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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12년에 레피두스가 죽자 아우구스투스는 마침내 그뒤를 이어 로마 종교의 공식 수장인 대신관이 될 수 있었다.
같은 해에 아그리파도 세상을 떠났다.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딸이자 아그리파의 미망인인 율리아와 의붓아들 티베리우스를 강제로 결혼시켰다. 그러나 그후 3년 동안 티베리우스는 전장에 나가 판노니아(유고슬라비아와 헝가리) 지방을 진압했고, 그의 동생 드루수스는 라인 강을 넘어 엘베 강까지 진격했으나 BC 9년에 게르마니아에서 죽었다(→ 게르만 민족). 이듬해에는 지난날의 조언자였고 유명한 문학 후원자인 마이케나스까지 세상을 떠났다.
티베리우스는 BC 6년에 지위가 높아져 장인의 호민관 권한을 나누어 갖게 되었다. 그러나 그 직후에 의붓조카인 가이우스 카이사르의 질투 때문에 로도스 섬으로 은퇴해버렸다.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이듬해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아우구스투스가 '국부'(pater patriae)라는 최고의 칭호를 받은 BC 2년에는 가이우스 카이사르의 동생 루키우스도 똑같은 찬사를 받았다. 가이우스는 동부로, 루키우스는 서부로 파견되었지만 둘 다 곧 죽었다. 티베리우스는 AD 2년에 집으로 돌아왔고, AD 4년에 아우구스투스는 그를 양자로 삼으면서 그에게 동생 드루수스의 아들 게르마니쿠스를 양자로 입양할 것을 요구했다. 티베리우스는 명성을 제외한 모든 점에서 아우구스투스와 거의 동등한 권한을 누렸다.
아우구스투스는 이제 나이를 느끼기 시작했지만 티베리우스와 제휴한 이 시절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는 과감하게 행정을 혁신하고 AD 6년에 유대를 병합했으며, 로마에 치안 임무를 맡은 기동부대를 창설했다. 7년 뒤에는 정규 경찰력(cohortes urbanae)으로 기동부대를 보완했으며, 군인의 퇴역 보조금을 지급하기 위해 군대 금고(aerarium militare)를 창설했고, 그때까지 수시로 임명하던 도시 장관(praefectus urbi)을 상설직으로 바꾸었다(AD 13).
같은 해 아우구스투스의 권한이 10년 더 연장되었는데 이것은 아우구스투스가 제국을 지배하는 동안 줄곧 되풀이되어왔던 것이다. 그리고 티베리우스는 헌법상의 모든 점에서 아우구스투스와 동등한 존재가 되었다. 4월에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의 베스타 신전에 유언장을 맡겼다. 여기에는 제국의 군사적·경제적 자원에 대한 요약(breviarium totius imperii)과 '신성한 아우구스투스의 업적'(Res Gestae Divi Augusti)으로 알려진 정치적 유언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정치적 유언장의 사본은 로마 신전의 벽과 터키 앙카라의 아우구스투스 기념비에 잘 보존되어 있다. AD 14년에 티베리우스는 일리리쿰으로 떠날 예정이었지만 아우구스투스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로마로 돌아왔다.
아우구스투스는 8월 19일에 죽었고, 9월 17일에 원로원은 그를 로마 국가의 수호신 명단에 올렸다.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뒤를 이어 로마의 제2대 황제가 되었지만, 제위 계승에 따르는 형식적 절차는 그 자신만이 아니라 원로원에도 골치아픈 것이었다. 아우구스투스의 '최고 권력'은 법적으로 말하면 상속할 수도 없고 지속적인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결국 다른 황제들과 마찬가지로 티베리우스도 '아우구스투스'라는 명칭을 추가 칭호로 채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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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아우구스투스와 로마 제국의 팽창 – 다음백과,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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