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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유망업종, 장례식장
얼마 전에 한 신문에서 21세기 유망업종의 하나로 장례사업을 소개한 일이 있다. 어렸을 적에 장의사 앞을 지날 때마다 섬뜩한 기분이 들었던 기억이 있는지라 별 업종이 다 유망사업이 되는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곰곰이 다시 생각해보니 그럴 수도 있겠구나 고개가 끄덕여진다.
장례식장이란 빈소와 영안실, 장례용품 전시판매장과 휴게실 등을 갖추고 장례를 치를 수 있게 한 장소를 말한다. 장례란 말은 보통 상례(喪禮)와 같은 뜻으로 쓰이는데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상례 중에서 시신을 처리하는 과정만을 뜻한다. 일반 사람들에게는 이 장례식장이라는 용어가 아직은 생소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우리가 자주 찾아가게 되는 병원 영안실도 ‘가정의례준칙’에서 규정하고 있는 장례식장의 하나이다.
그런데 최근 몇 년 사이에 병원에 속하지 않은 독립된 전문장례식장이 등장하고 있다. 간혹 주민들이 이러한 전문장례식장의 건립을 혐오시설이라는 이유로 현수막까지 내걸고 반대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지만, 1995년에 3개에 불과하던 것이 지금은 십여 개로 늘어났다. 일반사업자뿐만 아니라 대형 병원과 농협, 심지어는 지방자치단체까지 재원 확보를 위해 이러한 장례식장 사업에 참여하고 있어 그 수는 앞으로도 더 늘어날 전망이다.
반면 몇 년 전만 해도 3천여 개에 달했던 장의사는 현재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다. 장의사는 집에서 장사를 지낼 때 부르는 것이 보통인데 요즘 사람들은 부모님이 집에서 돌아가셔도 오히려 병원 영안실로 모셔가는 판국이니 장의사의 수가 줄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이다. 이는 상사(喪事)를 당한 사람 가운데 약 70퍼센트가 병원 영안실에서 장례를 치른다는 최근의 정부통계에 의해서도 입증된다.
이 같은 장의(葬儀)산업의 지각변동은 기존 상례풍속의 큰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마치 지금으로부터 60년 전인 1930년대에 신식 혼례만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혼인예식장이 새로 생기면서 혼례풍속에 큰 변화가 일어난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신문의 부음란에서 빈소가 ‘자택’으로 되어 있는 경우는 사라지고 대신 ‘○○병원’과 ‘○○장례식장’이 그 자리를 대신할 날이 조만간 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1990년대의 상례풍속 변화는 1930년대의 혼례풍속 변화와는 다른 점이 많다. 당시 혼인예식장에서 하는 혼례는 전통혼례의 모습이 거의 사라져버린 서양식 혼례였지만, 지금 장례식장에서 행해지는 상례는 아직 전통의 모습을 많이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변화의 정도가 60년 전의 혼례보다는 덜 하다고 할 수 있다.
사실 한국사회는 묘지 면적이 전 국토의 1퍼센트를 차지하고 매년 여의도 크기만한 묘지가 새로 조성되어 국토의 효율적 이용이라는 측면에서 심각한 문제점을 야기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유교식 매장 풍속을 더 선호하고 있다. 조상님을 명당 자리에 묻어야 후손이 음덕을 입을 수 있다는 생각도 크게 변한 것이 없다. 한식과 추석 때 조상의 묘소를 찾아가는 길은 교통난 때문에 갈수록 힘들어져도 사람들은 기를 쓰고 집을 나선다.
또한 제삿날이 되면 흩어져 살던 형제들과 가까운 친척들이 어김없이 큰집으로 모인다. 비록 제사 드리는 시간을 자정에서 저녁시간으로 옮긴 집이 많아지고 제상에 멜론과 바나나가 올려지며 제례 순서는 집집마다 약간씩 차이가 나지만, 육교 위에서 노점상 할아버지로부터 산 『가례서식』을 뒤져가며 조상님께 정성스레 음식과 술과 절을 올린다.
오늘날 우리의 생활 속에 남아 있는 전통은 대부분 유교적인 것이다. 이는 유교를 종교로 생각하는 사람은 0.5퍼센트에 불과하지만 유교적인 생활방식과 윤리에 따라 생활한다는 사람은 94.5퍼센트에 이른다는 최근 서울대학교 종교문화연구소의 여론조사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런데 이러한 유교적 생활관습이 다른 어떤 분야보다도 뿌리 깊게 남아 있는 곳이 바로 관혼상제이다. 따라서 전통적인 관혼상제가 근대에 들어와 어떻게 변화했는가를 살펴보면 전통과 근대의 충돌과 변용의 모습을 짚어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전통적인 관혼상제
관혼상제는 관례 · 혼례 · 상례 · 제례를 줄인 말이다. 각각의 용어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관혼상제는 예(禮)라고 할 수 있다. 요즘 사람들은 예를 의식절차나 에티켓 정도로만 알고 있지만 근대 이전 유교가 지배했던 시대에는 훨씬 범위가 넓었고 비중도 컸다. 더욱이 이 예는 동양에만 존재하는 독특한 것으로 굳이 서양과 비교하자면 관습법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선진시대 공자와 순자 등에 의해 체계화된 예는 처음에는 정치 · 경제 · 문화 등 사회의 모든 분야를 규정하는 하나의 규율권력이었다. 그러던 것이 한 · 당대에 오면 오례(五禮)와 가례(家禮)로 분리되어 재정립되었다. 오례는 왕실 · 국가의 예로 길례(吉禮) · 흉례(凶禮) · 빈례(賓禮) · 군례(軍禮) · 가례(嘉禮)를 말한다. 가례는 개인 집안의 예로 관례 · 혼례 · 상례 · 제례, 즉 관혼상제를 말한다. 이 가례를 사례(四禮)라고 부르기도 한다.
대체로 가례(家禮)에서의 관례와 혼례는 오례에서의 가례(嘉禮)에 해당되고, 상례는 흉례에, 제례는 길례에 해당된다. 국가 간의 외교관계를 규정한 빈례와 군사와 관련된 군례는 가례(家禮)에는 없다. TV사극 「용의 눈물」에서 태종이 대군들을 장가들이면서 혼례라고 하지 않고 가례(嘉禮)라고 부른 것도 이 때문이었다.
특히 예는 송대에 오면 성리학과 결합하면서 성리학의 이상인 천리(天理)를 현실사회에 구현한 형태로 인식되었다. 이는 성리학의 영향을 절대적으로 받은 조선사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학인(學人)들은 예를 바로잡는 것이야말로 세상을 바로잡는 것이라고 보고 예를 원칙에 맞게 행하려고 노력하였다. 이에 따라 17세기 중엽에는 예송(禮訟)이라 하여 왕실의 전례문제를 둘러싼 격렬한 논쟁이 두 차례나 일어나기도 했다.
어떤 상복을 언제까지 입을 것인가, 제사를 어떻게 지낼 것인가 하는, 지금 보면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은 관혼상제에 관한 문제들을 당시 사람들은 국가와 집안을 올바로 이끌어가는 문제와 직결된다고 간주했던 것이다.
우리가 전통적인 관혼상제라 말하는 것은 대부분 조선시대에 형성된 것이다. 그리고 조선시대 관혼상제의 기준이 된 것은 주희가 저술한 『주자가례』였다. 『주자가례』는 고려 말에 도입되었고 15세기에는 국가가 강력히 시행을 장려하였지만, 당시만 해도 사대부들조차 아직 불교나 민간신앙에 바탕을 둔 이전의 생활관습에 젖어 있었던 터라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다.
『주자가례』는 16세기 들어 성리학적 소양을 강하게 지닌 사림(士林)을 중심으로 퍼지기 시작하여 17세기 후반에 가서야 양반사회에 일반화될 수 있었다. 18세기로 넘어가면 중인이나 평민들도 경제력의 상승에 힙입어 행하기 시작하였으며,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사회 전체로 확산되었다. 추석이 되면 성묘를 가겠다고 온 나라가 들썩거리는 지금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비슷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물론 조선시대 사람들이 관혼상제를 『주자가례』대로만 행한 것은 아니었다. 『주자가례』 자체가 소략한 부분이 없지 않고 또한 중국과 조선의 풍속이 달랐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자가례』를 기본으로 하면서도 조선의 풍속을 참작한 예서(禮書)가 저술되어 관혼상제를 행하는 준거가 되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서가 조선 중기에는 신의경과 김장생이 지은 『상례비요(喪禮備要)』였고, 후기에는 이재가 지은 『사례편람(四禮便覽)』이었다. 요즘사람들이 제사 지낼 때 많이 참조하는 『가례서식』도 실은 『사례편람』에서 뽑아 정리한 것이다.
『주자가례』는 가문이나 당색, 지역이나 신분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시행되었다. 조선 후기에 ‘가가례(家家禮)’라는 말이 출현하는 것도 이러한 연유 때문이었다. 또한 실학자였던 성호 이익은 양반이든 평민이든 한결같이 『주자가례』를 행하는 당시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경제적인 능력이 없는 평민들을 위해 『서인가례(庶人家禮)』라는 책을 따로 만들어 보급할 것을 주장하기도 했다.
구식에서 신식으로
전통사회에서 근대사회로의 이행은 생활관습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개항과 함께 들어오기 시작한 서구문화의 영향으로 ‘구식’은 점차 사라지고 ‘신식’이 행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는 관혼상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신식 관혼상제가 개항 이전에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784년(정조 8) 이승훈에 의해 최초로 조선 땅에 교회가 창설된 이후 신자들을 중심으로 천주교식 의례가 행해졌기 때문이다. 국가는 성리학적 사회윤리에 어긋난다 하여 이를 금지시켰지만 신앙심에서 우러나온 행동을 막을 수는 없었다. 결국 국가의 탄압이 가해질 수밖에 없었으니, 그 대표적인 사건이 1791년에 일어난 신해박해(辛亥迫害)였다.
이 사건은 전라도 진산 고을의 양반교인이었던 윤지충이 모친상을 당했을 때 신주를 모시지 않고 제사도 드리지 않고 천주교식으로 장례를 치른 것이 빌미가 되어 일어났다. 결국 윤지충은 강상(綱常)을 범한 죄로 사형당하고 말았다. 집에 불이 나면 제일 먼저 사당으로 뛰어들어가 신주를 들고 나올 정도로 조상섬기기를 중시하고 효를 최고의 덕목으로 여겼던 당시 사람들에게 윤지충의 행동은 아비도 없고 임금도 없는 패륜적인 행동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이후 계속되는 국가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천주교는 조선사회에 퍼져 나갔으며 신자들을 중심으로 천주교식 의례도 계속 행해졌다.
이러한 신식 의례는 조선이 제국주의 열강에 강제로 문을 열고 서구문화가 유입되면서 본격적으로 행해지기 시작했다. 반면 구식 의례는 점점 사라져갔으니 1895년 시행된 단발령은 비록 일본의 주도 아래 이루어진 것이었지만 더 이상 유교적인 가치와 윤리가 절대적인 권위를 지니지 못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머리를 깎음으로써 관례를 행할 수 없게 되었음은 물론이고 신체는 머리카락 하나까지도 부모로부터 받지 않은 것이 없다는 전통적인 윤리관념이 무너져 버렸던 것이다. 지방의 유생들이 단발령에 반대해 의병을 일으키는 등 격렬하게 반발하였지만 이러한 흐름을 완전히 되돌려놓을 수는 없었다.
개항 이후 기독교도(개신교도) 사이에 ‘복수결혼(福手結婚)’이라는 것이 유행한 적이 있다. 복수결혼이란 가까운 친척들만이 지켜보는 가운데 찬물을 떠놓고 신랑이 신부의 댕기머리를 쪽 지어 얹어 주고 신부는 신랑의 머리를 상투 틀어주는 것으로 식이 끝나는 결혼방식이다. 여기서 복수란 쪽을 지어주고 상투를 틀어주는 사람을 부르는 말이다. 이러한 결혼방식은 신식 결혼식이라고는 하지만 조선시대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 행해졌던 빈자결혼(貧者結婚)과 별 차이가 없었던 것이며 따라서 비용이 많이 드는 전통혼례를 행하지 못했던 사람들 사이에 인기가 있었다.
그러나 명실상부한 최초의 신식 결혼식은 아펜젤러의 주례 아래 1888년 3월 정동교회에서 기독교식으로 치러진 신자 한용경과 과부 박씨의 결혼식이었다. ‘예배당 결혼’으로 불리기도 했던 이러한 신식 결혼식은 기독교가 전파되어 곳곳에 예배당이 세워지면서 점차 늘어갔다. 한편 천주교회에서는 신부의 집전으로 천주교식 혼례인 혼배성사(婚配聖事)가 행해졌으며, 1900년대에는 불교에서도 법사(法師)가 주례하는 불식 화혼법(佛式 花婚法)이라는 개량혼례가 등장하였다. 또한 천도교에서도 독자적인 신식 혼례방식을 마련하였다.
이처럼 주로 종교와 관련을 가지면서 행해졌던 신식 혼례는 1930년대에 이르면 또 한 번의 커다란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당시에는 신식 결혼을 흔히 ‘사회결혼(社會結婚)’이라고 불렀는데, 이러한 사회결혼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면서 교회나 불당만으로는 이를 다 수용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이러한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결혼 전문예식장이 ‘○○예식부’ 라는 이름으로 생겨나게 되었다. 이에 따라 혼례복을 빌려 주는 가게와 신부화장을 전문으로 하는 미장원도 생겨났다.
이렇게 신식 혼례가 행해지게 된 데에는 종교적 · 경제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양반과 유교가 조선을 망하게 하였다는 부정적인 인식의 탓도 컸다. 『동아일보』 등 당시 신문을 보면 금전과 시간과 노력을 허비하는 전통혼례와 상례의 폐해를 시정하자는 기사가 자주 등장하고 있다.
이제 우리 조선서 현재 고유한 혼상(婚喪)제도의 예폐(禮弊)를 봅시다. 그 얼마나 무용한 노력과 귀중한 금전과 시간을 공연히 허비하는가. 현 사회는 이러한 도덕과 제도가 존재하며 고수한 만큼은 사회도 변하였다. 이것이 원래 중국문화임은 다시 말할 것도 없거니와 타국 문화를 수입한 그 시대와 그 국가에는 태평하였고 백성은 안정하야 의식이 족할 그때에 상당히 숭배할 도덕이나 현세에는 다만 귀중한 금전과 시간을 허비할 뿐이라. 이에 대하여 우리는 자고(自顧)하여야 할 것이다. 종래 습관을 개량하자는 의미에 있어서 우리는 우리다운 문화를 새로이 건설하자.『동아일보』, 1926년 5월 25일
이러한 인식은 특히 신교육을 받았거나 유학을 갔다온 신지식층 사이에 많았다. 이들을 풍속 개량과 구관습의 개혁 등을 주장하면서 유교적 관혼상제의 타파를 최우선의 과제로 여겼던 것이다. 그리하여 계명구락부 등 당시 사회계몽단체는 상고문(上告文)을 읽는 것으로 결혼식 절차를 대신하는 고천식(告天式) 개량결혼식을 보급하기 위해 힘썼는데 이러한 방식은 간단할 뿐더러 비용이 거의 들지 않는 까닭에 일반사람들의 호응이 매우 컸다.
전통상례에 큰 변화를 가져온 계기는 1912년 총독부령으로 공포된 24개조의 ‘묘지, 화장장, 매장 및 화장 취체규칙’이었다. 이 규칙의 주요 내용은 매장보다는 화장을 권장하고 매장을 할 경우 신고하도록 하며 개인묘지보다는 공동묘지를 이용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당시의 실정에 맞지 않아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으며 결국 1918년과 1920년에 내용을 완화하여 개정하였다. 이 역시 기존의 관습과는 많이 배치되었으나 화장하는 사람들이 조금씩 늘어나는 등 효과가 전혀 없지는 않았다. 더욱이 1940년에 묘지규칙이 개정되어 매장이 신고제에서 허가제로 변하면서 화장은 더욱 늘어났다. 유교식 상례보다는 절차가 대폭 간편해진 기독교식 상례가 성행하고 사회단체들이 주관하는 연합장(聯合葬)이나 사회장(社會葬)이 출현한 것도, 신문의 부고(訃告)와 장의사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1934년 조선총독부가 제정 공포한 ‘의례준칙’은 국가가 최초로 법으로 국민의 생활관습을 규제하려 했다는 데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시행되고 있는 가정의례준칙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전통 혼 · 상 · 제례가 지닌 허례허식의 폐해를 극복한다는 취지로 만들어진 이 준칙은 전통의례에 기반하면서 세부 내용에서는 당시 실정에 맞게 대폭 간소화한 것이었다.
즉 절이나 교회뿐만 아니라 신사(神社)에서도 혼례식을 거행하게 하였으며 장사를 지내는 기간은 5~14일로, 상복을 입는 기간은 30일~1년으로 단축하였다. 또한 제사는 기제(忌祭)와 묘제(墓祭)만을 허락하고 기제의 경우 2대까지만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이러한 내용들은 전통의례에 비해 치르기 쉽고 경제적이고 시간적으로 절약이 되어, 없는 사람들에게는 호응을 받았지만 유교의 3년상과 4대 봉사(四代奉祀)를 절대적 가치로 여겼던 양반입네 하던 사람들에게는 매우 모욕적이며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가정의례준칙
해방 이후 양키문화로 상징되는 미국문화의 유입은 서구적 생활양식이 전 사회로 퍼져나가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일제의 식민통치시기에도 유지되었던 양반체제가 토지개혁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붕괴돼 나가면서 이러한 경향은 더욱 심화되었다. ‘구식’에서 ‘신식’으로의 변화가 점점 속도를 더해갔던 것이다.
박정희 정권이 추진한 근대화 정책도 이러한 변화에 한몫을 했다. 1970년 이후 산업화와 도시화가 본격화되면서 기존의 대가족 구조가 소가족 구조로 변화하고 사회의 공동체적 특성이 약화되는 등 전통적 생활관습을 행할 수 있는 기반이 점점 사라졌다. 더욱이 근대화 과정에서 합리성이 절대적인 기준으로 자리 잡으면서 전통적인 것은 대단히 비효율적인 것으로 치부되었다. 농촌에서 새마을운동을 전개하면서 근대화란 미명 아래 전통문화를 미신으로 몰아 파괴한 것도 이 와중에 생긴 일이었다.
1969년 1월 정부는 ‘가정의례준칙에 관한 법률’을 제정 · 공포하였다. 이 법률은 그 목적을 혼례 · 상례 · 제례 · 회갑연 등 가정의례를 행함에 허례허식을 일소하고 의식절차를 합리화함으로써 낭비를 억제하고 건전한 사회기풍을 진작함에 두고 있었다. 이 법률은 이를 위해 청첩장 발송, 신문 부고, 화환 진열, 답례품 증여, 굴건제복 착용, 만장 사용, 주류 및 음식물 접대 등 7개 항목에 대해 금지조항을 두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처음에는 아직 처벌 규정을 두지 않아 실효를 거두지는 못했다. 그리하여 1973년 벌칙 규정을 둔 ‘가정의례에 관한 법률’로 개정하고 ‘시행령’과 ‘가정의례준칙’을 대통령령으로 제정하여 현재의 골격을 갖추었으며 이후 몇 번의 부분적인 개정을 통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때 정해진 가정의례준칙의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약혼식은 약혼서 교환으로 대신하고, 함잡이를 보내는 행사는 하지 않으며, 상복은 따로 마련하지 않고, 장례는 3일장을 하며, 탈상은 100일까지 하고, 제사는 2대까지만 지내도록 하는 것 등이었다.
가정의례준칙을 제정할 당시 1인당 국민소득은 200달러를 조금 넘었고 저축률은 17퍼센트에 불과해 경제개발을 위해서는 많은 돈을 외국에서 빌려오고 국가 전체적으로 허리띠를 졸라매야 했다. 따라서 허례허식과 낭비적 요소를 줄인 이 준칙의 시행은 나름대로 의미와 성과가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가정의례준칙은 큰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정부의 단속이 철저하지 못했다는 데도 이유가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관혼상제에 대한 국민의 일반적인 정서와 거리가 있기 때문이었다. 당시 전통적 생활관습은 내용에서는 많은 변화를 겪었지만 그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사회의 계층이동이 활발해지면서 전통적 유교 의례는 더욱 확산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것은 유교식 의례의 시행이 자신이 뼈대 있는 가문 출신임을 드러내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래 양반은 두 말할 것도 없거니와 솔직히 출자가 불분명한 집안들조차 더욱 유교식 의례에 매달리게 되었다.
또한 가정의례준칙은 일제시기 시행된 의례준칙과 마찬가지로 국민의 생활관습을 법으로 규제한다는 데 근본적인 한계가 있었다. 그 법의 내용이 실제의 현실과 차이가 클 때는 더욱 그러했다. 예로부터 상부상조의 전통이 강했던 우리 사회에서 길사(吉事)나 흉사(凶事)를 치르면서 주위에 알리지 않고, 먼길을 온 손님들에게 음식을 대접하지 않는다는 것은 허례허식을 따지기 앞서 사람된 도리로 있을 수 없는 일로 여겨졌다. 그러니 법으로 금한다고 없어질 리가 없었다.
더욱이 경제발전으로 국민의 생활수준이 높아지면서 법과 현실과의 괴리는 점점 더 벌어졌다. 이제는 신문에 가끔 등장하는 특급호텔에서의 결혼식 허용 문제나 병원 영안실과 대형 예식장에 대한 과대 화환 단속 기사가 간간이 가정의례준칙의 존재를 깨닫게 해주고 있을 뿐이다. 몇년 전 경비행기까지 동원한 한 국회의원 아들의 호화 결혼식이 장안의 화제가 되고, 지금도 간혹 호화 TV 쇼를 연상케 하는 결혼식이 벌어져 눈살을 찌푸리게 하지만 그런 혼례의 당사자들이 처벌받았다는 소식은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우리에게 전통이란 무엇인가
생활관습은 법으로 규제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생활관습은 그것을 행하는 사람들의 의식, 그것이 행해지는 사회경제적 조건과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사회의 여러 분야 가운데서 변화를 가장 늦게 수용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조선 초기 국가에서 강제적으로 『주자가례』의 시행을 강요했지만 지배층인 사대부들조차 이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주자가례』에 입각한 유교적 관혼상제가 사회에 뿌리내린 것은 그로부터 200년이 지난 뒤였다. 역시 마찬가지로 근대사회로 들어와 서구문화가 안방을 차지하고 서구적 생활방식이 일반화됐지만 관혼상제 분야만큼은 아직도 옛 모습을 상당 부분 유지하고 있다.
새로운 생활관습이 완전히 자리 잡기까지 옛 생활관습과 함께 공존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러한 옛 생활관습을 전통이라 부른다. 그래서 옛것과 새것을 ‘전통’과 ‘근대’라는 말로 대비시켜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보는 데는 의문이 없지 않다.
전통은 전해 내려오는(傳) 계통(統), 즉 후세에 계승된 과거의 생활양식과 문화, 제도와 이념 등을 말한다. 그러나 흔히 생각하듯이 전통은 오랜 옛날부터 변하지 않고 존재해온 고정된 어떤 것은 아니다. 새로이 생성하기도 하고 변화하기도 하고 또한 소멸하기도 하는 역사적 산물인 것이다.
따라서 언제가 될 지는 모르지만 앞으로 한국사회에 뿌리내릴 ‘근대적인’ 생활관습도 새롭게 형성될 또 다른 전통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수백 년간 행해져온 기존의 유교적 생활관습과 전혀 다른 모습일지, 아니면 별반 다를 게 없는 모습일지 지금은 장담할 수 없다.
그러나 이렇게 말할 수는 있지 않을까. 제도건 관습이건 모든 것은 형식과 내용을 함께 지니고 있다. 이는 전통이나 관혼상제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까지 내용보다는 형식에 너무 얽매여왔다. 현재 한국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문중 중시, 혈통 중시 경향도 형식에 얽매이면서 나타난 전통의 왜곡된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전통적 관혼상제가 담고자 했던 내용의 진정한 의미를 다시 되새겨보고 그 의미를 새로운 사회변화에 맞게 되살릴 때 비로소 새로운 전통으로서의 근대적 관혼상제가 우리 사회에 뿌리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전통이 지닌 좋은 점도 창조적으로 계승되어 새로운 전통을 이루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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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한 세기는 우리에게 과거 수백년에 맞먹는 변화가 일 어난 격동의 세기였다. 식민지와 전쟁을 경험했으며 이데올로기의 극 한 대립과 과학기술의 놀라운 발전이 한데 뒤..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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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관혼상제 어떻게 변했나 – 우리는 지난 100년동안 어떻게 살았을까 1, 한국역사연구회, 역사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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