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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식문화의 자화상

의식주, 어떻게 바뀌었나

외식을 글자대로 풀이하면 ‘집 밖의 식사’가 된다. 그러나 보다 정확히 개념을 따져보자면, 도시락을 싸 가지고 공원에 가서 먹는 경우와 자장면을 집으로 배달시켜 먹는 경우 어느 것이 외식에 해당할까. 후자가 외식의 범주에 들어갈 것이다. 외식의 요건에서 중요한 것은 먹는 장소가 아니라 제공된 음식의 성격이기 때문이다. 외식이란 다른 사람이 상품으로 만든 음식과 서비스를 구매하여 소비하는 행위이다. 따라서 외식은 상품과 화폐경제가 발달한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타나는 식사형태라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외식이 근대사회에서 나타나는 식사형태라면, 외식을 하는 방식 즉 외식문화는 그 나라가 어떠한 근대화 과정을 거쳤느냐에 따라 다를 것이다.

주막에서 시작된 외식문화

오늘날 농촌과 도시 중 어느 쪽에서 외식이 활발하게 일어날까? 일터와 집이 지척에 있고, 많은 식품을 자급자족하는 농촌사회보다 집과 일터가 멀리 떨어져 있고, 모든 것을 소비에 의존하는 도시에서 외식이 활발하게 일어나리라는 것은 쉽게 추측할 수 있다. 외식에 대한 조사보고서를 보면 농촌에서는 1년에 한 번도 외식을 하지 않는다고 응답한 가정이 많았다. 즉 대중 외식의 시대라고 하는 오늘날에도 외식문화는 바로 도시인들의 문화인 것이다. 이러한 상식에서 본다면 전 인구의 90퍼센트 이상이 농민이던 전통사회의 식사형태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이동이 없던 사회라고 해도 특별한 경우는 있었다. 가령, 춘향이의 편지를 전하러 남원에서 한양까지 길을 떠나는 방자가 있었다면 과거를 보러 멀리 한양까지 걸어가야 하는 가난한 선비도 있었다. 그들은 먹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을까? 몇 가지 해결 방안이 있을 수 있다. 우선 밀개떡같이 간단한 음식을 싸 가지고 가서 식사를 해결하는 것이다. 그러나 며칠씩 걸리는 긴 여행이라면 상하지 않고 휴대가 편하며 먹기 쉬운 특별한 음식이 필요했다. 이런 용도로 애용된 것이 바로 미숫가루였다. 샘물을 한 바가지 퍼서 미숫가루를 풀어서 마시면 충분히 한끼 식사가 되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은 얻어먹는 것이었다. 마침 지나던 마을에 상가나 잔칫집이 있으면 한끼 얻어먹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으며, 가난한 여염집이라도 집에 들어온 사람은 설사 그가 거지라도 박절하게 대접하지 않고 밥상을 차려주는 것이 당시의 인심이었다.

돈푼이라도 있는 여행자라면 이런 구차한 방법을 쓰지 않아도 좋았을 것이다. 이런 특별한 여행자들을 위해 마련된 음식점들이 드물지 않게 있었기 때문이다. TV사극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주막이 그것이다. 이런 주막의 모습은 풍속화를 통해서 생생하게 알 수 있다. 행인이 다니는 길 쪽으로 아궁이를 내고, 아궁이 위에는 김이 나는 해장국이 배고픈 행인을 불렀다. 주모는 아궁이 뒤쪽에서 술과 아궁이의 음식을 떠서 바로 평상 위의 손님에게 건네준다. 뒤쪽에는 방도 여러 칸 준비되어 있다. 이런 모습에서 알 수 있듯이, 주막은 단순한 음식점이라기보다 술집과 밥집과 여관을 겸한 종합적인 숙식업소였다.

주막

장꾼으로 보이는 손님이 주막에서 식사를 마치고 숭늉을 마시고 있다. 차양 밑에 걸려 있는 종이술이 달린 표식은 ‘국수를 판다’는 뜻의 간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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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특별한 여행자만을 대상으로 한다면 전통시대의 외식문화는 이러한 주막에서 더 이상 발전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조선 후기에 오면 장시의 발달과 함께 새로운 생활 스타일을 가진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바로 상인계층이다. 이들은 지역에 따른 물품의 시세 차이를 이용해서 돈을 버는 사람들, 그래서 농민과는 정반대로 전국을 돌아다니던 사람들이다. 이들의 등장과 함께 주막은 더욱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큰 장터 주위에는 주막들이 밀집하여 주막거리를 이루었으며, 장날이면 여기저기 작은 노천 음식점들도 생겨났다. 또 일반 농민들도 장이 서는 날이면 생산한 물건을 내다 팔고 필요한 물건을 사기 위해 무리 지어 장에 모여들었으며, 이러한 노천 음식점의 고객이 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주식과 부식이 구분되어 있는 우리 음식은 간편하게 상품화하기 어려운 난점이 있다. 이에 음식점 주인들은 보다 조리가 쉽고 먹기가 간편한 메뉴의 개발에 주목하게 되었다. 이러한 필요에서 한 그릇에 주식과 부식을 함께 담은 간편한 음식이 등장하였다. 바로 장국밥, 비빔밥, 국수 류가 그것이다. 몇 가지 나물과 밥을 고추장에 비벼서 먹는 비빔밥이나, 고깃국물에 밥을 만 장국밥은 장꾼들에게 든든한 한끼 식사가 되었고, 그만한 여유가 없는 사람들은 국수 한 그릇으로 요기를 하였다. 장터를 중심으로 발달한 이러한 외식문화는 대중적 외식문화의 싹이라고 볼 수 있다.

요릿집과 밀실정치

개화기와 일제시기를 거치면서 우리나라에는 구미인, 일본인, 중국인들이 들어오고 이들로부터 새로운 음식이 전래된다. 한 나라의 문화는 끊임없는 교류를 통해 발전한다고 했을 때, 외국음식의 전래는 우리 음식문화를 한 단계 비약시키는 계기일 수 있었다. 그런데 개화기와 일제시기를 거치면서 나타난 외식문화의 변화는 바로 양극화였다. 조선 후기 장터를 중심으로 상인과 장꾼들에게 저렴한 음식을 공급하던 대중외식이 답보 상태를 걷는 반면, 상류층을 대상으로 하는 고급 요릿집들은 문전성시를 이루게 된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1910년대 토지조사사업의 결과, 농촌에서는 소작권을 잃은 많은 농민들이 생겨나고, 이들은 일자리를 찾아서 도시로 몰려들었다. 그래서 1920년대에는 전반적인 인구 증가와 함께 도시 인구가 급팽창했다. 모든 것을 소비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도시 인구의 팽창 현상은 외식의 소비자층이 형성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시기에 도시로 몰려든 인구는 일거리를 찾아서 무작정 도시로 들어온 도시 빈민들로 구매력이 거의 없는 사람들이었다.

이 시기에 도시 인구의 직업 구성에서 1위는 ‘가사사용인’으로 되어 있다. 이들은 잘사는 집의 행랑에 기거하면서 남자는 부정기적으로 그 집안 일을 보아주고 여자는 식모 노릇을 하는 사람들이다. 직업 구성의 제2위는 지게꾼 등 일용노동자들이었다. 이들의 임금은 일당 최고 40전을 넘지 못하였으며, 그나마 매일 일거리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40전의 일당으로 4~5명의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는 일용노동자가 한 그릇에 15전 하는 설렁탕을 사 먹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운수 좋은 날』의 인력거꾼 박첨지는 운수가 ‘억세게’ 좋아야만 집으로 설렁탕을 사들고 가면서 으스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상류층은 달랐다. 좋은 서비스와 맛있는 음식을 상품화한 한식, 일식, 중식, 양식 등 고급 요릿집들이 일제히 문을 열고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러한 음식점을 이용한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한국에 거주하는 일본인 고관이나 사업가, 중국인 무역가들, 일부 부유한 조선인들이었다. 이들은 가끔 요릿집에서 파트너를 접대하거나 별미를 즐겼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아주 특별한 외식만을 위해서라면 그처럼 많은 요릿집들은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요릿집의 용도는 다른 곳에 있었다.

요릿집이 성행한 것은 당시의 파행적인 정치문화와 깊은 관련이 있다. 그것은 바로 밀실정치 문화이다. 이는 모든 요릿집들이 많은 ‘은밀한 방’을 가지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다.

요릿집 방들은 친일파들의 집합 장소였다. 당시 부유한 조선인들은 자신의 재산을 유지하기 위해서, 또 돈벌이가 될 새로운 사업을 찾기 위해서 끊임없이 정보를 얻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친일파들끼리 또는 총독부 관리와 긴밀한 만남을 자주 가져야 했다. 이렇게 한 잔 거하게 먹이고 청탁을 할 수 있는 장소로는 요릿집이 제격이었다.

또한 일제 식민통치에 반대하여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모임 역시 요릿집 밀실에서 이루어졌다. 그 가장 대표적인 예가 1919년 3월 1일 있었던 민족대표들의 모임이다. 이날 29명의 민족대표들이 모여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곳은 바로 태화관이라는 요릿집이었다. 경찰에 이들의 거사를 알린 사람은 태화관 주인 안순환이라는 사람이다. 안순환은 본래 고종의 수랏간 내인으로, 나라가 망한 뒤 명월관이라는 궁중요리 전문점을 내었다. 그리고 1918년 명월관이 소실되자 인사동에 태화관을 차린 것이다. 또 1922년 송진우, 이승훈 등이 민립대학 설립을 위한 발기 대회를 연 곳도 식도원이라는 음식점이었으며, 1925년 조선공산당의 결성식도 아서원이라는 청요릿집에서 이루어졌다.

이와 같이 식민지 권력에 아부하여 돈을 벌려는 친일파들이나 나라의 독립을 되찾겠다는 독립운동가들이나 모든 모임을 요릿집 밀실에서 개최하였다. 이것이 일제시기 요릿집이 성행한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였다. 식민통치라는 억압적인 정치형태가 음성적인 요릿집 밀실문화를 만들어냈다고 볼 수 있다. 요릿집 밀실문화는 해방 이후 계속되어 5·16 이후에는 이른바 혁명주체들이 직접 요릿집을 운영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문화는 오늘날에도 형태를 달리하여 존재한다. 바로 고급 룸살롱으로 대표되는 밀실 음주문화가 그것이다. 한 병에 수십만 원을 호가하는 양주를 파는 고급 룸살롱이 성행하고 있다는 사실은 공개적인 장소에서 하지 못할 밀거래가 기업이나 정치인들 사이에서 여전히 이루어지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 1~2고급 요릿집의 안과 밖

      왼쪽 사진은 1910년대의 요정이다. 일본인들이 많이 들어오면서 대문이 일본화되었다. 오른쪽은 명월관의 내부로, 당시 음식점 · 연회장 · 유흥장의 역할을 했던 요릿집 안을 엿볼 수 있다.

자장면의 황금시대

우리 외식사에서 자장면만큼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 받은 품목은 찾아보기 힘들다. 왜 하필 자장면이었을까?

중국음식이 우리나라에 전래된 역사는 100년이 넘는다. 1882년 임오군란 때 군인들과 함께 중국 상인들이 들어오면서 중국 음식도 따라 들어왔다. 일제 말기 조선에 거주한 화교가 약 6만 5천 명이었고, 중국음식점의 수는 300여 개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중국음식점에 한국인들이 드나들기는 하였지만 아직 한국인은 주요 고객이 아니었다. 중국음식의 한국화는 해방 이후에 이루어졌다. 한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화교들의 처지에 중대한 변화가 생겨났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가 화교들의 무역을 금지시킴에 따라 많은 화교들이 일자리를 잃게 되었으며, 대륙이 공산화되어 고향에 돌아갈 수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많은 화교들은 전업을 모색하였는데 적은 자본과 가족 노동력을 이용하여 운영할 수 있는 음식점이 가장 제격이었다. 이러한 화교 내부의 사정에 따라 1948년부터 1958년까지 중국음식점 수가 332개에서 1,702개로 무려 5배 이상 늘어났다.

일제시기 중국음식점

임오군란 직후 약 3천 명의 중국군인과 많은 중국인들이 들어왔다. 이들 중국인들은 무역업에 종사하거나 적은 자금으로 호떡집이나 국수집을 경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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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을 주요 고객으로 삼게 되자, 장삿술에 뛰어난 화교들은 중국음식을 한국인의 입맛에 맞게 변형시키기 시작하였다. 향료를 줄이고, 매운 맛을 좋아하는 한국인들을 위해 후추와 고추를 많이 사용하였다. 그리고 구하기 힘들고 값비싼 재료 대신 한국에서 나는 당근, 양파 등을 이용하였다. 자장면은 장에 물을 타서 연하게 만든 소스를 썼으며, 탕수육 또한 본래 음식과는 다르게 전분가루를 묻혀 바삭바삭하게 튀겨서 한국인의 입맛에 맞추었다. 이리하여 중국에서는 맛볼 수 없는 한국화된 ‘중국음식’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한편 1950년대 후반부터 외식 소비자층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1950년대 후반 원조물자를 토대로 하는 삼백산업을 필두로 1960년대에는 경제개발이 본격화되었고, 도시 인구가 급증하였다. 농촌의 젊은 인력들이 대거 도시로 유입되어 도시의 저임금 노동자군을 이루었으며, ‘회사원’이라는 이름의 화이트칼라층도 광범하게 생겨났다. 이들은 외식의 새로운 소비자들이었다. 자장면으로 대표되는 중국요리는 비교적 값이 싸고 집에서 먹지 못하는 별식이라는 신선함으로 인해 외식거리로 급부상하였다. 작업장이나 사무실 상점까지 전화 한 통화면 어디든 신속하게 배달되었기 때문에 근로자들뿐만 아니라 회사원, 도시 소상인들의 한끼 식사로 애용되었다.

그런데 자장면이 만일 밥보다 비싼 음식이었다면 그와 같은 전성기를 누릴 수 있었을까? 이런 점에서 자장면 황금시대가 열리게 된 이유는 또 하나 더 있다. 바로 값싼 밀가루의 공급이다. 우리나라는 본래 벼농사를 짓기 때문에 밀가루 음식은 별식으로 먹는 정도였다. 남한에서 생산된 밀에만 의존했다면 화교들은 값싼 밀가루를 대량으로 공급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자장면이 값싼 음식으로 밥에 대해 가격 경쟁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1956년부터 도입되기 시작한 미국산 잉여농산물 때문이었다. 미국산 잉여농산물은 한국 곡물 생산량의 40퍼센트를 차지하였으며 그 가운데 밀이 70퍼센트를 차지했다. 따라서 밀가루 값은 쌀값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쌌으며, 화교들은 싼값에 자장면을 공급할 수 있었다. 또 박정희 정권은 분식 먹는 날을 정하는 등 밀 소비를 부추기는 범국민운동을 벌였으며, 이러한 분식 바람을 타면서 자장면은 가장 대중적인 외식 품목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외식의 대중화

대중외식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은 1980년대 중반부터이다. 이 시기부터 외식인구가 팽창하고 도처에 음식점들이 생겨나며 가계의 소비지출에서 외식비의 비중이 급격히 증가했다. 왜 이 시기부터 외식붐이 일어나게 된 것일까?

(단위 : 원)
연도 소비자지출 식료품비(A) 외식비(B) 외식비율
[B/A(%)]
1982255,41697,7526,5126.7
1983285,492102,5337,4017.2
1984312,415108,5538,4277.8
1985336,157113,9279,2609.1
1986339,008120,64611,6209.6
1987388,323134,99917,38512.9
1988435,887154,83322,57814.6
1989561,650181,96136,74020.2
1990649,969211,11845,69321.6
1991779,600247,90056,70022.9
* 『서울통계연보』 1987년, 1992년.
〈표 1〉 도시근로자의 가구당 월평균 외식비 지출현황

무엇보다 소득증대가 가장 중요한 원인이다. 외국의 외식산업계에서는 GNP 3천 달러에서부터 외식산업이 본격화된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사정은 비슷했다. 우리나라의 국민소득은 1970년대부터 꾸준히 증가하였고, 1980년대 중후반기에 이르면 국민소득 3천 달러 시대로 진입하였다. 특히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블루칼라 노동자들의 임금인상이 화이트칼라에게도 파급되었고, 이후 도시근로자 계층의 가처분 소득이 확대되었다. 이는 자동차 보유와 함께 외식을 활성화하고 고급화하는 기반이 되었다.

대중외식의 시대를 여는 데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이 미친 영향을 간과할 수 없다. 이 행사를 계기로 정부에서는 고도의 소비문화를 부추겼으며, 많은 외국계 패스트푸드점들이 들어오면서 외식문화를 선도하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은 대중외식의 시대에 외식의 내용에는 어떤 변화가 나타나고 있을까? 〈표 2〉는 서울의 각종 음식업종 점포 수의 변화를 나타내는 것이다.

(단위 : 원)
업종 중국식 한식 일식 양식
연도
19781,1812,854297646
19833,003(254%)8,357(297%)566(191%)2,793(432%)
19883,157(105%)14,141(169%)1,374(243%)5,882(211%)
19933,994(125%)26,909(190%)2,293(167%)9,586(163%)
* 한국음식업협회 자료 : 박은경, 「중국음식의 역사적 의미」, 『한국 문화인류학』26. 1992년.
(비고) 백분율은 해당연도/이전 비교연도로, 점포 수의 증가 비율을 나타낸다.
〈표 2〉 서울의 각종 음식업종 점포 수의 변화

〈표 2〉에서 보면 외식 품목에서 서열상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식은 산업화 과정에서 그 소임을 다하고 저렴한 대중음식의 하나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중국식과 대조적으로 그 동안 양이 적고 맛이 없으며 세련되지 못한 음식으로 여겨지던 일식이 오히려 고급음식으로 부각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1970년대 후반부터 일본이 국제사회에서 경제대국으로 부상하면서 일본음식의 지위가 상승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1980년대 대중외식의 시대를 열기 시작한 것은 무엇보다 양식이다. 1980년대를 거치면서 햄버거와 피자는 자장면을 물리치고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이 가장 즐겨먹는 외식품목으로 지위를 굳혔다.

양식의 도입은 개화기 때에 이루어졌지만 1970년대까지만 해도 양식은 일부 부유층이나 지식인 계층을 제외하고는 익숙지 못한 음식이었다. 그러나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을 계기로 햄버거나 도넛, 치킨 등을 상품화한 패스트푸드 체인점이 밀려들어와 그 독특한 맛과 산뜻한 분위기로 어린이와 젊은 층 사이에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런데 이때 도입된 패스트푸드는 넓은 의미에서는 양식에 포함되지만 전통적인 양식과는 다른 것이었다. 서양의 어느 특정 지역의 음식이라기보다는 맥도널드 햄버거가 상징하듯이 초국적 자본이 지배하는 ‘세계화’된 시대의 입맛이었다. ‘양식 먹는 것’이 더 이상 차별화의 의미를 갖지 못하자, 정작 상류층들은 새로운 품목을 찾게 되었다. 그것은 양식의 다양화와 전문화로 나타났다. 이제까지 양식은 음식이 유래된 특정 국가명을 표기하지 않은 채 그저 ‘양식’이라는 뭉뚱그려진 이름으로 불리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프랑스 음식, 이탈리아 음식 등 보다 전문화된 양식으로 분화되어 고급 레스토랑이나 호텔에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양식의 분화는 다른 상품들처럼 음식이라는 상품에도 유행의 흐름을 낳게 하였다.

외식문화에서 또 하나 주목할 현상은 이 시기 한식의 상품화가 다양하게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에서 근대적인 외식문화의 싹은 이미 조선 후기부터 태동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받으면서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생존 그 자체가 위태로웠으며, 이어진 전쟁으로 농토가 파괴되어 식량문제는 1960년대 중반까지 가장 심각한 사회문제였다. 이러한 조건에서 조선시대의 다양한 음식 문화는 대중외식으로 발전할 수 없었으며, 몇몇 가정에서 겨우 그 명맥을 유지하거나 전수되지 않고 사라져갈 뿐이었다. 그런데 1980년대 대중외식이 본격화되면서 사라진 한식들이 식당의 메뉴로 속속 다시 등장하기 시작하였으며, 몇몇 지방에서만 먹던 음식들이 서울로 진출하기도 하였다.

1970년대까지 한식 하면 먼저 설렁탕 등 국밥 류의 음식을 떠올렸다. 그런데 이 무렵부터 삼겹살, 갈비, 등심 등과 같이 고기를 구워 먹는 문화가 일반화되었다. 갈비나 불고기는 조선시대 궁중요리로 일반 양반가에서조차 먹기 힘든 음식이었다. 1960~70년대에도 음식점에서 불고기를 취급하기는 하였지만 당시 국가대표 축구팀이 국제 경기를 하기 전에는 으레 불고기 파티를 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일반 서민들이 아무 때나 부담없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은 아니었다. 그런데 80년대 들어서면서 ○○가든, ○○갈비, ○○삼겹살 등의 고깃집들이 도처에 생겨났다. 이런 음식점들은 주로 큰 방을 구비하고 있는 것이 특징인데 가족 외식뿐 아니라 잔치, 회식, 친목모임의 장소로 널리 이용되었다.

또한 이 무렵 춘천막국수나 닭갈비, 아구찜, 보리밥 등 지방 사람들이나 서민들이 먹던 향토음식들이 별미음식으로 상품화되었다. 특히 승용차 보급률이 높아지고 답사문화가 대중화되면서, 향토음식은 그 지역의 관광상품으로 개발되었다. 이제 ‘맛있는 집’에 대한 소개는 일간지나 월간지의 단골 코너가 되었다. 또 육류 위주의 신식 식단들이 성인병을 초래한다는 비판과 함께 건강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쌈밥이나 선식 등 곡물과 채식 위주의 한식 메뉴들이 상품화되었다. 이렇게 한식도 다양하게 상품화됨에 따라 양식이나 일식 못지 않게 꾸준히 성장하였다.

외식문화의 현주소

우리의 근대화는 개항기의 곡절, 일제에 의한 식민지 경험, 분단과 한국전쟁, 그리고 대외종속적 발전과정에서 볼 수 있듯이 내적인 요구에 의해서라기보다 외부적인 힘에 의해 강요된 측면이 강하였다. 이는 정치나 경제 영역에서도 그러하지만 문화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 와중에서 전통적인 문화의 상당 부분이 올바로 비판 계승되지 못하고 파괴되고 해체되고 말았다.

외식은 근대사회에서 나타나는 중요한 식사문화이다. 우리나라에서 근대적인 외식문화의 싹은 이미 조선 후기 장터를 터전으로 태동하고 있었으며, 여기서 개발된 초보적인 패스트푸드 음식들은 전통한식이 근로대중을 위한 외식으로 발전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전통한식의 꽃은 장터 음식이 아니라 사대부 가문 부녀자들에 의해 전수된 가정 음식이었다. 사대부 가문의 남자들이 학문을 하면서 평생을 보냈다면 그들 가문의 부녀자들은 음식을 준비하고 만드는 데 평생을 보냈다고도 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자주적인 근대화를 이루었다면 이들이 만들고 누린 음식들은 상품화를 거쳐 많은 사람들이 쉽게 향유할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들 사대부 가문의 음식문화는 그 맥이 끊기거나 몇몇 가문 내에서만 부분적으로 전수되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은 여러 가지 이유로 외식을 하고 있으며, 외식문화는 패션과 마찬가지로 유행을 만들고 있다. 대중외식의 시대에 외식문화의 방향이 한 나라의 경제수지에 미치는 영향도 결코 작지 않다. 1970년대부터 정부의 ‘운동’ 차원으로 추진된 빵과 고기 중심의 식사 문화가 오늘날 우리나라를 밀과 사료 수입대국으로 만들었으며, 패스트푸드 체인점들은 본국에 로열티를 지불할 뿐더러 재료의 대부분을 그 나라에서 수입해서 쓴다는 점도 유의해야 할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외식문화를 만들어가는 사람들 가운데 일본이나 서구가 아니라, 우리의 전통음식에서 상품의 소재를 찾으려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결국 서구지향의 외식문화가 자기 중심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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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연구회 집필자 소개

1988년에 만들어진 한국사 학계의 전문 연구자 단체이다. 550여 명의 대학 교원, 대학원생이 연구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난 역사를 연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올바른 역사 교육과 역사 대중화..펼쳐보기

김영미 집필자 소개

서울대 강사

출처

우리는 지난 100년동안 어떻게 살았을까 1
우리는 지난 100년동안 어떻게 살았을까 1 | 저자한국역사연구회 | cp명역사비평사 도서 소개

지난 한 세기는 우리에게 과거 수백년에 맞먹는 변화가 일 어난 격동의 세기였다. 식민지와 전쟁을 경험했으며 이데올로기의 극 한 대립과 과학기술의 놀라운 발전이 한데 뒤..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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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외식문화의 자화상우리는 지난 100년동안 어떻게 살았을까 1, 한국역사연구회, 역사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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