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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동
안 어...

대중가요 속의 바다와 철도

문화도 상품이다

대중가요가 세상을 드러내는 법

대중가요는 세상의 변화에 한편으로 민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매우 둔감하다. 대중 속에 살붙여 그들을 소비자로 삼아 살아가는 대중가요의 속성상, 세상의 변화 및 대중들의 취향과 욕망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한다면 대중가요는 죽은 목숨이다. 그런 점에서 대중가요는 시대에 민감한 소설보다도 어떤 측면에서는 더 재빠르게 포착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 대중가요는 시대 변화를 조망하거나 근심하지 않는다. 사람들의 먹고 사는 이야기, 사회적인 이야기들은 기가 막히게 제거되고, 남녀간의 사랑과 사적인 이야기들로만 채워진다. 검열에서 살아남으면서도 대중에게 잘 팔려야 하니까. 대중가요는 세상의 변화를 날렵하게 타고 날아 신제품 라면처럼 대중의 혀 위에 몸을 얹는다.

그렇기 때문에 대중가요의 창작자들이 작품을 통해서 세상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가를 진지하게 살펴보려는 노력은 종종 실패한다. 그렇게 살펴볼 만한 것은 몇몇 싱어송라이터에 불과하다. 오히려 흥미로운 것은 창작자가 힘주어 의도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대중가요에 드러나 있는 여러 가지 요소들이다. 그래서 몇몇 소재, 표현들을 중심으로 대중가요사를 따라가 보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다.

「사의 찬미」를 취입하는 윤심덕

윤심덕은 개화된 여성으로 노래를 통해서 자신을 세상에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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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적 근대의 이율배반성

역사가 발전한다고 해서 그 속에 속한 인간들이 모두 행복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역사발전이 급격히 이루어지는 시기에, 그 속의 사람들은 급격히 바뀌는 세상을 감당하느라 몸과 마음에 큰 상처를 입는다. 하물며 근대로의 이행을 곧 발전이라고 단언할 수 없었던 우리의 20세기 초는 어떠했을지 짐작하고도 남을 만하다.

외세의 강압에 의한 식민지적 근대의 경험 때문에 당시의 지식인들은 뚜렷한 근대적 현상들을 무조건 두 손 들고 환영할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표면적으로는 자유연애를 주창하면서도 그 자유연애가 곧 순종적인 본처에 대한 배신으로 이어진다는 데에 대한 자책감과 찜찜함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이 글에서는 기차(철도)와 바다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기차와 철도는 근대를 대표하는 사물이다. 기차는 농업과 어업으로 생활을 영위하는 작은 마을들을 단일한 경제권으로 묶어내었고, 이로써 중세적인 농촌공동체의 질서를 넘어선 국민국가의 성립을 가능하게 하였다. 그리고 철도가 끝난 곳에는 바다가 열려 있었다. 국가와 국가를 이어주는 것은 바다요 항구였다. 유럽인들은 바다에 나가 다른 나라와 교역을 하였고, 아직 근대국가에 이르지 못한 나라들을 점령하고 식민지로 삼았다. 따라서 기차와 바다는 산업혁명과 근대적 교역을 의미하는 강인하고 진취적인 이미지를 주게 된다.

그런데 우리 근대사에서는 어떠할까? 과연 우리도 기차와 바다를 그렇게 진취적 이미지로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우리의 철도는 일본의 강압에 의해 놓여졌고 그것은 곧 굴욕적인 국권침탈을 예비하는 것이었다. 또한 우리는 바다를 통해 들어온 사람들로부터 고통받았고, 그 항구로 쌀이 실려나갔으며 조선사람들은 ‘대일본제국’의 군인과 노동자가 되어 배를 타고 나갔다. 기차와 바다는 결코 희망의 사물이 아니었다.

그런 정황을 보면, 기차에 관한 노래로 가장 오래된 최남선의 창가 「경부철도가」(1908년)는 지나치게 긍정적이고 기쁨에 찬 철도 노래라는 점이 오히려 우리를 찜찜하게 한다.

우렁차게 토하는 기적소리에 / 남대문을 등지고 떠나가서 / 빨리 부는 바람의 형세 같으니 / 날개 가진 새라도 못 따르겠네

늙은이와 젊은이 섞여 앉았고 / 우리 내외 외국인 같이 탔으나 / 내외친소(內外親疎) 다같이 익혀지내니 / 조그마한 딴 세상 절로 이뤘네

관왕묘와 연화봉 둘러보는 중 / 어느덧에 용산역 다다랐도다 / 새로 이룬 저자는 모두 일본집 / 이천여 명 일인이 여기 산다네

······(중략)······

부산항은 인천의 다음 연대니 / 한일 사이 무역이 주장 되고 / 항구 안이 너르고 물이 깊어서 / 아무리 큰배라도 족히 닿이네

······(중략)······

일본사람 거류민 이만 인이니 / 얼른 보면 일본과 다름이 없고 / 조그마한 종선도 일인이 부려 / 우리나라 사람은 얼른 못하네 /

······(중략)······

슲도다 동래는 동남제일현 / 부산항은 아국 중 둘째 큰 항구 / 우리나라 땅같이 아니보이게 / 저렇듯한 심한 양 분통하도다

(하략)······

이 노래는 최초의 창가로 알려져 있다. 우리는 최초를 매우 좋아한다. 그러나 모든 최초에도 또 근원과 바탕은 있는 법이다. 우리 안에 토대가 없는 갑자기 완성된 형태의 ‘최초’로 무엇이 생겼다는 것은, 외국에서 완성품을 수입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창가는 일본 창가를 수입한 것이다. 서양화된 음악에 붙여진 일본식 음수율 7 · 5조의 노래라는 게 그 증거이다.

이 노래에서는 철도가 문명개화하는 세상을 여는 사물로 드러난다. 문명개화한 세상이란 사해동포주의가 관철되는 세상이라는 인식이 뚜렷하다. 문명개화가 외세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거부감은 거의 없다. 마지막 부분에서는 철도와 기차, 부산항의 무역선과 항만 운영이 모두 일본인의 손에 이루어지고 있음을 통탄하고서 우리가 힘을 키워 되찾기를 바란다는 내용이 덧붙여져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작품 전체는 철도라는 개화한 문명이 들어온 것에 대한 신기함과 칭송에 치우쳐 있으며 통분의 정도는 매우 약하다. 당시 1908년이면, 통감부가 설치되어 주권의 대부분을 상실했던 시기였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 그의 태도가 다분히 친외세적 문명개화라고 충분히 이야기할 만하다. 이런 노래를 보아서도, 일제 말기 최남선의 친일행각은 일본의 강요에 의해서라고만 이야기할 수는 없을 듯하다. 철도의 끝은 바다이며 바다 건너는 일본이다.

화려한 도시 풍경 속의 절망적 이별

한편으로는 근대적 문명의 상징으로서, 다른 한편으로 주권 상실과 민중 억압의 상징으로서 철도의 이미지는 대중가요에서 그다지 명료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기차는 도시의 호사한 풍경의 하나로 등장한다.

구름다리 넘을 때 몸부림을 칩니다 / 금단추를 매만지며 몸부림을 칩니다 / 차라리 가실 바엔 맹서도 쓸데없다 / 아! 부산차는 떠나갑니다
「눈물의 경부선」

서울역 ‘구름다리’, 금단추, 이런 화려한 사물들은 도시임을 말해준다. 주인공은 어떤 직업의 여자일까? 글쎄 금단추를 단 남자에게 매달리는 것으로 보아 기생이 아닐까? 아무래도 일제시대까지 기차는 보통사람들이 자주 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대중가요 속의 철도와 바다는 그다지 기분 좋지만은 않다. 기차역과 항구는 이별의 장소로 비쳐지면서, 뭔가 석연치 않음을 풍기고 있다. 기차를 타고, 배를 타고 떠나가는 임은, 걸어서 떠나가는 임과는 달리 힘 없는 보통사람으로서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다는 절망을 안겨준다. 비극은 절망적이며 그 원인은 무력하고 못난 자신이나 (걸어서 기차를 따라가 붙잡는 것은 가능하지 않으니까) 애매한 기차 탓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절망은 트롯의 탄식과 흐느낌 등 패배주의적 이별 정서로 드러나고 있다.

바다와 항구의 이별은 기차보다 덜 화려하고, 서민의 정서가 더 강하다. 항구는 식민지 본국으로 쌀을 실어 나르던 곳이고 일본으로 노동력이 나가던 곳이다. 물론 여전히 항구의 풍광은 멋있게 묘사된다.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고 / 삼학도 파도 깊이 스며드는데 / 부두의 새악시 아롱 젖은 옷자락 /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목포의 눈물」
    • 1~2면화를 쌓아 둔 목포항과 「목포의 눈물」 노래비 제막식

      일제시기 항구는 식민지 침탈과, 기약 없는 이별의 장소였다. 이 사연은 「목포의 눈물」에 담겨져 사람들에게 널리 불렸다.

한편 바다의 이별은 철도보다 훨씬 절망적이다. 물결 타고 훌쩍 떠나버린다는 느낌이 강하다. 항구마다 널려 있는 홍등가와 망망대해 바다에 떠 있어서 고향에 갈 수 없다는 식민지시기의 나그네 의식도 항구에는 짙게 깔려 있다.

항구마다 여자도 많드라 / 항구마다 술집도 많드라 / 허건만 허건만 못난 이내 청춘 / 어리석은 나한테는 / 간데 쪽쪽 무정터라 괄세드라

항구마다 인심도 많드라 / 항구마다 눈물도 많드라 / 허건만 허건만 시들한 세상에 / 혼자 사는 나한테는 / 간데 쪽쪽 슬프드라 외롭드라
「항구마다 괄세드라」

민요와 구전가요 속 민중들의 오기

철도와 항구에 대한 식민지 민중의 착잡함은, 대중가요에서 고작 이 정도로밖에 드러나지 않는다. 이에 비한다면 민중들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민요나 구전가요는 얼마나 적확하고 뛰어나게 이를 형상화하는지 놀라울 정도이다.

인천 제물포 살기가 좋아도 왜놈의 등쌀에 못 살겠네

다른 말을 덧붙일 필요가 없다. 얼마나 솔직하고 간명한가! 못 배운 무지렁이 민중들도 이런 노래를 만들어 부르는데, 왜 배운 사람들이 만든 대중가요는 이런 적확한 표현을 만들어내지 못할까? 그것은 검열을 통과해야 하고 상업적으로도 잘 팔려야 하는 대중가요란 존재의 본원적 보수성 때문이다.

구전가요에는 이런 노래도 있다.

일본 갔다 조선 나와 돈벌이 없어서 / 중국집에 호떡집에 뽀이가 됐구나
모자는 찌그러져서 빵떡모자요 / 새로 사온 네꼬다이도 다 떨어졌구나
똘똘 궁그러가는 까만 기차야 / 연기 뿜고 달린다고 니만 잘 났냐 / 지게 지고 산에 가는 나도 잘 났다

세번째 줄 가사는 앞의 두 줄 가사와는 분리되어 만들어진 듯하다. 앞부분의 껍데기 ‘하이카라’의 희화된 표현도 재미있거니와, 뒷부분 호사스런 기차에 대한 시골 나무꾼의 묘한 반감은 나름대로 서민의 오기 같은 것이 느껴진다.

민요 가사에 있는 ‘낙동강 칠백리 공굴 놓고 / 하이카라 잡놈이 왕래한다’(‘공굴’은 콘크리트. 즉 포장도로라는 뜻) 같은 표현들을 보면, 서민들의 수탈을 기반으로 한 식민지적 근대에 대한 반감은 노래에서도 널리 퍼져 있었다. 단지 그것이 대중가요나 창가 같은 공식적인 노래에서는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대중가요의 보수성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결국 일제 말기 일본의 대륙침략 정책에 적극 동조한다. 1930년대 말로 접어들면서 바다가 갑자기 희망의 상징으로 등장하는 건전가요풍의 노래가 나오기 시작하는 것이다.

어서 가자가자 바다로 가자 / 출렁출렁 물결치는 명사십리 바닷가 안타까운 젊은 날의 로맨스를 찾아서 헤이 / 어서 가자 어서 가자 어서 가 젊은 피가 출렁대는 저 바다는 부른다 저 바다는 부른다.
「바다의 교향시」
바다는 부른다 정열이 넘치는 청춘의 바다여 / 깃발은 펄렁펄렁 바람새 좋구나 / 저어라 저어라 저어라 저어라 바다의 사랑아 / 희망봉이 멀지 않다 행운의 뱃길아
「감격시대」

눈물과 탄식의 트롯 일색이었던 풍토에서, 전쟁 색이 짙어지는 1939년에 갑자기 이런 노래가 등장하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일제 말기에 희망봉이 멀지 않다고? 이 노래들이 풍기는 진취성의 정체를 곰곰 생각해보면, 이는 분명 노골적인 친일가요로 넘어가기 직전의 모습인 것이다. 이것을 보면 1940년대에 지은 현제명 작곡의 「바다로 가자」도 충분히 친일가요의 혐의가 있다.

1940년대를 넘어서면 「만포선 길손」, 「만포선 천리길」, 「향수 열차」 등 만주 대륙을 달리는 철도를 노래한다. 노골적인 친일 주장을 하는 작품도 있고 그렇지 않은 작품도 있지만, 만주와 대륙에 대한 적극적 관심을 불러일으키려는 일제의 대륙침략 정책에 부응했다는 비판을 면할 수는 없을 것이다.

호남선과 섬마을의 서러움

해방 후 기차는 많은 사람들이 탈 수 있는 것이 되었다. 기차가 주는 위압감은 사라졌지만, 그만큼 사람들의 이동이 많아지고 그에 따라 이별도 많아졌다.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 도시로 향했고, 1960년대 경제개발계획이 추진되면서부터는 ‘무작정 상경’이란 말이 유행어가 될 정도로 꾸역꾸역 서울로 올라왔다.

이때에도 역시 기차는 이별의 이미지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그 애절한 트롯의 이별은 대개 호남선에서 이루어진다. 6·25 피난시절을 배경으로 하는 「이별의 부산정거장」 같은 노래를 제외하고는 거의 다 호남선인 것이다.

목이 메인 이별가를 불러야 옳으냐 / 돌아서서 피눈물을 흘려야 옳으냐 (하략)
「비 내리는 호남선」
잘 있거라 나는 간다 / 이별의 말도 없이 / 떠나가는 새벽열차 / 대전발 영시오십분 (중략) 목포행 완행열차
「대전 부르스」

왜 하필이면 호남선일까? 호남지방 사람들의 이별이 많았거나, 그들이 이별의 노래를 더 즐겨했다거나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니었을까? 아무래도 그것은 이농(離農)과 관련 있을 듯하다. 영남지역은 공장이 들어서면서 주변의 농업인구를 흡수했지만, 여전히 농업지역으로 남아 있던 호남지방 사람들은 먹고 살기 위해서는 가난한 농촌을 떠나 서울로 올라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고향을 떠나는 사람들

‘경제개발 · 근대화’라는 구호 아래 많은 사람들이 농촌을 떠나 서울로 향하였다. 1960년대의 대중가요는 고향을 떠난 사람들의 애환을 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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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바다의 이미지도 달라진다. 바다를 앞에 두고 이별을 하는 것으로는 매일반일 듯하지만, 방향이 달라져 있다. 식민지시기에는 육지에서 바다로 사람을 떠나보냈다면, 1960년대에는 섬에서 육지로 사람을 떠나보냈다. 그리운 사람이 바다 위나 먼 이국 땅으로 떠나간 게 아니라, 섬으로부터 서울로 떠나간 것이다.

해당화 피고 지는 섬마을에 / 철새 따라 찾아온 총각 선생님 / 열아홉 살 섬색시가 순정을 바쳐 / 사랑한 그 사람은 총각 선생님 / 서울엘랑 가지를 마오 가지를 마오
「섬마을 선생님」
얼마나 멀고먼지 그리운 서울은 / 파도가 길을 막아 가고파도 못 갑니다 / 바다가 육지라면 바다가 육지라면 / 배 떠난 부두에서 울고 있지 않을 것을 아아 / 바다가 육지라면 / 이별은 없었을 것을
「바다가 육지라면」
(상략) 못 견디게 그리운 아득한 저 육지를 / 바라보다 검게 타버린 검게 타버린 흑산도 아가씨
「흑산도 아가씨」

시골에서는 끊임없이 서울로 올라갔다. 서울은 돈을 벌 수 있는 곳, 화려하게 발전하는 곳, 출세의 기회가 주어지는 곳이다. 너도나도 서울로 올라가는 상황에서, 평생 가난하고 천대받는 촌무지렁이로 남아 있어야 하는 사람들의 소외감과 절망감은 매우 컸을 것이다. 서울에서 섬으로 내려온 총각 선생님은, 바로 서울에서 왔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인기가 있었을 것이다. 서울은 동경할 만한 곳이었으니까.

여기에서 ‘섬’과 ‘바다’란 설정은, 도저히 따라갈 수 없다는 소외감과 절망감의 표현이다. 사랑하는 님이 훌쩍 바다 건너 서울로 가버리면, 섬에 남아 있는 여자로서는 바다를 바라보며 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서울이 있는 육지와 자신이 남아 있는 섬은, 바다라는 결정적인 장애물이 가로놓여 있는 것이다. ‘아아, 육지라면 걸어서라도 가련만, 바다가 가로막고 있으니’ 어쩌구 하는 신파조 대사가 나올 만하다. 그냥 시골 촌동네가 아니라 하필 섬으로 설정한 것은, 이러한 거리감을 극대화하는 장치인 셈이다.

근대의 호사스러움에 매달려온 대중가요조차, 근대화를 따라 가다 따라 가다 그로부터 어쩔 수 없이 소외되는 사람들의 슬픔을 드러낼 수밖에 없게 되었음을 이런 노래들은 보여준다. 물론 그 역시 서울이 보여주는 근대화의 신화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지만.

1970년대 이후 도시민의 눈에 비친 기차와 바다

이제 1970년대가 되면서부터 시각은 완전히 서울사람들 쪽으로 옮겨진다. 기차와 바다를 도시인의 눈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1970년대 몇몇 곡에서는 기차나 바다가 이농해서 서울에 정착한 이농 첫 세대들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사물로 비쳐진다. 시골과 바다를 떠나 서울로 오고 싶어했건만, 서울 생활은 그렇게 만만치 않다. 기껏 일해야 입에 풀칠하고 살기 힘든 서울 생활에 지친 도시 서민들에게 이제 그곳은 돌아가 쉬고 싶은 고향인 것이다.

코스모스 피어 있는 정든 고향역 / 이쁜이 곱분이 모두 나와 반겨 주겠지 / 달려라 고향열차 설레는 가슴 안고 / 눈 감아도 떠오르는 그리운 나의 고향역
「고향역」

그러나 역시 1970년대 이후 대중가요에서 지배적인 기차와 바다의 이미지는, 여행과 휴가이다. 1970년대에는 전후에 태어나 경제개발계획이 이루어지던 시기에 어린 시절을 보낸 서울내기들이 청소년으로 성장했다. 이 시기에 청바지와 통기타로 대표된 청년문화가 발흥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1980년대 이후가 되면, 아예 대도시에서 태어나 한 번도 아파트 아닌 곳에서는 살아본 적이 없는 전형적인 도시 아이들이 점점 늘어나게 된다. 여행이 아니면 기차를 타볼 기회가 없는 이 도시의 청소년들이 기차와 바다에서 휴가 여행을 연상하는 것은 당연하다. 1970년대부터 여태까지는 한 번도 등장한 적 없는 새로운 바다, 기차의 모습이 등장한다.

조개껍질 묶어 그녀의 목에 걸고 / 불가에 마주 앉아 밤새 속삭이네 / 저 멀리 달그림자 시원한 파도소리 / 여름밤은 깊어만 가고 잠은 오지않네
「라라라」
별이 쏟아지는 해변으로 가요 / 젊음이 넘치는 해변으로 가요 / 달콤한 사랑을 속삭여 줘요 / 연인들의 해변으로 가요 (하략)
「해변으로 가요」
바닷가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 / 바닷가에서 추억을 맺은 사람 / 손잡고 해변을 단둘이 거닐며 / 파도소리 들으며 사랑을 약속했던 / 그러나 부서진 파도처럼 / 쓸쓸한 추억만 남기고 가버린 / 바다의 여인아
「바다의 여인」

바다는 행락지이며 사랑이 싹트는 낭만적인 곳으로 그려진다. 기차는 이 서울로부터 탈출하게 해주는 낭만적이고 행복한 사물이다. 가끔 청소년들의 순수함을 받아주지 못하는 기성세대의 세상에 대한 절망으로 ‘삼등완행열차’를 타고 깨끗한 동해바다의 고래를 찾아 떠나는 식(「고래사냥」)의 고민이 드러나기도 하지만 그 역시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이기는 매한가지이다.

1970년대 여름의 포항 송도 해수욕장

도시화가 되면서 사람들에게 바다는 휴식과 낭만이 숨쉬는 곳, 해변의 사랑이 싹트는 곳이 되었다. 또한 그 바다는 대중가요에도 고스란히 투영되어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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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더 이상 바다와 기차역은 생활의 고달픔이나 절절한 이별이 있는 곳이 아니다. 오히려 「섬소년」이나 「인어 이야기」에서처럼 더더욱 소녀적 낭만성으로 치장된다. 이들 도시의 청소년들에게 기차가 인생의 아픔과 관련되어 경험되는 것은, 기껏 해야 「입영열차 안에서」 정도이다.

대중가요의 보수성과 민중가요의 안목

1970년대 이후 대중가요에서, 기차(철도)와 바다(항구)가 근대의 상징으로 드러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민중가요의 연장선상에 있는 김민기와 돌의 진지한 포크송들이 보여주는 기차의 모습은 주목할 만하다.

(상략) 강 건너 공장 굴뚝엔 시커먼 연기가 솟아오르고 / 순이네 뎅그란 굴뚝엔 하얀 실오라기 피어오른다 / 하늘은 어두워 가고 물결은 춤추는데 / 건너 공장에 나간 순이는 왜 안 돌아오는 걸까 / 높다란 철교 위로 호사한 기차가 지나가고 / 강물은 일고 일어나 작은 나룻배 흔들린다 (하략)
「강변에서」
(상략) 이따금씩 지나가는 기차를 보면 / 내 고향 산 하늘이 그리워지네 / 뜨겁던 지난 여름날 더운 바람 속에 / 설레이던 가슴 안고 서울로 서울로 / 갈 수 없는 그리운 그리운 내 고향 / 나는 가고 싶지만 내가 갈 수가 없네
「갈 수 없는 고향」

1970년대 한강변 풍경을 수채화처럼 그려내는 김민기의 「강변에서」에서, 기차는 ‘공장 굴뚝 시커먼 연기’와 짝을 이루어, 순이네 집 작은 굴뚝과 작은 나룻배와 대조를 이룬다. 근대화, 금속성으로 뭔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듯하면서도, 공장 다니는 순이와 강가에 떠있는 작은 나룻배 같은 우리네 보통사람들의 삶의 한 구석을 짓누르는 듯하는 이미지를 담담하면서도 적확하게 포착해내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풍경을 그려내는 돌의 「갈 수 없는 고향」에서도 이농으로 고향을 떠나 도시의 하층민이 된 주인공의 슬픔을 잔잔하게 흔들어놓는 사물이 기차이다. 이들은 왜 하필 철교가 보이는 한강변에 앉아 있었을까? 한강철교는 대방동 · 영등포와 노량진으로 연결된다. 즉 도시 하층민들의 게딱지집과 공단지역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이들이 청년시절 지은 노래임에도 불구하고, 스쳐가는 한 대목에서나마, 당대 철도와 기차의 사회적 이미지를 함축적으로 포착해낸 그 안목을 주목하게 된다.

이런 안목은 진보적 포크송과 민중가요로 연결되는 맥에서나 발견된다. 지금 대중가요의 기차와 바다는 생활인의 아픔을 떠나 여행과 휴가의 세계에 머물러 있다. 식민지시기 기차의 호사스러움에 집착하고 식민지 침탈의 정서에 일조하던 대중가요가, 70년대 이후 휴가의 호사스러움에 매달리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 시대 대중들의 욕망의 변화를 민감하게 포착하되 그 욕망 중 보수적 측면을 받아들이는 대중가요의 속성이 우리 근대성의 신화, 근대의 호사스러움에 집착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 보수성의 전복 가능성은 대중가요에서는 좀처럼 찾아지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보통사람들의 입에서 터져나오던 구전가요와 민요, 그리고 진보적인 민중가요에 그 가능성을 기대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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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연구회 집필자 소개

1988년에 만들어진 한국사 학계의 전문 연구자 단체이다. 550여 명의 대학 교원, 대학원생이 연구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난 역사를 연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올바른 역사 교육과 역사 대중화..펼쳐보기

이영미 집필자 소개

한국예술종합학교 한국예술연구소 책임연구원

출처

우리는 지난 100년동안 어떻게 살았을까 1
우리는 지난 100년동안 어떻게 살았을까 1 | 저자한국역사연구회 | cp명역사비평사 도서 소개

지난 한 세기는 우리에게 과거 수백년에 맞먹는 변화가 일 어난 격동의 세기였다. 식민지와 전쟁을 경험했으며 이데올로기의 극 한 대립과 과학기술의 놀라운 발전이 한데 뒤..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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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대중가요 속의 바다와 철도우리는 지난 100년동안 어떻게 살았을까 1, 한국역사연구회, 역사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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