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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에서 아파트로

의식주, 어떻게 바뀌었나

1980년대 말 부동산 가격의 폭등으로 집값은 물론 전셋값까지 덩달아 오르면서 무주택 세입자들의 생존문제가 중요하게 부각된 적이 있었다. 당시 주거문제가 사회 불안정의 핵심으로 인식되면서 언론에서는 ‘주택 200만 호 건설’, ‘신도시 건설’ 등의 정부 대책을 연일 대문짝만하게 보도하기도 했다. 우리나라가 중진국을 넘어 선진국에 진입할 정도로 경제 수준이 높아졌지만 아직 주거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어려운 과제임을 보여주는 단면이라 할 것이다.

우리나라는 산업화 단계를 거치면서 부동산 투자가 자산 증식의 수단이 되었고 주택도 중요한 투기의 대상이 되었다. 현재의 국제통화기금(IMF) 경제체제에서 집값을 비롯한 부동산 가격이 전반적으로 하락하여 부동산의 재산가치가 떨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이 주택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지는 못하고 있다. 지금도 호시탐탐 부동산 가격 반등의 조짐을 엿보고 있는 사람들이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여기서는 우리의 근대사 속에서 주택문제, 주거형태의 변화가 사회문화의 변화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이를 통해 현재 우리가 처한 주택문제의 연원과 앞으로의 해결방향에 대하여 중요한 시사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신식주택 도입과 전통한옥

조선은 1876년 체결한 강화도조약을 계기로 일본과 서구 열강에 문호를 개방했으며 이에 따라 서구문화가 조선으로 유입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서구문화의 도입에 따른 변화는 아직 크지 않았으며 주거문화도 예외는 아니었다. 주택은 여전히 초가나 기와집 등 한옥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대한제국기 서울지역의 주택사정을 보여주는 자료에 따르면, 1899년 7월 당시 한성부의 총인구는 20만 922명이며, 주택 수는 4만 2천870호로 호당 인구 수는 4.7명이었다. 총 호수 가운데 초가가 2만 9천831호(69.6퍼센트), 기와집이 8천652호(20.2퍼센트), 반기와집이 4천398호(10.2퍼센트)로 초가가 절대 다수임을 알 수 있다. 또한 1888년 서울을 처음 본 언더우드 부인은 “도시가 마치 거대한 버섯처럼 보였다”고 서술하고 있는데, 이는 당시 서울의 대부분의 집이 초가였음을 잘 보여준다. 당시 기와집의 경우는 신분보다는 재력 정도에 따라 크기와 화려함이 좌우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신분에 따라 집의 크기나 장식 등을 엄격하게 규정한 가사 규제가 있었다. 그러나 1894년 갑오개혁으로 신분제도가 폐지되고 이러한 가사 규제도 사라지자, 이제는 누구든지 돈만 있으면 호화스러운 기와집을 지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일찍이 개화에 눈을 뜨고 있던 중인들이 재력을 바탕으로 크고 화려한 주택을 짓는 데 앞장섰다. 중인들은 사랑채의 규모를 양반가의 그것만큼 늘리기도 했으며 양반가의 상징이었던 솟을대문을 세우기도 했다.

한편 이 시기부터 서양의 건축양식이 도입되면서 조선의 주택문화에도 새로운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부산, 원산, 인천 등의 개항으로 일본인과 서양인이 들어오면서 일본식 주택과 서양식 주택들이 나타났던 것이다. 그런데 개항 초기만 해도 외국인들은 아직 양옥을 짓지 못하고 기존의 한옥을 개조하여 생활하였다. 선교사들은 싼값으로 한옥을 사서 외부는 수리하지 않은 채, 내벽은 화려한 벽지로 도배하고 바닥에는 카펫을 깔고 살았다. 1882년 정부에 고용된 독일인 묄렌도르프는 당시 세력가인 민겸호의 저택을 하사받아 한옥을 양옥으로 개축하여 살았다고 한다.

인천의 외국인 거주지와 초가

프랑스 『르 몽드』지에 게재된 삽화이다. 사진의 위쪽에 있는 양옥들은 외국인들의 거주 지역이다. 아래쪽의 한국인 초가와 대조를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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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양옥은 1884년 인천에 건립된 세창양행 사택이다. 이 집은 건평 173.15평, 일부 이층으로 된 벽돌집이며, 외벽은 회칠하고 붉은 기와를 얹은 별장 류의 건물이었다. 이렇게 양식 건축이 도입되면서 시멘트, 유리, 벽돌, 콘크리트 등의 새로운 건축 재료들이 보급되기 시작하였고 스팀난방이 이용되기도 하였다. 이 가운데 스팀난방에 대해서는 거부반응도 있었다. 1918년 이화학원은 러시아인 손탁이 1902년 정동에 지은 호텔(이른바 손탁호텔)을 매입하여 기숙사로 사용했는데, 이 건물은 이를난방을 채택하고 있었다. 학부형들 가운데 스팀난방의 쇳김이 음기(陰氣)를 죽여 여학생들이 불임증에 걸릴 것이라고 하여 이를 거부하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고 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개인 양옥은 1912년경 건축된 대원군의 손자 이준용의 사저였다. 운현궁 내에 있는 이 건물은 친일인사 윤덕영의 별장과 함께 일제시기 쌍벽을 이룬 양식 건물이었다. 프랑스풍의 르네상스 양식이었으며 현관과 기둥은 석재로 1층은 벽돌에 모르타르를 칠했다. 실내에 페치카를 설치하였으며 창마다 커튼을 달고 천장에는 샹들리에를 달아 화려하게 치장했다.

일본인들이 조선에 이주하면서 일본인 거류지를 중심으로 일본식 주택도 등장하였다. 일본인의 조선이주는 1880년대부터 이루어졌고 1885년부터 민간인이 서울에 거주하기 시작했다. 그해 서울에는 일본인이 19가구 89명이 있었는데, 그후 꾸준히 증가했다. 러일전쟁 승리 이후 일본인들은 식민지 개척이라는 명분 아래 대거 조선으로 이주하여 남대문, 을지로지역까지 진출하였다.

식민지시기 신식가옥

1930년대 초반 평양지역에 거주하던 한 부유한 일본인의 주택이다. 2층 양옥으로, 당시로서는 최신식 주택이었다. 현재의 주택과 크게 다르지 않을 정도로 세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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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들은 1910년대 들어서 용산, 마포지역까지 거주지를 넓혀갔는데, 이들은 주로 충무로와 명동 일대를 거점으로 상업활동에 종사했다. 이에 따라 일제시기 서울은 청계천을 기준으로 두 부분으로 나누어졌다. 즉 종로를 중심으로 한 조선인의 상권과 조선인 거주지인 북촌이 그 하나이며, 일본인의 상권과 거주지인 남촌이 다른 하나이다. 이에 따라 서울의 주택 모습도 달라졌다. 당시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1921년 새로 건축된 일본식 주택이 875동 1만 7천평임에 비해서 조선식 주택은 498동 6천240평에 지나지 않았다. 또한 1924년 현재 서울의 6만 3천967동의 건물 중 조선식 집은 1만 4천742동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돌집 · 벽돌집 · 콘크리트집 · 일본식 집이라고 한다. 1920년대 이후 서울에는 조선식보다는 일본식이나 서양식 주택이 더 많이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문화주택 · 개량한옥 · 영단주택

일제시기에는 보다 다양한 형태의 주택들이 보급되었다. 이 시기 새롭게 등장한 주택형태도 계층에 따라 차이가 났다. 상류층은 이른바 문화주택을 지었으며 중류층은 개량한옥을 선택하였다. 이에 비해 중 · 하류층을 대상으로는 영단주택이 보급되었다. 문화주택은 1920년대 후반부터 등장하였는데 경제력이 뒷받침되었던 친일인사 등 조선인 상류층과 일본인들이 애용하였다. 문화주택은 이들의 의식을 반영하듯이 재래식 주택에 서양식, 일본식을 덧붙이거나 전적으로 모방한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문화주택은 식당, 욕실, 변소 등을 내부에 갖춘 집중식 구성을 취해 생리 · 위생 공간이 주택 안으로 들어왔다는 점이 특징이다.

중류층들이 선호했던 개량한옥은 기본적으로 한옥의 형태를 취하면서도 간소하게 지어진 기와집이었다. 개량한옥의 주택형태는 전통한옥에서 대지가 많이 필요했던 사랑과 문간방이 없어지고 창이 커졌고, 대청마루에 유리문을 달았으며 니스와 페인트를 칠했다. 이러한 한옥의 개량사업은 당시 일부 지식인들과 건축가에 의해 주도된 주택개선 및 주생활 개선운동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1926년 한글학자 최현배는 우리 민족의 쇠약증세의 원인은 일상생활 방식의 비합리성과 비경제성에 있다면서 무엇보다도 주택구조를 개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첫째 집을 높게 지을 것, 둘째 부엌 가까이 식당을 만들어 식사할 것, 셋째 독상을 받지 말고 가족과 함께 식사를 할 것 등 생활개선방안을 제시하였다. 개량한옥은 소규모 주택사업자들이 이른바 ‘집장사 집’을 짓기 시작한 1930년대 들어서 본격적으로 보급되었다. 개량한옥은 오늘날에도 서울의 몇몇 지역에서 찾아볼 수 있다.

개량한옥

평양의 상류가정이던 박기양의 집이다. 전통한옥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대청마루에 미닫이 유리문을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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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이후 서울의 인구급증은 심각한 주택난을 초래하였다. 그러자 일제는 1941년 조선주택영단을 설립하여 주택보급에 나섰다. 이렇게 주택영단에서 지은 집을 당시 영단주택이라고 했다. 영단주택은 중 · 하류층을 대상으로 한 것인데 일본식에 한국식 온돌을 가미한 간략한 평면형태를 취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조선주택영단에서 작성한 표준설계도를 보면, 여러 가지 주택형태와 크기가 규정되어 있다.

주택형태는 갑 · 을 · 병 · 정 · 무 등 5종류였으며, 크기는 각각 20, 15, 10, 8, 6평형이었다. 갑 · 을 · 병형은 중류층 사람들을 위한 것이고, 정 · 무형은 하류서민과 노무자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또한 갑형은 분양을 원칙으로 하고 을형 이하는 모두 임대하도록 하였다. 대표적인 영단주택인 부평 산곡동 소재 조병창 노무자 사택은 901호 규모의 소형 연립주택단지였다. 영단주택들이 이렇게 대부분 노무자 사택으로 지어졌다는 점은 당시 추진된 병참기지화 정책의 또 다른 측면을 보여주고 있다.

일제시기 도시화가 진전되면서 나타난 또 하나의 주택유형으로 토막을 빼놓을 수 없다. 토막에 사는 사람은 대체로 토지조사사업이 끝난 1920년대 이후 궁핍을 견디지 못하고 농촌에서 쫓겨나 도시로 이주해온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경성이나 평양 등 대도시 변두리와 근교 지역에 정착했으며 국유지나 사유지를 막론하고 공지(空地)만 있으면 움집이나 움막을 짓고 살았다. 이들이 움집을 짓는 곳은 주로 산언덕이나 성벽 밑, 제방이나 하천변, 다리 밑 등이었다. 공터에 땅을 파고 그 위에 가마니나 거적 등을 덧씌운 형태의 집들이 많았고, 널빤지나 목조 창틀 등을 얼기설기 엮어놓고 그 위에 함석이나 기타 자재들을 주워다가 지붕으로 삼은 경우도 있었다. 이들은 대개 잡역부나 날품팔이 등 불안정한 직업을 가진 경우가 많았고, 대개 하루 벌어 하루 먹기에 급급한 생활을 하였다. 다음 표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경성의 토막민은 1930년대 후반으로 갈수록 점점 증가하고 있었다.

연도 토막호수 토막민수 경성 총인구수
19311,5385,093514,755
1932538,123
19332,87012,378563,636
19342,90214,179592,278
19353,57617,320637,697
1936677,241
19373,24814,993706,396
19383,31616,644
* 경성제대 위생조사부, 『토막민의 생활 위생』, 이와나미 서점, 62쪽, 1942년.
〈표 1〉 1931∼39년 경성부내 토막민호 현황
평양 교외의 빈민가

1930년대 초반 평양 교외 당상리에 있던 빈민가옥이다. 집주인은 소작인이나 농업노동자 등 최극빈층의 농민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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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심각해진 토막민 문제에 대해 일제는 도시 미관상 또는 위생상의 이유를 내세워 그들을 도시 교외의 일정한 장소로 옮겨놓는 정책을 취했다. 그리고 도시가 그곳까지 확대되면 다시 더 먼 곳으로 옮겨 격리시켰는데 이것은 해방 이후 무허가주택에 대한 정책의 원형을 이루는 것이었다.

이 밖에도 농촌주택들은 일부 대지주의 저택을 제외하고는 이전부터 살아왔던 초가에서 조금도 변한 것이 없었다. 일제시기 또 하나의 빈민층이었던 화전민들의 주택 역시 마찬가지였다. 화전민들은 몇 해에 한 번씩 경작지를 옮겨야 하고 좁은 산자락에 집을 지어야 했기 때문에 발전된 주거형태를 기대할 수 없었다.

재건주택 판자촌 그래도 집은 모자라고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자 일제 말 전시동원체제 아래 해외로 나가야 했던 동포들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중국, 만주, 일본, 동남아지역에서 돌아온 귀환동포와 북한에서 월남한 동포의 수는 약 120만 명에 달해 전국의 주택문제, 특히 서울 등 도시 주택문제가 심각해졌다. 당장 주택이 없는 이들은 아무 곳에나 움막을 지어 생활할 수밖에 없었다. 부분적으로나마 숨통을 틔어줄 수 있는 것이 당시 남한에 있던 약 8만 호에 달하는 일본인 소유 적산가옥이었다. 그러나 이를 둘러싸고 불법 매매 · 접수가 성행하면서 주택문제가 식량문제와 함께 중요한 사회문제로 대두하였다.

당시 적산가옥은 공정하게 처리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를 둘러싸고 분규가 끊임없이 일어났다. 1947년 1월 초 서울에서는 전재민(戰災民)들이 모리배들의 손에서 거래되는 적산가옥을 자신들에게 넘기라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서울 시내에 있는 적산요정 13개 소를 개방하여 전재민수용소로 전환시키라고 요구했다. 이에 따라 적산요정이 개방되었으며 일본인이 경영했던 여관, 유곽 등도 개방되어 전재민을 수용하였다. 1947년 7월 23일 미군정이 적산주택방매법을 제정하여 ‘1세대 1동씩’ 방매가 이루어졌지만 불하과정에서 이중삼중의 점유 등 모리행위가 끊이지 않았다. 따라서 정부가 수립되자 적산가옥의 재분배가 시급하다는 여론이 비등하였다. 불합리한 적산주택 불하와 주택난으로 인해 당시 적산가옥 다다미방 한 칸의 계약금이 5만원 이상일 정도로 집을 구하는 것이 어려웠다.

한국전쟁의 발발로 주택사정은 더욱 악화되었다. 전쟁의 와중에서 공장이나 공공건물뿐만 아니라 민간주택도 거의 파괴되었다. 전쟁 기간 중 파괴된 주택은 약 60만 호에 이르렀다. 전쟁 동안의 일반적인 주거는 피난민들의 천막촌이었다. 남부여대하고 피난길에 오른 피난민들은 낙동강변에 텐트를 치고 거처하거나 짚으로 움집을 지어 생활하였다. 당시 임시수도였던 부산에는 피난민들이 운집하여 인구가 100만 명을 돌파했으며 주택 사정도 대단히 심각했다. 도로의 양측은 물론 산비탈, 공지, 하천변, 남의 집 마당을 막론하고 피난민들이 움막과 판잣집을 짓지 않는 곳이 없을 지경이었다. 움막이나 판잣집조차 구하지 못한 사람들이 노천에서 잠자리를 해결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휴전이 되자 전란으로 인한 폐허를 복구하기 위해 소위 ‘재건주택’이 건설되기 시작했다. 유엔한국재건단(UNKRA)의 원조를 통해 건설된 재건주택은 보통 9평 규모의 흙벽돌집이었으며, 대부분 온돌과 마루구조에 거실, 부엌, 변소가 서로 인접하여 실내에 배치되었다. 그러나 재건주택은 휴전 후 급조된 주택으로 채광이나 위생 등이 고려되지 않고 최소한의 조건만을 충족시키는 정도였기 때문에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또한 1950년대 말부터는 주택난을 해소하기 위해 국민주택 건설사업이 시작되었다. 1959년 6월 처음으로 서울 불광동에 국민주택단지가 준공되었는데 주택형태는 단독 또는 연립형태였다. 갈현동의 국민주택단지는 단기에 대량의 주택을 건설하기 위해 조립식 자재를 사용하였으며 1964년부터 PC조립식 주택이 건설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주택들은 경비를 절감하기 위해 값싼 자재를 사용하였으며 시공상의 미숙 때문에 누수와 이슬맺힘(結露)이 발생하여 문제가 되었다.

1960년대 주택문화의 특징은 아파트의 등장과 도시화에 따른 빈민문제의 대두였다. 대단지 아파트가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1964년 완공된 마포 아파트였다. 6층짜리 10개 동 총 642세대 규모의 마포 아파트 건설을 계기로 아파트는 새로운 주거형태로 등장하였다.

최초의 아파트 단지

아파트 건설사업이 시작되면서 최초의 아파트 단지로 계획된 서울 마포아파트의 모습이다. 1964년에 완공되었으며 6층짜리 10개 동 642세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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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중반 이후 경제개발계획의 성과로 도시화가 진전되었지만, 그 이면에는 도시빈민 문제가 내재되어 있었다. 서울의 청계천 부근에 전쟁 직후부터 들어서기 시작한 판자촌들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1945년 해방 당시 도시 수는 11개에 도시인구는 전체의 13.7퍼센트밖에 되지 않았지만 1966년에 이르면 도시수는 32개, 도시인구는 33.6퍼센트로 뛰어올랐다. 이처럼 급격한 도시집중은 주택난, 교통난, 교육난, 범죄 문제, 상 · 하수도를 비롯한 공급시설의 부족 등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전반에 걸쳐 여러 가지 심각한 문제를 불러일으켰다. 1971년 8월에 일어난 광주대단지사건은 졸속적인 도시빈민 정책과 부동산투기가 어우러져 일어난 대표적인 사례였다.

한편 1960년대부터 도시주택의 주 연료가 이전의 장작에서 연탄으로 바뀌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연탄은 한국전쟁 기간중 개발된 구공탄이었다. 정부에서는 당시 장작용으로 나무 남벌이 심각해지자 산림애호 정책의 하나로 구공탄의 사용을 널리 권장하면서 연탄이 주 연료원이 되었다. 1966년의 연탄파동은 서민들의 애로를 그대로 보여주는 사례였다. 이 해 여름부터 시작된 연탄기근은 겨울을 앞두고 더욱 심해져 시민들의 겨우살이를 위협했다. 연탄값 인상을 요구하는 업자들이 생산량을 줄이자 한두 장의 연탄이라도 사기 위해 주부들은 줄을 이어 차례를 기다려야 했다. 특히 겨울에는 연탄재를 처리하는 것이 커다란 문제였다. 집집마다 대문 옆에 연탄재가 쌓여 있는 장면은 당시 도시 주택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그 보다 더 큰 문제는 연탄가스였다. 각 병원에서 고압산소 치료기를 들여놓았고 식초, 동치미 등 민간요법이 개발되기도 했지만 근본적인 해결은 1980년대 이후 보일러의 등장까지 기다려야 했다.

아파트의 확산과 생활의 변화

1970년대 접어들어 아파트 단지가 본격적으로 건설되면서 주거문화는 크게 변화했으며, 이로 인한 사회문제까지 동반하였다. 아파트 건설 · 보급과 관련하여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은 1970년 발생한 와우아파트 붕괴사고이다. 준공된 지 불과 4개월 만인 이 해 4월 8일 서울 마포구 창전동 와우지구 시민아파트 15동 건물 전체가 붕괴되어 33명이 사망하고 39명이 중경상을 입는 사고가 일어났다. 이 어처구니 없는 사고는 전형적인 부실시공의 결과였다. 조사 결과 아파트의 받침기둥에 철근을 제대로 쓰지 않아 기둥이 건물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한 때문으로 밝혀졌으며, 양적인 팽창의 허구를 보여주었다.

이러한 대형 아파트 단지는 지속적인 경제성장과 산업화로 토지의 수요가 크게 늘어나면서 지가가 급속히 상승하여 토지 이용의 효율을 극대화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었다. 그런데 아파트가 점차 투기의 대상이 되면서 시세 차익을 노리던 ‘복부인’들이 몰려들어 사회문제가 되었다. 1970년대 중반부터 서울의 강남이나 잠실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건설되었는데, 1978년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분양과정에서 발생한 사회 유력층들의 불법 · 부정 행위는 그 대표적인 사례로 기록된다.

과열된 아파트 투기 붐

아파트 분양 현장에 인파가 몰려 있는 모습이다. 건축되는 아파트의 물량에 비해 수요자가 절대적으로 많았기 때문에 입주권을 얻기 위한 경쟁이 치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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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지적해야 할 점은 아파트 문화가 갖는 이중성의 문제이다. 산업화의 진전에 따라 가족형태가 종래의 대가족제에서 핵가족으로 변화하였으며 아파트는 이러한 핵가족화 현상에 걸맞은 주거형태였다. 3~4명의 가족이 살기에 적합한 아파트는 집안의 생활에도 많은 변화를 초래했다. 입식부엌이 보편화되고 각종 주방용품을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으며 식당과 거실은 가족들의 공유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편리함의 이면에는 아파트 문화의 폐쇄성이 상존하고 있음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현대 사회가 보여주고 있는 사회-가족-개인 간의 단절과 격리현상은 인간소외 문제를 야기했으며 여기에 아파트 문화가 적지 않게 기여하고 있다. 아파트는 가족 간의 관계에서나 이웃 간의 관계에서도 공동체적인 생활보다는 독립적이고 고립적인 생활로 이끌고 있다. 최근 아파트에서도 공동체 문화를 만들어 나가기 위한 여러 가지 노력이 진행되고 있지만 그 결과가 주목된다.

한편 1970년대 농촌의 주택개량사업은 새마을운동의 일환으로 진행되었다. 새마을운동은 농촌을 중심으로 주택개량 · 도로 보수 · 농지 정리에 역점을 둔 환경개선 사업과 소득증대 사업 및 의식개조 사업으로 전개되었다. 주택개량의 초점은 지붕개량에 두어졌으며, 초가지붕이 석면에 시멘트를 섞어서 만든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이러한 주택개량사업은 지역적인 특성을 살리지 못하고 획일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데 그쳤다.

주택문화 어디로 가는가

1980년대 들어와서 신도시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건설되고 달동네 판자촌들도 재개발을 통해 아파트 단지로 변모하고 있다. 그래도 주택부족 문제는 여전히 해소되지 않고 있다. 달동네 판자촌에 대한 재개발은 철거민들의 생존권 문제를 사회문제로 등장시켰다. 거주자를 위한 재개발이 아니라 투기꾼을 위한 재개발이었기 때문이다. 서민들을 대상으로 한 연립주택 형태의 다가구주택, 다세대주택, 다중주택 등도 지속적으로 건설되었다.

이렇게 많은 집이 지어졌음에도 주택부족은 해소되지 않았고 이는 부동산에 대한 투기로 이어졌다. 1980년대 중 · 후반의 부동산 투기 붐은 국가적인 위기로까지 여겨졌다. 1980년대 중반 3저호황으로 무역수지가 호전되고 유휴자금이 조성되어 부동산 투기붐이 일면서 주택문제는 더욱 심각한 상황에 이르렀다. 전세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자 서민 세입자의 자살이 속출하는 등 사회문제로 비화되었다. 1989년 4월 정부가 발표한 신도시 건설계획은 이러한 주택문제의 해결을 위한 고육책이었다. 그러나 무리한 사업 추진으로 바다모래 파동이 보여주듯이 부실시공 문제가 내재하여 거주자를 불안하게 하였다.

오늘날 주택은 우리의 생활에 많은 편리함을 주고 있다. 그러나 주택은 여전히 재산의 중요한 증식수단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이로 인한 상대적 박탈감 또한 적지 않다. 또한 도시의 철거민 문제, 빈민 문제 등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산적해 있다. 개항 이후 우리의 역사에서 주거문화는 근대화의 진전 양상과 궤를 같이해왔다. 외형적인 성장의 이면에는 항상 빈부 격차가 존재해왔으며 이러한 외형적인 격차는 주택의 평수로 표현되고 있다. 또한 주택이 삶의 공간이 아니라 재산증식의 수단이 되면서 역설적으로도 주택이 그곳에 사는 사람의 삶을 소외시키기도 한다. 언제나 삶의 공간으로서의 주택을 되찾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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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연구회 집필자 소개

1988년에 만들어진 한국사 학계의 전문 연구자 단체이다. 550여 명의 대학 교원, 대학원생이 연구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난 역사를 연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올바른 역사 교육과 역사 대중화..펼쳐보기

조이현 집필자 소개

정보기록보존소 학예연구사

출처

우리는 지난 100년동안 어떻게 살았을까 1
우리는 지난 100년동안 어떻게 살았을까 1 | 저자한국역사연구회 | cp명역사비평사 도서 소개

지난 한 세기는 우리에게 과거 수백년에 맞먹는 변화가 일 어난 격동의 세기였다. 식민지와 전쟁을 경험했으며 이데올로기의 극 한 대립과 과학기술의 놀라운 발전이 한데 뒤..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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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한옥에서 아파트로우리는 지난 100년동안 어떻게 살았을까 1, 한국역사연구회, 역사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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