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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우리는 지난
100년동
안 어...

상처 입은 법당 거듭나는 불교

사라진 것 살아남은 것

한국불교의 모순과 개혁

최근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단은 교단 내외의 제반 문제를 개혁하기 위한 활동을 힘차게 전개하고 있다. 개혁의 방향은 정법을 구현하고 올바른 승풍을 확립하는 데 있다. 이를 위해서 조계종단은 불교의 자주화, 수행풍토 진작, 교육 불사, 포교 강화, 사회적 역할 증대 등의 활동을 추진하고 있다. 이러한 불교개혁은 이전의 불교계 모순을 극복하고 시대에 부응하는 불교를 만들려는 자기 정화(淨化) 노력의 소산으로 이해된다. 조계종의 개혁 활동은 단시일 안에 완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성과는 조금씩 나타나고 있다.

개혁 이전 명리(名利)에 치우친 교단의 운영과 권력 지향적인 행태는 교단 내외로부터 강력한 비판을 받은 바 있다. 그 원인은 가까이는 과거 종단을 장악한 세력의 비합리적인 교단 운영에서 비롯되었지만 멀리는 일제시기에 불교가 입은 상처와 해방 이후 이른바 비구 · 대처(帶妻) 사이 갈등의 후유증에서 기인한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 개혁의 성격과 방향을 가늠하기 위해서 불교가 안고 있던 모순을 개괄해볼 필요가 있다.

1994년 3월 말부터 4월 초, 서울의 조계사에서는 조계종 종단 집권층과 종단의 개혁을 추진하려는 범승가종단개혁추진회측과의 치열한 갈등이 빚어졌다. 이 갈등은 조계종 총무원장의 3선 연임 강행으로부터 촉발되었지만, 그 이면에는 조계종 종단측의 정치권력 지향성에 대한 승려와 신도들의 불만에 있었다. 이후 조계종은 과도종단인 ‘개혁회의’를 출범시키고 새로운 종정과 총무원장을 선출하는 등 긍정적인 방향으로 사태를 수습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조계종의 이러한 내분은 직접적으로는 1950년대부터 전개된 이른바 비구 · 대처 간 갈등의 후유증에서 연유되었지만, 그 근본 요인은 일제하 식민지 불교로부터 잉태된 것이었다. 승려 본연의 자세에서 이탈하여 세속적 부와 권력을 얻으려는 행태는 한국 전통불교에서 파계로 인식된 승려의 결혼 즉, 대처 문제와 깊이 연관된 것이었다. 또한 이러한 문제는 일제의 가혹한 식민지 불교정책에서 기인하였으며, 당시 불교를 근대화하려는 성급한 자세가 거기에 개입되었다는 점에서 뿌리가 깊다.

승려들의 명리추구와 대처 문제는 근대 이전에도 있었지만, 그것이 불교계 모순의 밑바닥에 자리잡고 한국 전통불교의 정신과 계율마저도 마비시킬 정도로 심화된 것은 개항 이래 일본불교가 한국에 침투하고 일제의 식민통치를 받으면서부터였다고 할 수 있다. 달리 말하자면 일본불교의 영향과 식민지 불교정책으로 근대불교는 파행과 굴절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8·15해방 이후에도 그러한 식민지 불교의 성향은 완전히 극복되지 못하고, 비구 · 대처 간의 치열한 대립을 거쳐 이전의 통합 종단이 조계종과 태고종 그리고 수십여의 군소 종단으로 끝내 분립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 개혁의 방향은 권력 및 외압으로부터 벗어나 불교의 자주화로 모아진다. 나아가 전통문화의 담당자였던 불교 본연의 생명력을 활성화시키면서 승풍을 일으키고 사회에 대한 활동을 강화함으로써 중생 및 시대의 고뇌 해결에 일조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에 진출한 일본 사원

일본 불교인 인천 본원사이다. 왼쪽에 달려 있는 종의 모양이 우리의 범종과 확연히 구별된다. 우리나라 범종은 종신이 곡선을 이루고 있는데 일본 종은 종신의 모양이 위에서 아래로 일직선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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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근대화의 허와 실

조선 후기 이래 불교는 사회적으로 핍박을 받고 있었으니, 이를 상징하는 것이 승려들의 도성 출입금지였다. 이러한 승려 도성 출입금지를 해제하는 데에 일본승려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일본승려가 한국승려의 도성 출입금지의 해제(1895년)를 추진한 것은 일본불교의 한국 침투를 위한 사전 정지작업의 일환이었다.

도성의 출입금지에서 자유로운 왕래로의 전환은 불교계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당시 불교계는 이를 가능하게 해준 일본불교에 대하여 우호적인 감정을 가졌던 것이다. 예컨대 용주사의 승려였던 최취허는 그 조처를 주도한 일본승려에게 “자비의 은혜를 베푸시어 본국의 승도들로 하여금 5백년 래의 억울함을 쾌히 풀게 하였습니다. 이제부터는 왕경(王京)을 볼 수 있으니 이는 실로 이 나라의 승려로서 감사하고 치하하는 바입니다”라고 감사의 편지를 썼다.

그러나 그 조처 뒤에 일본불교를 선발대로 내세운 일제의 한국 침략 의도를 철저히 간파하지 못한 것이 불교계의 현실이었다. 당시 불교계는 도성 출입금지 해제를 불교를 발전시킬 수 있는 절호의 계기로 보고 이른바 불교의 대중화에 나섰다. 또한 불교계에서는 당시 풍미하고 있었던 사회진화론의 영향하에 일본불교가 포교 등 불교의 대중화에 선진적이라는 인식하에 일본불교를 배워야 한다는 자세를 갖게 되었다. 아울러 이러한 불교계의 인식 저변에는 당시 성장하고 있는 기독교와의 대결의식이 은연중 자리 잡고 있었다.

불교의 대중화와 기독교와의 대결의식은 자연스럽게 불교의 근대화 문제와 연결되었다. 이 경우 불교 근대화의 모델로서는 자연스럽게 일본불교가 그 대상이 되었다. 교육, 포교, 사회활동 등에서 기능적으로 선진적인 일본불교를 모방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불교의 근대화를 추진하면서 그 모방의 대상국이 우리 한국을 침략하는 제국주의 국가였다는 점을 유의하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요컨대 민족과 근대의 사이에서 올바른 중심을 잡지 못하고 근대 문명 추구의 대열에 함몰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불교계의 ‘친일’ 행태를 당시 개화 지식인의 일반적인 의식으로 인정한다면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민족을 배반한 ‘친일파’와는 구분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일본불교를 배워 불교 근대화를 이루려는 경향은 불교계에서는 점차 일본어 학습, 일본 유학, 일본불교 종단에서의 수계 등이 유행하게 되었으며 심지어는 의병항쟁의 와중에서 보호받기 위하여 일본불교의 소속으로 인정받으려는 사찰이 속출하기도 하였다. 부산에 있었던 일본불교의 종파인 진종대곡파의 부산별원에 한국 승려들의 출입이 매우 빈번하였다는 사실도 이러한 데에서 기인한 것이다.

심지어는 한국불교의 전통을 망각하고 불교 전체를 일본불교의 일개 종파인 조동종에 예속시키려는 사태(1910년 10월)까지 벌어져 불교계에 일대 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비록 이러한 시도는 한용운 등이 중심이 된 임제종운동으로 좌절되었지만 당시 승려들이 일본불교에 대해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더욱 유의할 것은 일본불교로의 예속을 철저히 반대했던 한용운도 일본을 시찰했으며, 일본불교의 영향을 받고 승려의 결혼 인정을 적극 주장하였다는 점이다. 물론 한용운의 경우 불교 발전이라는 충정에서 나온 것이지만, 중추원 의장과 통감부 통감에게 승려의 결혼을 인정해 달라는 건의를 두 번이나 한 것은 사실이다.

일본불교에 대한 우호성으로 인해 당시 불교계에서는 일본불교 종파와 그에 연결된 친일세력 등을 배경으로 교단의 주도권을 확보하려는 경향이 노골화되었다. 구한말 이래 불교계에서 주도권을 행사하였던 해인사 승려 이회광과 용주사 승려 강대련은 불교계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일본불교 세력을 이용하였으며 경쟁적으로 친일파인 송병준과 이완용을 그들이 주도하고 있는 불교단체의 회장으로 추대하였다. 일제는 그들 간의 알력으로 오히려 불교계 통제가 원활하지 않게 되자 그 단체의 대표들을 배제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행각은 결국 불교발전을 빙자하여 속세의 권력자를 내세우고 그로부터 일본불교세력과 정치권력의 유대를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불교계의 이러한 행태는 일제의 식민통치 기간 여러 형태로 되풀이되었다.

그러나 이처럼 성급하게 일본불교에 의존하여 불교를 근대화하려는 노력은 사회의 모순을 극복하고 중생을 구제하려는 불교 본연의 자세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승려의 대처와 사원공동체 파괴

일본불교의 한국 침투와 일제의 식민지 불교정책의 영향으로 불교계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승려의 결혼문제였다. 승려의 대처는 일본불교의 상징으로 간주될 정도로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불교계에서는 거의 보편화되었다. 그러나 한국의 전통불교에서 승려의 대처는 파계로 단정되었으며 승려로서의 자격을 상실당하는 금기 사항이었다. 그런데 한국 불교계는 1910년 경술국치를 전후하여 대처 문제가 본격적으로 논란의 대상이 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승려의 대처는 전통불교의 파괴와 함께 승려의 자주정신을 퇴보시키고 결과적으로는 사원공동체를 파괴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우려스러운 것이었다.

어느 종교이든 그 종교가 지향하는 계율과 신앙형태의 유지는 종교 속성상 중요한 문제이다. 제국주의가 다른 나라를 침략하거나 통치할 경우에는 사전에 문화 및 종교를 앞세우는 것이 상례였다. 특히 침략자와 식민지시기의 종교가 동일한 경우에는 침략자 측의 계율 및 신앙을 식민지의 종교에 강요하거나 반영시켰다. 일제는 한국을 식민지화한 직후 한국인의 정신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불교를 통제하기 위한 목적에서 사찰령(寺刹令)을 제정하고(1911년 6월), 각 사찰의 운영을 규정하고 있는 사법(寺法)도 직접 관장하였다.

그런데 일제는 사법에서는 보편화되고 있는 승려 대처는 방치하면서 주지 등 간부들의 대처만을 인정하지 않았다. 1926년 주지의 대처를 허용하자는 문제가 불교계에서 공론화된 이후 주지 대부분이 대처를 하기에 이르렀으며 일제도 이를 허용했다. 승려 대처는 그 이후에 더욱 파급되어 해방 직전 6천여 승려 중 결혼을 하지 않고 수도에 정진하는 승려는 불과 300여 명이었다고 수덕사 승려 송만공이 평할 정도였다.

당시 승려 대처는 불교 근대화의 일환으로 이해되었다. 불교 근대화의 모델이었던 일본불교의 경우 승려의 대처는 보편적이었고 이는 포교의 강화와 승려의 배출이라는 점에서 긍정적인 측면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당시 대처론자도 바로 여기에서 정당성을 찾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 개별 사원이 승려 개인의 역량에 의존해서 운영되고 있었기 때문에 대처라고 하는 현상이 나타났음에 비해서 한국의 경우 대처는 전통적인 사원공동체를 파괴하는 속성을 갖고 있었다.

또한 일제는 불교계가 민족운동에 나서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불교계의 자주, 자립 정신을 은연중 제한하면서 분열을 조장하였다. 대처의 묵인 및 허용은 사원공동체의 파괴를 통해 불교계를 분열시키려는 의도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승려의 대처는 단지 파계와 일본불교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전통불교의 기반 및 사찰재산의 손실, 직위 확보를 위한 갈등 등을 초래하였다.

그러나 불교계의 개혁을 위해 노력한 청년 승려들 대부분도 대처를 한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1920년대 초반 3·1운동의 영향을 받아 불교계의 개혁을 위해 청년 승려들이 불교청년운동을 강력히 추진하면서 불교계에서는 보수와 진보의 대결이 심화되었다. 일본유학은 개혁 지향적인 청년 승려들에게는 하나의 풍조가 되었는데,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그들은 대부분 결혼을 하였다. 유학 전후에 결혼한 불교청년들이 각 사찰에 돌아와서 사찰경영 문제를 놓고 중견 승려와 마찰을 일으켰다. 또한 일부 청년 승려는 결혼 후 환속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불교개혁을 주장하였던 청년 승려들이 자주적인 불교 발전을 주장하면서도 민족운동의 대열에 합류하기보다는 일본불교를 한국에 이식하는 매개자 역할을 하였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불교 근대화론자들의 한계가 단적으로 드러난다.

1930년 5월 일단의 불교청년들이 조직한 항일비밀결사 만당(卍黨)의 당원이었던 이용조는 승려의 대처 문제를 불교계 모순으로 단정하였다. 즉 “대처생활 이후로 신성하던 교계는 아연히 아귀도량으로 변하고 말았다. 파쟁도 이곳에서, 주지전제도 이곳에서, 부정사건도 이곳에서”라고 표현하였다. 이용조는 1940년경에 이르러서도 불교계의 가장 큰 모순을 아집으로 보면서 그 아집이 나온 원인을 대처생활이라고 단정하였다. 그리고 그는 조선불교의 갱생을 위해서는 단연코 대처를 하지 말거나, 아니면 대처생활을 하면서도 불교계가 발전이 될 수 있는 제도로 고쳐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용조도 그 이후에 대처를 하였거니와 바로 여기에서 당시 불교계의 이면을 엿볼 수 있다.

승려 대처 문제는 해방 직후에도 불교 개혁의 대상으로 논의되었다. 그러나 당시에도 교단 간부진 대부분이 대처생활을 하였기에 대처 금지가 이행되기는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 문제는 1954년부터 1970년까지 전개된 불교계의 비구 · 대처 간의 갈등(정화 혹은 법난)의 근본 원인이 되었다. 전통불교의 수호와 대처의 불인정을 고수하면서 청정 비구를 자처한 계열과 불교의 대중화를 위해서는 대처도 인정할 수 있다는 계열의 대립으로 치열한 갈등이 빚어졌다.

대처 · 비구의 싸움

1954년 5월 23일 비구승려의 입지를 옹호하는 이승만 담화를 계기로 대처와 비구 간의 파벌싸움이 심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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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제는 정치적인 문제로도 비화되었으며 일반 국민들도 불교의 진로에 대한 우려를 표시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대처 반대 측은 조계종, 대처 인정 측은 태고종으로 갈라섰으며 이를 국가가 인정하여 현재에 이르렀다. 그 와중에서 불교의 위신은 추락하였고 불교계의 재산은 그 갈등의 재원으로 소모되었으며 성직자로서 부적격한 인물들이 불교계로 유입되는 사태를 초래하였다. 지금은 불교계에서 파계승 혹은 은처승의 문제가 노출되고 있듯이 승려의 대처 문제는 현재도 진행중인 문제라 하겠다.

사찰령, 주지의 임명은 총독이

일제가 제정한 사찰령은 불교계를 행정 편의주의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이를 통해 일제는 한국불교계의 모든 운영을 관장하기에 이르렀다. 이중 가장 중요한 것이 인사권의 장악이었으니 각 사찰의 주지 임면권이 조선총독 및 각 지방 장관에게 넘어갔다. 일본불교에 우호적이었던 승려들은, 그들의 인사권을 장악하고 있는 일제 당국에 타협과 예속의 길로 나아갔다. 한편 이러한 사찰령에 대하여 일부 승려는 불법의 외호(外護), 문명아(文明兒), 금과옥척(金科玉尺) 등으로 찬양하였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불교계의 전통적인 자주적 의사 결정방법인 산중공의제도(山中公議制度)는 퇴색되었으며, 모두 일제의 눈치만 보는 지경에 이르렀다. 산중공의제도란 해당 사원의 제반 문제에 대해 사원공동체 구성원 전체가 모여 합일된 의견을 도출하는 제도이다. 이는 구성원 간의 평등정신을 구현하며, 특정 개인의 사적 이익이 개재될 수 없는 민주적인 운영방식이었다. 그러나 사찰령 아래에서 사원 운영의 최종 권한이 일제 당국에 있고 그 대행자가 사찰의 주지였기에 이전 산중공의제도에서 나타난 운영의 투명성은 사라지고 주지의 전횡과 그를 후원하고 감독하는 일제 당국의 지시가 우선하는 형편으로 변하였다. 불교청년운동의 주역이었던 김법린은 일제가 제정한 사찰령 및 그 시행규칙이 조선불교의 자주권을 완전히 부인하였다고 진단하였다. 나아가 그는 당시 불교계의 운영을 “실로 조선불교의 모든 움직임이 위정자의 재가를 기다려서 비로소 된다”라고 요약하였다.

3·1운동 당시 불교계 대표였던 한용운과 백용성은 33인의 일원으로 운동의 최일선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청년 승려들도 자발적으로 연고 사찰을 거점으로 만세운동에 동참하였다. 그러나 당시 교단의 역할을 수행한 30본산 연합사무소 위원장이었던 범어사 승려 김용곡은 3·1운동에 청년 승려가 참여하는 것을 반대하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 교의 제군은 이번 정치 문제에 대하여 관여치 말며 ······ 우리 불교도는 당국자의 정책을 잘 받들어”라고 강조하였다. 민족운동 참여 자체를 적극 반대하고 오히려 일제의 식민통치에 협조하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당시 교단 집행부의 현실인식을 읽을 수 있다.

심우장

심우장은 서울 성북동에 있는 한용운의 집이다. 한용운은 1944년 5월 심우장에서 중풍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총독부 건물을 바라보지 않을 의도로 집을 북향으로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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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이후 불교계에서는 일제의 사찰령을 부정하고 불교를 개혁하려는 움직임이 광범하게 일어났다. 10년 동안의 경험으로 미루어 사찰령 시행은 자주적인 불교발전을 억압하고 일제 당국의 철저한 간섭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반면 주지의 독재적인 권한은 막강해졌다. 주지들은 직위를 유지하기 위해 일제 당국에 예속되면서 그에 도전하는 요인들을 강력히 제거하였다. 이에 청년 승려들은 불교계 모순을 야기하고 있는 사찰령의 철폐운동을 강력히 전개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노력은 친일적인 주지들의 반대와 일제 당국의 억압으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사찰령 철폐 요구를 정치적 반항운동으로 이해하고 침묵하려는 주지들이 있는 한 사찰령은 철폐될 수 없었던 것이다.

자주권의 수호를 위한 노력

일제시기에 불교의 또 다른 문제로는 자주권의 상실을 지적할 수 있다. 그 정황을 살펴볼 수 있는 실례는 1929년 1월 3일에서 5일까지 서울의 각황사에서 개최된 조선불교 선교양종 승려대회이다. 이 대회에서는 당시 불교계의 종헌(宗憲)을 제정하고 입법기관인 종회(宗會)와 행정기관인 중앙교무원을 탄생시켰다. 전국 사찰의 대표 107명이 참가한 이 대회 이전에는 교계의 조직과 활동의 근거를 규정하는 일정한 규율이 없었다. 그 결과로 불교계는 일제가 제정한 사찰령의 근거에 의해서 피동적으로 움직일 뿐 자주적인 의사결정을 통해 통일적으로 행동할 수 없었다. 그 결과 본산 간의 갈등, 지방사찰들의 파벌 조성, 나아가서는 각 사찰의 이익을 보장받기 위한 일제 당국과의 결탁만이 있었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소하기 위해 나타난 것이 불교계의 통일운동이었으며, 그 산물로 등장한 것이 바로 이 승려대회였던 것이다.

한용운은 이 대회가 ‘전조선불교도의 총의’로 성립되었다고 하였으며, 만당(卍黨)의 주역이었던 김법린도 이 대회를 ‘조선불교계의 획기적 사실’로 평가하였다. 이 대회는 불교계의 자주권 확립과 전체적 통일을 기하기 위한 목적에서 나왔으며 어느 정도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 그것은 바로 한용운이 불교계의 ‘헌법’이라고 부른 종헌의 완성이었다.

이렇듯이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 종헌을 실천하는 것은 불교계의 당연한 의무이자 책임이었다. 민족불교를 수호하려는 승려들은 종헌의 철저한 실행이 일제의 사찰령에 항쟁하는 유일한 방법이자 나아가서는 불교계 발전의 원동력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종헌은 정상적으로 이행되지 않았으며, 종헌 실행에 찬성하는 사찰과 반대하는 사찰 간의 충돌이 빚어졌다. 이들이 종헌에 반대한 것은 그것이 이행되면 기존의 지위, 예컨대 주지직이 위태로워질까 우려했기 때문이며, 반대의 명분으로 일제 당국이 인정한 것이 아니기에 따를 수 없다는 논리까지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종헌이 실행되지 못한 것은 친일적인 주지계층의 암묵적인 지연과 반대 때문이었다. 이에 당시 불교계에서는 주지계층을 조선불교의 ‘암’이라고 진단하면서 주지들은 교단의 지시를 일본 경찰 주재소원의 ‘잠꼬대’보다도 더 우습게 안다고 풍자하기도 하였다. 주지들의 이러한 행태에 대하여 한용운은 종헌 선서문의 묵흔(墨痕)이 마르기도 전에 종헌은 한 조각의 ‘휴지’가 되었다고 개탄하였다.

이처럼 불교계의 자주권 확보를 위해 개최된 승려대회에서 제정한 종헌은 불교계 스스로가 부정하는 사태는 곧 자주권의 상실을 뜻한다. 당시 주지급 승려들의 자주권 상실의 모습은 이미 대회 도중에서부터 나타나고 있었다. 대회 주도자 상당수가 대회 도중 유고(有故)로 탈락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일제의 외압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대회에 참가한 승려 20여 명도 중도에 이탈하였는데 이들 대부분이 같은 해 10월 11일에서 13일까지 일제의 주도로 총독부 대회의실과 경복궁에서 개최된 조선불교대회에 대거 참여하였다. 이 조선불교대회는 일제가 식민지 불교정책의 일환으로 한국불교도를 일제 통치에 순응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자주권 확보를 위해 개최한 한국측 승려대회에는 불참 혹은 중도 이탈하고 일제가 주도한 또 다른 불교대회에 참여하였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친일적인 주지들의 행태는 이후 총본산 건설운동에서도 나타났다. 1930년대 전반기의 자주적인 종헌이 실행되지 못한 결과로 인해 불교계의 통일운동은 1935년부터 재추진되어 1937년부터 본격화되었다. 총본산이란 곧 불교계의 중심기관을 지칭하는 것으로 현재의 조계사는 바로 그 운동의 산물로 건설되었으며 ‘조계종’ 종명도 그 운동의 부산물로 등장한 것이다. 그런데 이 운동은 일제가 중일전쟁을 준비하면서 불교계를 효율적으로 장악하기 위해 추진하였다. 따라서 여기에는 일제의 은밀한 조정과 통제가 따랐다.

조선불교호

조선불교 조계종 종무원에서 전국 사찰과 승려의 헌금 5만 3천원을 거둬들여 일본군부에 헌납한 자금으로 마련된 폭격기이다. ‘조선불교호’라고 이름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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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2월 26일과 27일, 조선총독이 참가한 가운데 총독부 회의실에서 총본산 건설운동을 효율적으로 추진하기 위한 31본산 주지회의가 열렸다. 그런데 그 회의에 참가한 주지들은 “총본산의 권위를 당국에서 인정해 달라”, “사찰령 정신에 기본을 삼겠다”, “관의 지도가 절대로 필요하다”, “총본산 건립 후 관의 명령에 의지하겠다”는 등의 자주권 포기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승려들이 이런 행태를 보인 것은 아니다. 당시 마곡사 주지의 자격으로 참여한 송만공은 조선총독 앞에서 일본불교의 영향으로 조선승려 대부분이 파계하였으며, 사찰령 시행 이후 승풍이 문란하고 주지의 전횡이 감행되었음을 당당히 언급하였다. 나아가서 일제가 조선불교를 진흥케 하려면 불교계의 운영권을 조선승려에게 일임하라고 주장하면서 불교계가 일제 침략 이전의 압제와 노예와 같은 처지에 처하더라도 자제자립(自制自立)하겠다는 의사를 개진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송만공과 같은 냉철한 현실인식과 투철한 자주의식을 소유한 승려들이 매우 적었다는 것이었으며, 또한 그러한 승려들이 교단의 중심부에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제하의 불교 문제는 조선 후기 이래의 낙후된 불교를 발전시키겠다는 지나친 열의로 인해 민족의 문제를 등한시한 데서 기인한 것이었다. 불교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속세의 권력 및 제국주의 세력과도 타협할 수 있다는 자세를 보였으며, 나아가 속세의 부와 권력에 빠져들었으며 결국 불교 공동체를 파괴하는 데까지 나아간 것이었다. 그 결과 화합과 평등을 지향하는 불교 공동체가 외부의 힘에 좌지우지 당하는 현실에 처하게 된 것이다.

식민지시기에 겪었던 불교계의 고뇌와 상처는 결과적으로 해방 이후 불교계에도 큰 장애가 되었다. 권력에의 의존, 수행풍토의 미약, 교계 내의 갈등, 부적격자의 교계유입 등이 그것이다. 그 결과 불교의 위신이 추락했고 역량 또한 감소되었다. 전통시대 우리 문화의 중심이었던 불교가 이제는 자체의 혹은 시대적 사명에 부응치 못하는 것도 결국 식민지 불교의 잔재와 망령의 영향이라 하겠다. 오늘날 불교계에서 추진하고 있는 개혁은 바로 이러한 일제 식민지 불교의 찌꺼기를 정리하고 불교계가 나아갈 방향을 모색하는 자기 정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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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연구회 집필자 소개

1988년에 만들어진 한국사 학계의 전문 연구자 단체이다. 550여 명의 대학 교원, 대학원생이 연구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난 역사를 연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올바른 역사 교육과 역사 대중화..펼쳐보기

김광식 집필자 소개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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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난 100년동안 어떻게 살았을까 1
우리는 지난 100년동안 어떻게 살았을까 1 | 저자한국역사연구회 | cp명역사비평사 도서 소개

지난 한 세기는 우리에게 과거 수백년에 맞먹는 변화가 일 어난 격동의 세기였다. 식민지와 전쟁을 경험했으며 이데올로기의 극 한 대립과 과학기술의 놀라운 발전이 한데 뒤..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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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상처 입은 법당 거듭나는 불교우리는 지난 100년동안 어떻게 살았을까 1, 한국역사연구회, 역사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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