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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주의

다른 표기 언어 racism , 人種主義

요약 유전되는 신체적 특징과 성격·지능·문화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다는 이론 또는 사상. '인종본질주의'라고도 한다. 이 이론은 또한 어떤 인종은 선천적으로 다른 인종보다 우수하다는 관념이 배경에 깔려 있다. 나치 독일의 국가사회주의, 미국의 노예제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는 이와 같은 인종주의의 역사적 산물이다.

개요

인간의 행동 양식이 선천적이고 유전적인 형질에 의하여 생물학적으로 결정된다고 믿는 사상. 인종주의의 기본적인 배경은 혈통이 개별 인간의 가치를 규정한다는 인식으로, 때로 인종은 혈통을 기반으로 한 민족국가 구성원의 경계를 가르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초기의 인종주의

인종주의 사상의 기원을 명확하게 입증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인종주의 사상가로 19세기 중반 〈인종 불평등론(Essay on the Inequality of Human Races)〉(4권)을 낸 조제프 아르튀르 고비노를 꼽는다. 고비노의 주장에 따르면 백인종은 다른 모든 인종보다 우수하며, 백인종 가운데서도 최고의 문명을 이룩한 아리아 인종이 가장 우수하다는 것이다.

고비노 (Joseph-Arthur Gobineau, comte de)

프랑스의 외교관, 민족학자· 사회사상가

고비노의 이러한 생각들을 철저히 계승한 사람은 1899년 독일어로 〈19세기 유럽 문화의 토대(Die Grundlagen des neunzehnten Jahrhunderts)〉를 출판한 휴스턴 스튜어트 체임벌린이었다(체임벌린). 영국 태생인 체임벌린은 독일에서 생애 대부분을 보내면서 고비노 협회에서 활동했으며, 당시 독일의 지배 계급에게 인기를 얻어 어용 인류학자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 역시 튜튼족의 우수함을 주장했다. 그는 튜튼족이 키가 크고 피부가 희며 얼굴이 길어서 북유럽인의 신체적 특징과 일치한다고 했다.

그는 기질 면에서 유대인은 우수한 인종인 튜튼족과 전혀 다른 것으로 보았으나, 신체적인 특징만을 근거로 유대인과 독일인을 구별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인정했다(게르만족, 반유대주의). 독일의 루트비히 볼트만과 H.F.K.귄터, 미국의 로스럽 스토더드와 매디슨 그랜트 등 많은 학자들이 인종주의를 내세웠지만 고비노와 체임벌린은 독일 나치의 인종주의이론의 지적인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

체임벌린 (Houston Stewart Chamberlain)

영국 태생 정치철학자, 독일의 숭배자

ⓒ DenisWasRight / wikipedia | CC BY-SA 3.0 de

나치 독일의 인종주의

아돌프 히틀러 스스로도 자신의 정치철학의 인종주의적인 측면에 '과학적인' 근거를 준 것은 바로 이들이었고, 특히 체임벌린에게 많은 영향을 받고 있음을 인정했다. 물론 인종주의적인 접근방법에는 내적인 모순이 포함되어 있었다. 즉 수많은 독일인들은 북유럽인을 닮지 않은 반면 많은 유대인들은 북유럽인과 닮았다는 사실, 동맹관계 때문에 일본인들은 제3제국의 인종주의적인 제한을 받지 않게 해야 한다는 것, 독일인의 '피' 또는 '영혼'이라는 개념에 명확한 뜻을 부여하기 어렵다는 것 때문에 신비주의로 변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모순 외에 또 다른 결함이 있었지만, 인종주의는 '적'을 명확히 구분함으로써 독일 민족을 단결하게 하고, 독일 민족에게 자부심과 자신감을 주며, 경제적인 착취와 노예 노동을 정당화했다. 또한 전쟁에 대한 지지를 얻어낼 수 있게 하고, 독일 민족은 결코 패배하지 않는다는 확신을 주었다. 따라서 인종주의는 독일 민족을 지배하는 권력을 얻고 유지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나치 선전술 가운데 하나로 이용되었다(국가사회주의).

식민주의와 인종주의

인간을 파괴하는 폭력성과 적의(敵意)를 낳게 하는 식민주의가 또한 인종주의를 통해 식민지 정복과 영토 팽창을 합리화할 수 있는 유용한 기술을 찾아냈다. 스페인인들이 처음 아메리카를 침략했을 때, 그들이 인디언의 땅을 빼앗고, 인디언을 철저히 무시할 수 있도록 그럴듯한 구실을 마련해준 앞잡이들이 여러 명(특히 프란시스코 데 케베도와 후안 히네스 데 세풀베다) 있었다. 그들이 만들어낸 이론에 따르면 인디언의 조상은 스페인인들과 전혀 다르며, 따라서 인디언은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동료 인간과 똑같이 대할 필요가 없었다.

인종주의에는 언제나 '백인의 의무'라는 귀에 익은 구실이 뒤따랐다. 주로 영국의 토머스 칼라일, 제임스 A.프루드, 찰스 킹즐리의 작품을 통해 문학적으로 표현되었고, 러드여드 키플링의 작품을 통해 가장 강렬하고 확실하게 표현된 '백인의 의무'라는 구실 덕분에, 제국주의는 무지몽매한 다른 '인종들'에게 문명을 전하도록 운명지워진 고상한 행위가 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프랑스인들은 뒤떨어져 있는 여러 민족들에게 문명을 전할 의무가 있다는 구실로 식민지 제국을 유지하는 것을 정당화했다. 과거의 식민제국들에는 확실히 자신의 동기와 식민화 계획의 숭고함을 진정으로 확신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식민주의를 정당화하는 인종주의적인 우월감은 식민화된 민족에게 그들을 지배한 나라에 대한 원한을 갖게 했으며 이러한 원한은 해방과 독립을 통해서도 쉽게 극복하기 어려웠다. 이때문에 일부 지역에서는 거꾸로 유색 민족의 백인에 대한 적대감이 많이 생겨났다.

현황

일부 두드러진 예외는 있지만, 대체로 세계 흐름이 인종주의에서 많이 벗어났다는 것은 사실이다. 대부분 이전에 식민지였던 지역에 새로운 국가가 생겨남으로써 '유색 민족들'로 이루어진 많은 국가들이 국제문제에서 독자적인 발언권을 갖게 되었고, 따라서 이전의 식민제국들까지도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한 국가 안의 소수민족에 대한 대우가 국제관계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닐 수 있다는 인식이 생겨나면서 민족 사이의 관계 전체를 개선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인류학에서 프란츠 보아스, 사회과학분야에서 군나르 뮈르달 등의 저서에 힘입어 인종에 관한 잘못된 관념이 크게 사라지게 되었다(인종집단). 이러한 흐름에 따라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는 1948년 이후 심화된 인종분리정책(→ 아파르트헤이트)이 1990년대 들어 폐지되었다.

이와 함께 미국에서도 모든 민족들에게 좀더 평등한 기회를 주려는 점진적이고 진보적인 움직임이 있었다. 1954년 5월 17일 이러한 경향을 극적으로 드러낸 첫번째 사건이 일어났는데, 미국 대법원이 일부 주와 지역에서 흑인 학생을 강제로 격리하는 것은 미국 헌법정신에 어긋난다고 전원합의로 판결한 것이다. 이러한 대법원의 판결은 부분적으로 사회과학 연구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이후 1964년 제정된 민권법(Civil Rights Act)은 흑인을 포함한 유색인종에게 경제적 기회를 동등하게 부여할 뿐 아니라 투표·교육·공공편의시설의 이용에서 차별과 격리를 하지 못하도록 하는 법적 규정이 포함되었다. 이후 미국에서 인종주의는 법적인 규제의 대상이 되었다.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남아프리카 공화국 하우스 앞에서 반 인종 차별 항의를 하는 모습(1989 런던)

ⓒ rahuldlucca / wikipedia | CC BY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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