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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1972년 12월 27일 개정·공포된 유신헌법에 의해 박정희 대통령의 집권 2기인 제4공화국의 유신체제가 등장하게 된 일련의 사태.
배경
10월유신의 배경은 경제적·사회적·국제적·정치적인 제반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한국사). 첫째, 경제적 측면은 19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된 경제발전의 파행성을 들 수 있다.
산업화의 급격한 추진으로 인한 대자본 편향의 무분별한 외자도입정책과 수출진흥정책은 1960년대 후반부터 시설과잉을 낳았고, 이는 외채상환의 압박 및 긴축정책과 더불어 금융공황적 자금난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현상은 1969년부터 차관기업의 부실화 문제로 점차 현실화되었다. 둘째, 사회적 측면은 1960년대의 경제발전은 대자본을 위주로 한 저곡가·저임금에 바탕한 수출지향적 산업화였기 때문에, 1970년대초에 접어들어 노동자를 비롯한 서민층의 생존권 문제가 점차 분출하게 되었다.
예컨대 전태일의 분신사건, 광주대단지 폭동사건, 체불임금 지불을 요구하는 파월(派越)노동자들의 대한항공 빌딩 방화사건 등은 이러한 양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셋째, 국제적 측면은 국제적인 긴장완화로 인한 동북 아시아 긴장완화와 남북대화의 국내적 영향을 들 수 있다. 1960년대말부터 비롯된 한반도 주변의 긴장완화는 1970년 2월 발표된 '닉슨 독트린'을 계기로 아시아에서의 미국 개입정책의 후퇴로 나타났다.
이러한 국제정세를 배경으로 남북대화도 급속히 진전되어 1972년 7·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었다. 정부는 이같은 국제적 긴장완화의 영향에 의한 국내 반공체제의 이완을 우려했다. 넷째, 정치적 측면으로는 박정희 대통령과 지지세력의 장기집권 의도를 들 수 있다. 장기집권을 의도하는 박정희 대통령의 3선개헌에 대해 야권은 1971년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에서 집권당의 지위를 위협했고, 이와 더불어 재야 및 학생들의 반독재민주화운동은 더욱 치열해졌다. 심지어 여권 내부에서 이를 둘러싼 권력갈등의 결과, 오치성(吳致成) 내무부장관의 해임결의안을 가결시킨 '항명파동' 등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상과 같은 배경 속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제반 문제들을 합리적으로 해결하기보다는 강력한 체제 구축으로 대응했다.
과정
10월유신은 짧게는 1972년 10월 17일 '대통령특별선언'으로부터 12월 27일 제4공화국 등장까지의 기간에 해당되나, 보다 길게는 그 시기를 전후하여 유신체제 등장과 관련된 일련의 조치들이 행해졌던 전체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유신체제 등장은 1971년 12월 6일 취해진 '국가비상사태선언'에서부터 비롯되었다. 비상사태선언 6개항은 ① 정부의 시책은 국가안보를 최우선으로 하고 조속히 만전의 안보태세를 확립한다. ② 안보상 취약점이 될 일체의 사회불안을 용납하지 않으며 또 불안요소를 배제한다.
③ 언론은 무책임한 안보논의를 삼가야 한다. ④ 모든 국민은 안보상 책임수행에 스스로 성실해야 한다. ⑤ 모든 국민은 안보위주의 새 가치관을 확립해야 한다. ⑥ 최악의 경우 우리가 향유하고 있는 자유의 일부도 유보할 결의를 가져야 한다는 것 등이었다. 한편 박정희 대통령은 국가비상사태 선언에 즈음한 담화문에서 "대한민국의 안전보장은 중대한 위기에 처해 있고…… 오늘의 우리 사회의 단면을 볼 때 나는 6·25전쟁의 전야를 회상하지 않을 수 없다"고까지 말했다. 요컨대 정부는 국제적 긴장완화의 상황에서 역설적으로 국가의 안보위기를 내세워 사회와 국민 통제의 준비를 시작했던 것이다.
이어 여당은 1971년 12월 17일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국회에서 통과시켜, 박정희 대통령에게 비상사태시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할 수 있는 비상대권을 부여했다. 그 내용은 ① 물가·임금·임대료 등에 대한 통제권 및 기타 제한권, ② 인적·물적 자원을 효율적으로 동원하거나 통제·운영하기 위한 국가동원권, ③ 일정한 지역에서의 이동 및 입주·소개·철거권, ④ 옥외집회 및 시위 규제권, ⑤ 언론·출판 규제권, ⑥ 단체교섭권 등의 규제, ⑦ 예산 및 회계상 세출예산 변경권 등이다.
이로써 정부는 안보위기를 내세워 일단 국민들을 광범위하게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이상과 같이 국민 통제의 바탕을 마련한 정부는 외채상환의 압박과 긴축정책의 압박으로 파산 위기에 몰린 대자본을 구제하기 위해 통칭 '8·3사채동결조치'로 알려진 '경제의 안정과 성장에 관한 긴급명령'을 발했다. 이 비상조치의 주요내용은 ① 기업의 모든 사채를 월 이율 1.35%, 3년 거치 5년 분할상환으로 강제 규정한 사채동결조치 및 기업에 대한 특별금융조치, ② 중소기업과 농림수산업에 대한 신용보증제도의 확충 및 강화, ③ 산업합리화 추진과 기금 조성, ④ 조세행정의 중앙집권화, ⑤ 금리인하 및 물가동결 등이다.
이러한 조치는 이자부자본(利子附資本)을 산업자본으로 전환시키고 중간계층의 재산권을 희생시켜 대자본의 회생을 도모한 엄청난 특혜였다. 약 1년에 걸친 예비작업 끝에 박정희 대통령은 유신체제를 등장시키는 10월유신을 단행했다. 곧 10월 17일 현행헌법의 일부 조항의 기능을 정지시키는 비상조치와 이를 위해 전국 일원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여기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① 10월 17일 19시를 기하여 국회 해산, 정당 및 정치활동의 중지 등 현행 헌법의 일부 조항의 기능 정지, ② 효력이 정지된 일부 헌법조항의 비상국무회의에 의한 수행, ③ 비상국무회의에 의한 헌법개정안의 마련, ④ 개정된 헌법안에 의한 연말 이전의 헌정질서회복 등을 공표했다.
이후 비상국무회의가 마련한 유신헌법안은 11월 21일 국민투표를 거쳐 확정되었다. 새로이 마련된 유신헌법에 의해 박정희는 12월 23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다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결국 박정희 대통령은 헌정중단을 통해 마련된 유신헌법에 의해 장기집권을 위한 유신체제를 등장시켰다.→ 유신체제, 유신헌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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