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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1928년 원산의 석유회사에서 일본인 현장감독이 조선인 노동자 구타사건이 발생한 뒤 1929년 부두노동자들의 임금인상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노동자들은 파업에 돌입했다. 이후 원산의 모든 산업, 운수기관이 마비상태에 빠졌다. 그러나 장기간에 걸친 투쟁으로 역량이 크게 약화되고 일제의 탄압으로 선진적인 노동자들과 파업지도부를 잃은 반면 투항적 자세를 지닌 노동자들이 나타나면서 4개월간 계속된 총파업은 실패로 끝났다. 원산총파업은 한국의 노동운동사상 처음으로 1개 도시 전체를 완전히 마비상태에 빠뜨려 일제에 가장 큰 타격을 가한 파업투쟁이었으며, 또한 노동자들의 연대성과 완강성을 잘 보여준 파업이었다. 이 사건은 1930년대 이후 노동운동이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으로 전환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총파업의 발단과 전개
원산총파업의 발단은 1928년 9월에 있었던 문평 제유공(文平製油工) 파업에서 시작되었다.
이 파업은 일본인 현장감독의 조선인 노동자 구타사건으로 일어났는데, 여기에 원산노동연합회가 파업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한편 1929년 1월 3일에는 원산 부두노동자들이 임금인상을 요구했으나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원산노동연합회의 지도로 부두에서 하역작업을 거부했다. 이에 대해 원산상업회의소와 해당 기업주는 노동조합을 분쇄하려는 목적으로 노동자에게 해고조치로 맞섰다.
이러한 원산상업회의소와 기업주의 적대적 도전에 대항해 원산노동연합회는 같은 해 1월 22일에 산하 노동자로 하여금 총파업에 들어갈 것을 선언했다. 그리하여 1월 22일에는 두량(斗量)노동조합·해륙노동조합, 23일에는 결복(結卜)노동조합·운반노동조합, 24일에는 원산 중사(仲仕)노동조합·제면노동조합 등이 계속 파업에 들어갔다. 이와 함께 원산노동연합회에 소속되지 않은 자유노동자까지도 파업에 참여해 원산의 모든 산업, 운수기관이 마비상태에 빠졌다.
일제의 탄압
일제와 자본가측은 일본경찰을 동원하여 원산노동연합회의 간부와 선진노동자들을 상당수 검거, 투옥하고 함흥보병대에서 무장군인들을 출동시켜 준계엄상태를 유지시켰다.
이와 함께 국수회(國粹會)·재향군인회·소방단 등을 동원하여 위력단(威力團)이라는 테러 단체를 조직하여 파업초기부터 노동자에 대해 폭력을 행사했다. 또한 불량배들을 끌어모아 함남노동회라는 어용노동단체를 조직하여 원산노동연합회를 파괴하려고 했다. 이와 같은 일제와 자본가측의 파업 파괴작업에도 불구하고 파업이 더욱 확대되자 일제는 구관리·친일자본가들로 구성된 원산시민협회(元山市民協會)를 통해 노사협조주의를 설파하면서 파업노동자들의 투항을 권고하기도 했다.
탄압에 대한 대응
이러한 일제와 친일자본가들의 움직임에 대항하여 파업노동자들은 파업기금과 5개월분의 식량을 준비하여 장기적인 파업에 대비했다.
그리고 규찰대를 조직해 노동자들의 투지와 단결을 강화하는 데 주력했다. 이와 함께 함흥, 청진, 기타 지방에 규찰대원을 파견하여 원산의 기업주들이 새로 노동자를 모집하는 것을 방지하고 노동계급의 연대성을 확보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했다. 한편 원산 노동자들의 파업은 광범위한 국내외적인 지원을 받아 국내 단체 및 일본노동조합 관동지방협의회 등 일본의 여러 단체가 격려문을 보내고 동정금을 모집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고베[神戶]·오타루[小樽] 등 일본의 항구도시에서는 동정파업까지 단행하여 원산총파업을 후원했다. 그러나 일제경찰이 외부로부터의 모든 원조를 차단하고 원산노동연합회의 지도부를 검거한 상태에서 지도부가 김태영을 중심으로 개편되었다. 그런데 김태영을 중심으로 한 새 지도부는 원산 부윤, 원산경찰서장 등에게 조정을 청원하는 한편 투쟁을 포기하고 자유취업할 것을 주장하는 등 투항적인 자세를 드러냈다.
또한 파업기금이 고갈된 상태에서 같은 해 3월경부터는 일부의 노동자들이 함남노동회에 가입하는 등 노동자들 내부에 분열이 일어났다. 이런 상황에서 4월 1일 파업이 폭동으로 전환되어 파업노동자들이 함남노동회와 그 산하단체를 습격하고 그 간부와 회원들을 응징했다. 그러나 장기간에 걸친 투쟁으로 역량이 크게 약화되었고 일제의 탄압으로 선진적인 노동자들과 파업지도부를 잃은 반면 투항적 자세를 지닌 노동자들이 나타나면서 75일간 계속된 총파업은 실패로 끝났다.
총파업의 의의
원산총파업은 한국의 노동운동사상 처음으로 1개 도시 전체를 완전히 마비상태에 빠뜨려 하여 일제에 가장 큰 타격을 가한 파업투쟁이었으며 또한 노동자들의 연대성과 완강성을 잘 보여준 파업이었다.
그리고 파업의 경험으로 당시 노동운동가들은 분산적·지역적으로 조직되어 있는 종래의 노동조합이 갖는 한계를 극복하고 개량주의·투항주의의 침투를 막기 위해서는 혁명적인 노동자가 지도권을 장악하고 산업별로 통일시켜야 한다는 점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30년대 이후 노동운동이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으로 전환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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