자유당 정권에 의해 어용단체로 자리잡고 노동조합 본연의 임무보다는 집권세력의 정치기반 역할을 했다. 1953년 노동관계법 제정으로 노동조합운동은 법적 지위를 부여받았으나, 발전 가능성은 여전히 제한적이었다.
이후 1960년대에 들어서 노동조합운동은 4·19혁명으로 자주화·민주화로 나아가는 전기를 마련하기도 했으나, 5·16군사정변으로 또다시 단절을 겪어야 했다.
한편 기존의 대한노총과 새로 등장한 전국노동조합협의회가 함께 결성했던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련)은 5·16군사정변으로 해산되었으나 같은해 8월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으로 재건되었다. 군사권력의 하향적 방식으로 단기간에 세워진 한국노총은 이전의 한국노련과 달리 12개의 산별노조체제로 조직되었으나, 역시 노동자들의 권익보다는 정권과 자본의 이해를 대변하는 데 급급했다.
1960년대초부터 경제개발계획과 더불어 공업화가 진전됨에 따라 노동조합운동은 점차 활기를 띠었고 쟁의 발생 건수도 많아졌다. 특히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 재단사 출신의 노동자 전태일이 열악한 노동조건에 항거, 분신자살하자 노동조합운동은 더욱 활발해졌다. 이에 대응해 정부는 1971년 10월유신을 단행하고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으로 노동자의 단체교섭권 및 단체행동권을 유보시켜, 마침내 우리나라 노동운동은 암흑기를 맞았다. 결과적으로 정규적 노조활동은 위축되고 대신 그리스도교계에서 주도한 도시산업선교활동이 확산되었으며, 노동쟁의의 형태는 'YH사건' 등에서와 같이 과격성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970년대말에는 10·26사태 직후 노동자들의 불만이 한꺼번에 분출되면서 대규모 노동쟁의가 발생했다.
뒤이은 제5공화국 출범과 함께 1980년에 노동관계법이 대폭 개정되었고, 그결과 노동조합운동이 기업별 체제하에서 계속 정부의 규제를 받게 됨에 따라 소득 불평등에 대한 노동자들의 불만은 점점 심화되었다. 이처럼 응축된 불만은 1987년 6·29선언을 계기로 폭발되어 대규모 파업이 잇달아 발생했고, 그뒤 2년여의 기간에 걸쳐 대등한 노사관계 확립을 위한 노동조합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또한 '경제적 조합주의'를 견지하는 한국노총이 체질개선을 추구하는 가운데 '정치적 조합주의'를 표방한 재야노동 세력이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를 조직함으로써 신규노조 및 조합원수는 급증했다(전국노동조합협의회). 이후 전노협은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으로 발전해 한국노총과 함께 양대 노총시대를 열었다.
한국 노동조합의 조직현황은 다음과 같다.
1963년 한국노총 산하의 16개 산업별노조와 1,820개 단위노조(분회)에서 1986년 16개 산업별연맹 및 2,658개 단위노조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이 수치는 1987년에 고양된 노동운동의 여파로 1989년 다시 21개 산별연맹과 7,883개 단위노조로 크게 증가했다. 이 기간에 늘어난 조합수는 1986년 이전 수준과 비교할 때 거의 2배에 달하며, 21개 산별연맹에는 철도·섬유·광산·전력·외기·통신·항운·선원·금융·담배인삼·화학·금속·연합·출판·자동차·관광·체신·보험·택시·고무·사무금융 노련이 포함되었다.
이 가운데 최대 조직은 금속노련으로서 그 단위조합은 1,609개, 조합원은 44만 8,538명에 달했다. 이처럼 조직이 확대된 것 이외에 총조합원수는 1963년과 1986년 각각 22만 4,000명과 103만 6,000명이었던 것이 1989년에는 193만 2,000명으로 늘었으며, 조직률도 1986년 15.5%에서 1987년 23.45%로 크게 신장되었다.
그러나 민주노총의 창립으로 양대 노총 시대가 된 1995년 이후로 한국노총의 조직 가입률은 1989년에 비해 떨어졌다. 2000년 12월 현재 한국노총의 조직현황을 살펴보면 28개 산별연맹에 단위조합은 3,408개, 조합원은 94만 9,193명이다. 한편 1990년 600여 개의 노동조합 20여만 명의 조합원으로 출범한 전노협은 이후 계속 조직을 확대하여 1995년 민주노총 출범 당시 861개 노동조합 41만 8,154명의 조합원으로 발전했다. 이후로도 민주노총은 꾸준한 조직화를 통해 2000년 9월 현재 17개 산별연맹에 단위조합 1,341개, 조합원 58만 6,809명의 전국 조직으로 성장했다.
그 동안 한국의 노동조합은 서구의 산업별 또는 직능별 조합과 달리 '기업별 노동조합'의 형태로 조직되어 있었다.
1960∼70년대에는 산업별노조의 형태를 취했으나 실제로 상급노조의 대부분은 산업별 교섭의 강제력도 갖추지 못한 기업별 조직에 불과했으며, 이것마저도 1980년 노동법 개정으로 폐기되어 완전한 기업별 노조체제로 정립되었다. 이 체제는 노동자들의 단결 범위가 매우 제한적이고 그들의 의식 또한 계급지향적이기보다는 협소한 기업별 의식으로 한정되어 있어, 종업원과 조합원의 구별이 쉽지 않다.
따라서 사용자가 노조활동에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많아져 자주성을 침해받기 쉽다. 1990년대에 '무노동무임금'이나 해고자의 조합원자격 인정 등의 문제가 주요한 쟁점으로 부각된 것도 바로 이와 같은 조합의 조직형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노동운동, 노동조합법). 그러나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이 상급조직으로써 정부 및 사용자단체와 교섭력을 확보해감에 따라 한국의 노동조합도 점차 개별 기업의 범위에서 벗어나 산업별 노조를 기반으로 계급지향적으로 변모하고 있다.
1998년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노사정위원회에 양대 노총이 참여해 정책 결정에 노동조합의 주장을 관철시킨 것도 한국의 노동조합이 개별 기업의 틀에서 벗어나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성장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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