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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흔히 “교육은 국가 백년의 대계”라고 한다. 교육이 국가의 발전과 미래를 결정하는 근본이라는 뜻일 것이다. 우리의 근대교육이 시작된 지 어느덧 백년이 지났다. 그 사이 우리 사회에서 줄곧 제기되었던 말이 ‘근대화’였고, 이는 교육의 발전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다. 오늘날까지 발전된 우리 사회를 본다면 교육이 그 역할을 충분히 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일제의 식민지배와 해방 이후의 분단체제, 독재체제 등과 같은 근대사회의 왜곡과 굴절 속에서 교육의 본질이 변질되는 현상도 겪었다.
아는 것이 힘
우리 사회의 역사적 과제였던 근대화는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고, 근대적인 국가와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이런 방안 중의 하나가 서양의 근대학문을 배우는 것이었고, 우리의 근대교육도 이런 필요성에서 시작되었다.
근대 초기에는 서양의 기술문명을 수용하여 부국강병을 이루는 것이 바로 근대화라고 생각하였다. 일찍이 1880년대 초 중국과 일본에 근대화 사업을 배우기 위한 시찰단(영선사, 신사유람단)을 파견한 것도 그 일환이었다. 이때 시찰단의 일원으로 일본으로 갔던 사람 중에는 그대로 남아 중등교육기관이나 일본군사학교에 유학하기도 하였고, 그 길로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공부한 사람도 있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학교는 1883년 덕원부(원산)에 세워진 원산학사였다. 원산 개항과 더불어 들어온 외세, 특히 일본상인들의 침입에 대응하기 위해 읍민들이 기금을 모아 세운 것으로, 문예반과 무예반을 두고 근대적 교과과정을 가르쳤다. 정부에서도 외국어에 능한 사람을 양성하기 위해 동문학(同文學, 1883)이나 육영공원(育英公院, 1886) 같은 학교를 설립하였다.
근대교육이 제도적으로 정비된 것은 갑오개혁 때였다. 학부아문을 설치하여 근대적 교육기관의 설립과 운영을 담당하게 하였으며, 또 학술과 기예를 배우기 위해 외국에 유학생을 파견하였다. 1895년 2월에는 “부강하고 독립된 나라는 모두 인민의 지식이 개명하였고, 지식의 개명은 교육의 선미(善美)로 되었으니, 교육은 실로 국가를 보존하는 근본”이라는 ‘교육조서(敎育詔書)’를 반포하였다. 이에 한성사범학교를 개교하고, 소학교령에 의해 6년 연한의 관공립소학교를 설립하기 시작하였다. 교육을 위한 각종 교과서도 편찬하였다.
근대화를 위한 교육을 정부보다도 더 강조하던 사람들은 서양근대문명의 전반적 수용을 적극적으로 주장하던 개화세력이었다. 그들은 국가나 민족의 존망이 자강(自强) 곧 힘의 강약에 달려 있고, 이 자강은 교육과 산업발전을 통한 실력양성에서 이룰 수 있다고 하였다. “아는 것이 힘이다, 배워야 산다”라는 기치가 내세워졌던 것이다. 1896년 독립협회운동 이후 국민교육회 같은 교육운동 단체를 비롯하여 여러 사회운동 단체, 그리고 각종의 학회들을 통하여 이를 실천하였다. 그들은 전국에 각종 학교를 설립하였고, 또 자산가들에게 학교설립을 권유하였다. 옛 학문에 젖어 신교육을 반대하던 보수층을 공격하였고, 자제들을 신식학교에 보낼 것을 권장하였다. 이 결과 1909년에 이르러 전국에 각종 사립학교가 2천250개 교나 되었다.
그들의 최대 목표는 바로 우매한 민중을 교육하고 계몽시키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민권을 성장시켜 인민이 모든 권한을 가져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인민은 단지 계몽의 대상일 뿐이었다.
힘을 기르기 위한 교육은 일제강점시기에도 계속되었다. 이제는 민족의 해방을 위한 교육이 강조되었던 것이다. 특히 1920년대 문화운동에서는 개조와 신문화건설, 실력양성이라는 말이 유행하였고, 그 방안으로 교육이 거론되었다. 각 지방에서는 옛 서당을 개량하여 이용하기도 하였고, 각지에 우후죽순처럼 조직된 청년회에서 야학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민족 인사들이 설립한 사립학교도 성황을 이루었다. 이 결과 고등교육에 대한 열망도 동시에 일어나, 1922년에는 대학을 설립하기 위해 ‘조선민립대학설립기성회’가 조직되기도 하였다. 이 운동은 결국 일제의 방해와 자금 모집의 부진으로 실패하였지만, 많은 교육기관에 의해서 행해진 민족교육은 근대화와 민족해방이라는 민족적 과제를 이루기 위한 인재를 양성하였다.
그런데 힘을 기르기 위한 교육은 자칫 개인의 출세로만 귀결되기도 하였다. 이 무렵 근대화를 주장한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는 힘의 논리에 매몰되어 힘을 갖지 못한 약자인 우리나라는 강자인 일본의 지배를 받는 것이 불가피하며 나아가 일본의 지도에 의해 근대화, 문명개화를 달성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였다. 이들의 경우 근대교육은 알량한 일본어 실력을 바탕으로 일제 침략의 앞잡이가 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근대화 과정에서 교육이 가지는 또 다른 얼굴인 셈이다.
황민화 교육과 보통학교 입학경쟁
교육은 인간의 개인적 발전을 가능하게 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 사회체제 유지의 수단이 되기도 하였다. 제도권 교육을 장악하고 있는 조직이나 세력들은 교육을 통하여 그들의 체제를 유지하였다.
일제는 ‘내선일체(內鮮一體)’의 식민정책 기조 위에서 교육목표를 조선인의 ‘황민화’에 두었다. 합방 직후 조선교육령에서는 조선에서의 교육목적을 ‘충량(忠良)한 국민’ 양성에 두었다. 이것은 일본 군국주의 교육정신이 담긴 ‘교육에 관한 칙어(勅語)’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이에 따르면 조선인에게는 보통교육과 실업교육을 중심으로 약간의 전문적 기예를 가르치는 전문교육만 허용되었고 대학교육은 허용되지 않았다. 보통교육을 통하여 일본어 교육을 강화하고, 실업교육을 통하여 하급지식을 갖춘 직업인을 양성하고자 한 것이었다. 보통학교의 경우 조선어와 한문시간이 1주에 5~6시간인 데 비해 일본어는 10시간이었고, 고등보통학교에서도 조선어 · 한문이 3시간이고 일본어는 7시간이었다. 또 각급 학교에 수신을 강조하여 일본의 ‘황실과 국가에 대한 관념’ 등을 가르쳐 일제의 식민지배에 순응하는 ‘선량한 황국신민’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일본의 황민화 교육은 일제 말기에 더욱 심해졌다. 일제는 중일전쟁을 도발하고 파쇼체제를 강화하면서 조선교육령을 개정하였다(1938년). 조선의 3대 교육강령으로 첫째 조선인의 황국신민화를 더욱 철저하게 하기 위한 ‘국체명징(國體明徵)’, 둘째 조선인의 민족성을 말살하기 위한 ‘내선일체’, 셋째 침략전쟁 아래서의 인내를 강요한 ‘인고단련(忍苦鍛鍊)’ 등이 제정되었고, 각급 학교에서는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를 암송 제창하게 하였다.
황민화 교육이 강화되는 가운데서도 조선인은 더욱 교육에 열심이었다. 이런 경향은 1930년 보통학교 입학경쟁이라는 기현상으로 나타났다. 1910년대 보통학교 취학률은 5퍼센트를 넘지 못했으나, 1920년부터 상승하기 시작하여 1933년부터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1942년에는 남자취학률이 66.1퍼센트, 여자취학률이 29.1퍼센트나 되었다. 교육이 상층의 소수 엘리트 중심에서 하층 조선인으로 확산되었기 때문이었다. 보통학교의 증설이 이 요구를 따라가지 못해 보통학교 입학경쟁이 만성적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1920년대에서 30년대를 걸쳐 일제의 식민지배가 가혹해지고 그 과정에서 많은 조선의 농민층이 몰락하였고, 또한 조선인을 전쟁으로 내몰기 위한 내선일체와 황민화 교육이 더욱 강화되던 현실과는 매우 상반된 현상이었다.
그런데 이 교육 열기는 식민지배라는 억압구조 속에서 조선인이 사회이동, 신분상승을 꾀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가 바로 교육에 있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었다. 총독부가 보통학교 졸업생을 식민체제 유지를 위한 직업인으로, 농촌진흥운동의 중견인물로 양성하려던 것과 일치될 수도 있었다. 그 중에서 ‘능력’이 있으면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여 군수나 판사 같은 고급관료로 출세하여 자신의 신분을 상승시켰다. 이들은 교육을 통해 사회의 중심인물로 성장하였지만 이 성장이 민족적 과제와 결합하지 못하면 교육은 단지 개인의 입신양명과 부귀영화만을 가져다주는 수단이 될 뿐이었다.
구호(口號) 세대의 비애
해방 이후 우리 교육은 경제발전, 민주주의 정착, 사회문화의 발전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특히 1950년대 이후 주로 미국에 유학하였던 엘리트들은 경제정책 추진의 핵심 두뇌로, 또 교육분야에서는 실용주의 교육의 ‘전도사’로 활약하였으며, 과학기술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경제발전의 원동력이 교육열에서 나왔다는 평가처럼, 교육의 광범한 확산과 교육열에 의해 양산된 여러 수준의 기능인에 의해 이른바 ‘조국 근대화’가 달성될 수 있었다. 물론 어느 경우에나 개인의 신분상승이 수반되었다는 점을 빠뜨릴 수 없다.
그러나 이 세대는 현대 한국사회의 왜곡된 발전과 더불어 본질이 왜곡된 교육을 받기도 하였다. 남북분단과 정통성이 결여된 독재체제 속에서 교육은 체제 유지를 위한 도구로 전락하였고, 반공주의와 국가주의를 내세운 구호들이 교육계를 지배하였다. 학생들은 물론 온 사회 구성원이 이 구호들을 앵무새처럼 되뇌어야 하는 비애를 겪었던 것이다.
1945년 미군정 시절 안재홍을 위원장으로 하는 교육심의회에서 홍익인간이라는 건국이념을 교육이념으로 확정하였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신교육법(1949년)에서는 여기에 이승만이 주창한 일민주의(一民主義)를 더 보태어 반공주의, 국가주의를 강조하였다. 이에 따라 학도호국단이 만들어지고 학교는 병영과 흡사한 모습으로 변해갔다.
이 시대를 풍미하던 반공주의, 북진통일론은 바로 이승만 정권을 유지하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이를 위해 ‘우리의 맹세’가 제정되었다. “첫째 우리는 대한민국의 아들 딸 주검으로써 나라를 지키자, 둘째 우리는 강철같이 단결하여 공산침략자를 쳐 부시자, 셋째 우리는 백두산 영봉에 태극기 날리고 남북통일을 완수하자”라는 것이었다. 교과서는 물론 각종의 서적 뒤에 빠짐없이 인쇄되었고, 각급 학교 학생들은 모두 이 맹세를 외어야 했다.
체제를 지키기 위한 구호는 박정희 정권 시절에 더욱 강화되었다. 5·16쿠데타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여러 조치들이 학교교육에 그대로 파급되었다. ‘우리의 맹세’를 외우던 학생들은 이제 ‘혁명공약’을 외어야 했다. 그 구호 역시 반공주의와 애국주의였다. 혁명공약의 제1조는 “반공을 국시의 제1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한다”는 것이었고, 또 제5조는 “민족적 숙원인 국토통일을 위하여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배양에 전력을 집중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군사정권은 문교정책 실천요강으로 ‘인간개조’를 강조하였고, 사회 전반에 걸친 ‘재건운동’을 전개하였다. 학생들은 모두 ‘재건’을 부르짖으며, ‘혁명공약 이루자’는 노래를 목청껏 불러댔다.
군사정권에 의한 인간개조와 사회개혁은 박정권이 내세우던 경제건설, 경제개발이라는 ‘조국 근대화’의 일환이었다. 이미 혁명공약에서 제시했던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 자주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한다”(4조)는 것을 본격적으로 실천에 옮긴 것이었다. 우리가 지금도 흔히 박정희의 공적으로 거론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경제발전과 조국 근대화에서 교육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1967년 교육은 경제발전을 위한 ‘제2의 경제’라는 말로 표현되었다. 물질적 생산에 직결되는 것이 제1경제라 한다면 정부의 정책에 대한 국민의 자발적 협조, 조국 근대화와 민족중흥에 이바지하려는 정신적 바탕의 배양이 바로 ‘제2의 경제’라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그 구체적인 교육의 지표가 필요해졌고, 1968년 12월 국민교육헌장이 탄생하였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로 시작되는 이 헌장은 민족중흥을 위한 정신적 기반, 새로운 국민이 지켜야 할 덕목, 반공정신으로 새로운 역사의 창조 다짐 등을 내용으로 하였다. 국가주의, 반공주의를 강조하고 경제개발정책의 정당성을 민족중흥이라는 차원으로 승화시켰다. 이 헌장은 학교 교과시간에 포함되었고, 그림책, 영화, 음반 등으로 제작 배포되었으며, 모든 학생들은 393자의 ‘헌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줄줄 외워야 했다.
이와 아울러 “잘살아보세, 잘살아보세, 우리도 한번 잘살아보세”,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등과 같은 노래가 언제나 학교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학교의 교육현장에서도 ‘경제건설’이 강요되었다. 모자라는 쌀을 보충하기 위해 전 사회적으로 분식과 혼식이 강조되면서 각급 학교에서는 도시락 검사를 통해 혼식을 강제로 실시하였다. 그리하여 검사 때 다른 친구의 도시락에서 보리나 잡곡을 빌려 자기 도시락에 ‘모심기’하는 우스꽝스러운 일까지 일어날 정도였다.
1970년대 이후 정신적인 면을 가르치는 모든 과목은 국정교과서를 통해 교육되었다. 이 시기에는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유신체제의 이념과 관련하여 이른바 ‘민족주체성’을 높이기 위해 국사 과목이 강조되었다. 1980년대에는 정통성을 상실한 군사정권에 의해 ‘정의사회구현’이라는 변형된 이데올로기와 함께 국민윤리교육이 강화되었다. 이런 국민정신교육을 위한 이데올로기 연구기관으로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같은 기관이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고등학교 이상에서 교련교육이 실시되고, 학도호국단이 부활되어 학원의 병영화도 가속화되었다.
무즙 파동, 뺑뺑이 세대 그리고 망국 과외
경제발전과 조국 근대화가 고학력 인력의 존재로 가능하였던 것처럼, 이제는 ‘배우지 않으면 망한다’는 약간은 비극적인 입시지옥 현상이 초래되었다. 교육은 인류가 배워온 지식을 체계적으로 전수하고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건전한 민주시민을 양성하는 것이라는 대의명분은 허망하게 되어버렸다. 이른바 조국근대화의 과정에서 교육은 곧 출세를 위한 수단이 되어버렸고, 따라서 고등교육, 일류학교를 지향하는 과열 입시경쟁과 과열 과외를 낳게 되었다.
과열 입시경쟁의 한 단면은 이른바 ‘무즙 파동’이라는 것을 통해 엿볼 수 있다. 1964년 12월 7일 전기 중학입시의 공동출제 선다형(選多型) 문제 가운데 “엿기름 대신 넣어서 엿을 만들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있었다. 당시 정답으로 채점된 것은 디아스타제였지만 보기 중 하나였던 무즙도 답이 된다는 것이 이 사건의 발단이었다. 급기야 무즙을 답으로 써서 낙방한 학생의 학부모들은 이 문제를 법원에 제소하였고, 무즙으로 만든 엿을 먹어보라고 하면서 솥째 들고 나와 시위를 벌이는 일까지 일어났다. 결국 이 파동은 6개월이 지나 무즙을 답으로 써서 떨어진 학생 38명을 정원에 관계없이 경기중학 등에 입학시켜 일단락되었다. 또 1967년 중학입시에서도 미술과목의 ‘창칼 파동’이 있었다. 경기중학에서 시교위가 정한 정답이 애매하다고 판단하여 복수정답으로 채점하여 일어난 것이었다. 이 사건도 결국 대법원까지 갔다.
이런 중학입시의 과열은 1969년 입시부터 추진된 이른바 평준화 정책으로 소멸되었다. 서울지역을 시작으로 중학교 입시제도를 폐지하고 추첨을 통하여 학교를 배정하였다. 세칭 일류 중학은 폐지되거나, 학교 이름이 바뀌는 운명을 맞았다. 학생은 은행알(구슬)을 넣은 수동식 추첨기를 ‘뺑뺑’ 돌려 학교를 배정받았다. 중학 무시험으로 진학생이 늘어났고, 이것은 필연적으로 고등학교의 과열 입시경쟁으로 이어졌다. 결국 평준화 정책은 고등학교에도 적용되었다. 따라서 지금도 시험을 치고 진학했던 세대들은 그 아래의 무시험 세대를 자신들과 구별하여 흔히 ‘뺑뺑이 세대’라고 부르고 있다.
입시경쟁과 과외 열풍은 1960~70년대에도 있었지만, 그때 학창시절을 보냈던 세대들은 그래도 학창생활의 낭만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경제발전의 과실들이 점차 나타나던 시기에 태어났던 세대들(X세대, 신세대)은 그야말로 생존경쟁에 살아남기 위해 과외를 강요당하였다. 현재 천문학적인 사교육비는 ‘망국 과외’라고 부르기에 전혀 틀린 말이 아니다. 자식의 과외비를 마련하기 위해 파출부 일을 하는 어머니, 성적을 비관하여 자살하는 학생들, 무분별한 조기 유학 붐 등은 모두 이런 구조에서 파생된 문제들이다. 최근 대학 입시에서 내신성적 문제로 야기된 특수목적고(과학고등학교, 외국어고등학교) 학생의 자퇴 소동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망국 과외, 과열 입시를 없애기 위한 정부의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앞서 본 중 · 고등학교의 무시험 입학도 그 일환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입시경쟁을 잠시 몇 년 뒤의 대학입시로 미룬 것에 불과하였다. 1980년대 들어서 망국적인 과외를 시정한다는 명목으로 획기적인 조치들이 취해졌다. 비상계엄하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는 군부 통치라는 강력한 정치권력을 배경으로 7·30 교육개혁조치를 단행하였다. 본고사를 없애고 대입학력고사와 내신제로 학생을 선발하고, 대학별로 치르던 학생 수는 졸업정원을 정하여 이보다 30퍼센트 더 선발하도록 하였으며, 또 사회의 병폐로 되어가던 과외를 전면적으로 금지하였다. 그런데 이 조치는 오히려 더 많은 부작용을 낳았다.
즉 과외가 학교의 보충수업으로, 교육방송으로 자리를 옮겼고, 또 금지된 과외를 비밀리에 하기 위해서는 ‘족집게 선생’에게 엄청난 위험수당까지 지불해야 했다. 과외금지 조치는 결국 그 실효성이 문제가 되어 점차 완화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졸업정원제의 실시는 본래의 취지를 살리지 못하고 대학 정원을 30퍼센트 늘리는 결과만 가져왔다. 1996년에 이루어진 ‘5·30’ 교육개혁도 학교교육을 정상화하고 과외의 폐단을 줄이기 위한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고교 종합생활기록부의 채택과 대학 입시에서 내신제의 비중 강화, 그리고 위성 과외방송 등이 그런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앞으로 어떠한 새로운 문제를 낳을지 모를 일이다.
이러한 과열 과외는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물든 ‘적자생존’의 경쟁논리와 일류병에 물든 개인주의 사상이 결합하여 더욱 성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런 사회적 병리현상은 우리의 근대화 과정에서 구조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 귀결이기도 하였다. 한말에는 사회진화론에 의거하여 강자가 되기를 염원하였고, 일제의 식민 지배조차도 ‘강자의 약자 지배는 부득이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1960년대 이후의 조국 근대화와 경제발전 사상도 애국주의, 민족우월주의에 근거한 왜곡된 국수주의, 개인의 인격 발달보다는 국가와 민족의 발전을 우선시하는 국가주의적 병폐와 결합되어 있었다. 학교에서조차 ‘선의’라는 말로 색칠한 ‘무한 경쟁’을 강조하여, 참다운 인격체를 양성해야 할 교육의 근본 목표를 근저에서 흔들어버렸다. 따라서 입시경쟁, 망국 과외는 근대화 이후 우리 사회의 병폐를 구조적으로 해결하지 않으면 풀리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엄청난 사교육비를 들여 양성된 고급 인력에 ‘무임승차’하여 공룡처럼 비대해진 재벌과 기업이 이제는 공교육의 정상화를 위해 경제적으로 이를 부담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도 희망은 교육에 있다
한말 이래 근대화 과정에서 우리 교육은 긍정적인 면으로도, 또 부정적인 면으로도 작용하였다. 교육은 서양의 근대문명을 수용하는 통로이자 근대 민족운동의 온상이 되었고, 또한 근대화와 경제발전의 역군을 길러내기도 하였다. 반면에 교육은 개인적인 신분상승의 기회를 제공하여 그 열기가 과도하게 표출되기도 하였고, 국가의 공적 교육 장악으로 인한 체제 유지 수단으로 전락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우리 민족의 과제인 민주화와 통일을 지향하는 올바른 논의들 또한 교육을 통해서 형성되었다. 일제시대의 민족교육은 물론이거니와, 해방 이후 이승만 정권에 대항한 4월 혁명이 학생들에 의해 선도되었고, 또 박정희 정권 당시에도 줄곧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운동이 계속되었다. 일선에서 교육을 담당하는 교수들의 민주화 선언이나 교사들에 의한 참교육운동도 일어났다. 민족을 본위로 하는 참다운 교육에서 우리 민족의 희망을 찾을 수밖에 없다. 입시경쟁에 찌든 우리의 아이들을 참 인격체로 키워가는 일, 국가 간의 무한경쟁을 뛰어넘어 인류의 진보에 기여하는 민족이 되는 길, 이 모든 것이 바로 교육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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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한 세기는 우리에게 과거 수백년에 맞먹는 변화가 일 어난 격동의 세기였다. 식민지와 전쟁을 경험했으며 이데올로기의 극 한 대립과 과학기술의 놀라운 발전이 한데 뒤..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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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배워야 산다 – 우리는 지난 100년동안 어떻게 살았을까 1, 한국역사연구회, 역사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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