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출처 우리는 지난
100년동
안 어...

태껸과 태권 사이에는

사라진 것 살아남은 것

전통무예의 스포츠화

우리는 전통무예라고 하면 으레 합리적 사고로 접근할 수 없는 도술의 효력이나 그 신비함을 연상한다. 비전되어왔다든가 종교적 주술적 신비성을 부여하든가 혹은 황당한 묘술과 파괴력을 기대하곤 한다.

그러나 이러한 형태의 무술이 실존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일상생활과 유리되어 있거나 전문적인 학습과정과 훈련을 통해서 습득하기가 어려운 것이라면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대중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고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전통문화로서의 보편적 가치를 상실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 일반적으로 인식되고 있는 무술의 개념은 거의 일제시기에 유포된 일본식 무도개념이다. 우리는 전통적으로 무술과는 구별되는 무희라는 개념을 사용해왔으며, 그것은 겨루는 놀이 또는 전투적 놀이의 의미로 해석되는 현대 스포츠의 개념에 오히려 가깝다 할 수 있다.

최근 국제 스포츠계를 보면 서양의 격투기에 뒤이어 유도, 태권도 등이 올림픽 종목으로 위상을 굳히고 있고 최근에는 동양무예의 진수로 자처하던 우슈, 가라데 등이 속속 국제 스포츠가 되고 있다. 경기화를 무술의 가치개념으로부터 이탈하는 것으로 여겨오던 동양의 무술들이 경쟁적으로 스포츠화를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른 당연한 결과이겠지만 전통무예가 갖고 있던 본래의 기능과 성격이 많이 변질되었다. 더구나 현재까지 전래된 우리의 무술은 대체로 원래의 맥에서 많은 것을 잃고 제 본래의 모습을 지키지 못한 상태에서, 다른 나라의 무술(주로 일제시기 유도, 검도, 공수 등)을 도입하고 토착화하는 과정을 거쳤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단재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 의하면 우리의 전통무예로 수박, 격검, 사예, 기마, 덕견이 등을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이러한 전통무예는 그 상당수가 맥을 잇지 못하고 단절되었으며, 일부는 외래문화와 혼동되어 그 실체가 왜곡되기도 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최근 몇몇 전문가들의 노력에 의하여 태껸과 수박이 그 원래의 모습에 가깝게 복원되어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 이로써 우리의 기억 속에만 남아 있던 전통의 많은 부분이 다시금 되살아나 발전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또 현재의 태권도가 전통무예인 태껸의 기술을 접목시키려는 의식적인 노력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과거 일본에서 유입된 공수(가라데)보다는 태껸의 기술에 가깝게 손짓보다는 발짓에 더 비중을 두고 있으며, 정형화된 틀을 벗어나 실제 경기를 위한 기술을 개발하고 있는 것도 우리 민족의 집단적 몸짓 속에 내장되어 있는 특성을 반영하는 자연스런 현상인 것이다.

이 글에서는 전통무술 가운데 비교적 원형이 잘 복원되어 무형문화재로 보존되고 있는 태껸과 그 후신으로 발전해온 태권도의 관계를 통해 우리 전통무예가 거쳐온 수난과 변질양상을 살펴보기로 한다.

태껸의 전래

태껸은 일반대중 속에서 자생하여 전래된 민중무술이다. 태껸은 오랜 세월 동안 우리 기층문화의 한 갈래로 전래된 발차기 중심의 겨루기 기술로서 전문적인 무술의 형태와 일반 민속놀이의 형태로 성행하여왔던 것으로 보인다. 문화재 태껸보고서에 의하면, 태껸은 싸움질할 때 쓰는 격렬한 무예와 민속놀이로서 마을끼리 편을 짜서 대항하는 ‘결연태껸’(‘쌈수’라고도 함)으로 대별된다.

각희 또는 비각술이라고도 하는 태껸은 전문기관이나 특정집단에 의해 제도적으로 전수되지 않은 까닭에 정형화된 이념이나 사상의 체계로 전승되지 않았다. 하지만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선인들의 지식과 체험이 용해되고 일상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라는 역사성을 내포하고 있다.

경기의 진행은 명문화된 규칙이 따로 없고 관습에 의해 이루어지며, 두 사람이 마주서서 여러 가지 발기술을 종합적으로 사용하여 상대를 넘어뜨려 승부를 낸다. 두 발을 공중에 띄워서 발질할 수 있으며, 품(品)자 모양의 세 지점에 한하여 발을 옮겨놓아야 하는 등의 특징이 있다.

이와 같은 발기술 위주의 무예는 우리 전통문화 속에 발을 보편적으로 자주 쓰는 관습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생각된다. 흔히 우리는 어린 시절 서로 편을 갈라 발로 차며 싸우는 ‘까기’놀이를 즐겼다. 또한 닭싸움, 깽깽이, 제기차기, 씨름 등의 놀이문화라든가 책상다리와 같은 좌식 생활도 발 쓰는 기술과 그리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생활양식으로 인해 우리 민족은 인체구조상 어깨힘보다는 허리힘이 발달해 민속놀이나 무예의 기술도 자연스럽게 허리힘을 위주로 한 발차기가 중심을 이루었다.

조선시대 씨름과 태껸

유숙(1827~73)이 그린 대쾌도(大快圖)이다. 구경꾼들이 쭉 둘러선 가운데 아래쪽에서는 태껸을 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태껸이 민중의 오락이었음을 알 수 있다.

ⓒ 역사비평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이 전통적으로 전래되던 태껸은 구한말과 일제시기를 거치면서 쇠퇴기에 접어든다. 물론 그것은 자연적인 문화 도태가 아니라 인위적인 것이었다. 먼저 태껸을 언급하고 있는 사서로서 가장 공신력 있는 문헌으로 꼽히는 구한말의 『해동죽지』에 의하면, “예로부터 내려오는 풍속에 다릿짓(태껸)이 있었는데, 서로 마주 대하고 서서 발길질로 차서 넘어뜨리는 기술이었다. (중략) 이 기술로써 원수를 갚기도 하고 혹은 사랑하는 여자를 빼앗는 내기를 하기도 하였으므로, 관에서 이 다릿짓을 금한 이래 지금은 이 유희가 없어졌다”라는 것이다.

이로 인해 이미 무예로서의 태껸이 구한말에 이르면 후대의 구전을 통해 알려진 임호, 한일동 같은 몇몇 고수를 제외하고는 그 맥이 거의 단절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태껸은 동시대의 사회정서가 반영되고 소박한 민중의 시대적 심리현상에 따라 다소의 변모를 거듭하였을 것이다.

일제시기에 들어와 민족무예로서의 태껸은 두 가지 측면에서 단절되는 비운을 겪었다. 첫째는 일제의 식민교육체제를 통해 소개된 군국주의 무도인 유도와 검도, 공수가 소개되고, 일본 무도교육을 통해 새로운 규범과 개념을 접하자, 뚜렷한 무술 무도가 없었던 당시로서는 그것들을 비판 없이 수용하게 되었다. 규격화된 규칙이나 도라고 하는 정신주의가 없었던 태껸은 점차 일반인의 관심에서 멀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둘째는 태껸이 민속경기의 성격을 가지면서 한편으로는 동족의식을 배경으로 하는 민족적 스포츠로서 발전하게 될 가능성이 보이자, 일제는 직 · 간접적으로 이를 탄압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의식있는 몇몇 태껸 전수자들만이 어렵사리 그 맥을 유지 전승할 수 있었다.

구한말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태껸은 임호, 한일동, 송덕기, 김홍식, 이경천 등에 의해 유지되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오늘날 그 맥은 대부분 단절되고 임호에게 사사한 송덕기(1893~1987)가 신한승(1928~87)에게 전승함으로써 간신히 소멸의 위기를 막을 수 있었다. 또 문화재 지정을 전제로 한 체계화 작업 역시 신한승의 개인적 노력에 의해 이루어졌다. 따라서 현재 태껸이라는 말이 우리에게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은 최근에 들어와서였다.

태껸을 하는 어린이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전 어린이들이 태껸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1930년대에 서울 주변에는 윗대패와 아랫대패라는 태껸을 행하는 청년들이 있었으며, 태껸의 기술은 이들에 의해 명맥이 이어졌다.

ⓒ 역사비평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전통문화를 복원 계승하기 위한 헌신적인 노력에 의해 태껸은 1983년 6월 1일 중요 무형문화재 제76호로 지정되었고 민족무예의 복원을 위한 제도적인 기반이 마련되었다. 정부의 이 조치는 태권도의 성행이라는 사회적 현상과 동시에 태껸이 우리 민족 고유의 문화적 소산이며 역사상 예술상 가치가 크다는 것을 인정한 것으로서 태껸 부활의 큰 전기를 마련해주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태껸은 당시 주변 환경의 열악함과 개인의 자의적 해석의 개입으로 말미암아 불가피하게 변형되었다.

전통기술의 복원 노력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하겠지만, 현재 태껸 전승에는 기능 보유자였던 송덕기와 신한승의 타계 이후, 태껸을 경기구조로 파악하여 송덕기의 기법을 재정리하는 방향과 무술인 경향이 강한 신한승의 체계가 문화재 지정 당시 원형으로 채택된 만큼 이를 계승 발전시켜야 한다는 방향 등 두 갈래로 나누어져 있다.

경기구조 태껸과 무술구조의 태껸이 상호 보완 발전해야 하겠지만, 태껸은 역사의식과 민족의식을 기초로 하고 있는 민족무예이므로 우리 민족이 공동 체험하여 형성한 공동체의 공리로서 이해해야 하며, 그런 측면에서 태껸의 원형 복원도 이루어져야 한다.

태껸에서 ‘는질거린다’는 기법은 연하고 부드럽다는 뜻으로 외부의 자극이나 상황변화에 즉각 대응할 수 있는 기술이다. 상대방 기의 변화에 순발력 있게 대응할 수 있는 심리적, 신체적, 기술적 완숙을 의미하며, 춤추는 듯 부드러운 몸짓과 율동적 동작은 우아한 곡선으로 이루어진 동선의 매력을 느끼게 한다.

이러한 전통무술은 씨름에 비해 수적인 면이나 지리분포면에서 보편성이 적기 때문에 일본 유도, 검도, 그리고 당수의 유입과 보급이라는 외압을 극복하지 못하고 거의 단절되는 비운을 겪었지만 이후 태권 형성의 방향과 성격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일본 공수의 유입과 근대 태권

현재 태권도학계에서는 태권도를 ‘근대태권’과 ‘경기태권’으로 구분하고 있다. 근대태권은 일본으로부터 유입된 당수를 계승함으로써 형성된 태권도이고, 경기태권은 1963년 이후 통일된 규칙하에 전국화되면서 근대태권과는 구별되는 독자적인 성격을 나타낸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

지금까지 한국 태권도는 명칭과 기술의 변경을 통한 고유성 회복, 경기를 통한 스포츠화, 그리고 해외보급을 통한 세계화 등 많은 변화를 겪어왔다. 태권도의 발전과정을 살펴보면 대략 3시기로 구분이 가능하다.

제1시기는 일제시기 주로 일본 유학생들이 당수를 수련하여 태권도 1세대를 이룬 시기(태껸의 단절)이다. 제2시기는 해방 이후부터 1950년대까지 이른바 ‘근대태권’이 형성되는 시기(일본공수에 전통태껸을 접맥)이다. 제3시기는 196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경기태권’의 기술체계가 성숙되는 시기(태껸의 복원과 태권도의 독창적인 발전)이다.

일제시기 일본 유학생들 가운데 많은 수가 당시 일본에 일반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유도, 검도, 공수 등에 관심을 갖고 수련을 시작하였다. 이들 중 도일 이전에 이미 전통무술을 수련한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전통무술과 단절된 상황에서 새로이 일본무술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일부는 이 사실을 은폐하거나 미화하기 위해 당수 유입사실을 무시 또는 부정하거나 그 명칭과 기술을 부분적으로 변경하여 전통무술임을 주장하지만, 엄밀히 말해 이 시기 일본에서 공수를 수련한 사람들은 태권의 범주에 포괄하기 어렵다.

그러나 문제는 이들이 귀국하여 공수를 국내에 보급할 무렵 저급한 수준에서나마 태껸과의 결합, 즉 공수의 한국화를 시도한 점이다. 해방직후 이들은 서울을 중심으로 자신들이 수련한 일본 공수를 국내 학교나 군에 보급하기 시작하였으며, 자신들이 전수하고 있는 공수가 전통 태껸과 전혀 무관하지 않음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일제로부터 해방된 직후 사회 전반에 걸쳐 민족주의적인 정서, 특히 일본을 혐오하는 배일사상이 폭넓게 확산되어가고 있었던 점을 감안한다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해방 직후에 이원국(영신학교), 전상섭(조선연무관), 윤병인(YMCA), 황기(교통국 당수부) 등이 각 기관에서 공수를 전수하였으며, 노병식(개성 송무관), 이원국(청도관), 황기(무덕관) 등이 도장을 개설하였고, 최홍희, 하대영, 김기환, 이동주, 조영주, 김인화 등이 학교와 군을 비롯한 각 사회조직을 중심으로 공수의 보급에 전력하였다.

이렇게 폭넓게 공수가 보급되자 1947년 말에 이르러 다양한 계파들이 5개 분파(청도관, 무덕관, 연무관, 권법도장, 송덕관)로 정리되었으며 그 명칭도 공수, 당수, 권법, 수박, 태수 등 다양하게 불리던 것이 당수(공수), 권법으로 호칭되었다.

이 시기 공수와 태껸의 관계에 대해 당시 공수 보급에 열성적으로 활동했던 황기는 “태껸은 체계가 없는 하나의 공방법에 불과한 술법이지 정신적인 면이 없다. 그러나 기술적인 면에 있어서는 특히 족기(발기술)에 있어서 큰 교훈을 받았으며 그 모체가 된 것은 틀림없다”고 하여 근대태권의 형성에 태껸의 영향을 언급하고 있다.

또 근대태권의 산파역을 맡았던 최홍희는 “발에만 치중하던 태껸이 일제시기에 중국의 권법 또는 일본의 당수의 수기를 가미하여 기술적으로 발전”하였으며, “그후 발만 쓰던 태껸과 주로 손기술에만 의존하던 가라데를 통합하여 오늘날 태권도가 발전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실제 근대태권에는 태껸의 기술이나 용어가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당수와 유사한 점이 많다. 공수는 전통무술 단절 속에 새로운 무술의 이식이라는 의의는 있지만 이를 전통무술로 둔갑시킨 것은 아전인수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왜곡은 역설적으로 전통무술의 몰이해와 부활의 어려움을 야기하기도 하였다. 일본 공수의 유입으로 근대태권이 형성되기 시작할 때 전통태껸의 발전과 그것의 실제적인 접합이 필수적인 과제였으나 공수라는 기존의 틀을 고수함으로써 고유성 확보에는 실패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들은 태껸이라는 명분만을 원용했을 뿐이다.

이러한 상황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크게 변화하였다. 특히 전쟁 이후 1세대로부터 배운 수련생들이 지도자로 등장하면서 1950~60년대의 태권도를 본격적으로 주도하게 되었다. 이들은 겨루기 중심의 소위 ‘경기태권’을 창안 발전시켜 기존 체계와 차별화를 시도하였다. 이러한 분위기는 전쟁으로 인해 공수의 보급이 중단됨과 아울러 태권 수련생의 규모와 지역분포가 전국적으로 다양해진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놀라운 얘기이지만, ‘태권’이란 용어가 사상 최초로 등장한 것도 1955년이었다. 물론 그때까지 ‘공수, 당수(가라데)’ 등으로 호칭되던 근대태권이 전통태껸과의 접합을 위한 노력을 전혀 기울이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태껸이 아닌 당수(가라데)란 명칭을 사용하고 있었다고 하는 사실만으로도 전통성 또는 고유성에 심각한 결함을 안고 있었던 것이다.

공수와 태껸의 관계에 관해서는 재미있는 일화가 하나 있다. 근대태권의 산파역을 수행한 최홍희는 1952년 한국전쟁의 전화 속에 제1군단장 참모장으로서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지켜보는 앞에서 자신의 공수도 시범을 보였다. 시범의 마무리에 맨손으로 13개의 기왓장을 일격에 완파해버리는 것에 너무나 감명을 받은 이승만 대통령은 모든 국군이 이 무술을 익히면 좋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자리를 뜨면서 최홍희에게 그 무술은 “태껸이로구먼”이란 한마디를 남겼다고 한다.

우연이 아닌 듯 이승만의 태껸이라는 총평을 들은 후로부터 3년 뒤, 최홍희는 이두식 표기인 ‘태껸’의 한자음에 맞는 조어인 ‘태권’이란 두 글자를 창안하고, 1955년 4월 11일 명칭제정위원회를 통하여 공식적으로 통용하도록 장려하였다.

세계화되는 태권

한국의 태권도는 1960년대부터 미약하나마 중앙 조직체가 구성되고, 태권도의 한국화가 추구되었다. 1970년대에는 동일한 구성원과 운영목표를 통하여 경기화, 세계화를 이룩하게 된다. 근대태권을 배운 3세대가 초기의 경기에 참가함으로써 당수의 기술체계인 형(품세)과 독습방식의 기술에서 벗어나 경기태권을 독자적인 형태로 발전시켜나갔다.

1960년대 태권도는 양적으로 급속히 확산되면서, 유파 간 또는 유학파와 국내파 간의 갈등, 태권의 경기화에 따른 의견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공수, 당수 등으로 불리던 명칭을 ‘태권도’로 제도화함과 아울러 전통성 회복에 중요한 전기를 마련하였다.

이 시기 태권도는 해외진출을 본격화하고, 또 경기화를 위해 1962년부터 시범경기를 거쳐 1964년 전국체전 종목으로 정식 채택되어 경기화 또는 스포츠화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태권도라는 말 자체가 일반에게 보편화된 것도 1960년대 말 월남파병시 전 장병에게 이것을 의무적으로 교육하고 태권도 시범단이 활약하면서부터였다.

태권도는 1960년대의 양적 확산과 경기화에 이어 1970년대에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이 시기 태권도는 일반 국민들에게 우리 민족의 고유한 운동체계로 널리 사랑받기 시작하였다. 그 과정에서 태권도는 체육 교과과정에 편입되었다. 중앙도장과 세계태권도연맹이 건립되고 체육경기 단체로 되는 등 세계 스포츠화를 위한 기반을 마련하였다.

태권도의 세계화

1973년 서울에서는 제1회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가 개최되는 동시에 세계태권도연맹이 창설되었다. 이때 우리나라는 단체전 · 개인전 모두 석권하여 종합우승을 차지하였다.

ⓒ 역사비평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세계에 널리 보급될 수 있었던 가장 큰 계기가 되었던 것은 일본 공수를 물리치고 1975년 국제경기연맹에 가입한 것이었다. 세계태권도에 제시된 태권도의 본질은 역사적으로 태껸에, 기술적으로 차기에, 양식상으로 경기에 그 중심이 있다는 것이었다.

현대의 태권도는 공정하고 안전한 경기운영, 흥미제고 등 스포츠와 무술의 요소를 조화시키고 발기술 위주의 타격방식을 통해 형을 중시하는 일본 가라데의 옛 틀을 완전히 탈피하고 독자적인 장르를 창안하였다. 이는 실로 발쓰기 위주, 완전타격방식, 겨루기 위주의 특징을 갖고 있는 전통기술의 재발견과정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전통성 회복과 독자성 확보는 경기화와 세계화 속에서 자연스럽게 본격화되었다. 물론 이 과정에서 독자적 전통무술의 계승을 위한 연구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탈가라데의 변화 속에서 발기술로의 전환은 태껸과의 연계성을 확보하는 중요한 고리가 되었다. 이는 우리의 몸짓 속에 내장되어 있는 구조적 특성을 발견해 나가는 자연스런 경향이며, 태껸에 바탕을 둔 독창적인 품세의 개발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태권도는 외적인 발전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이론 연구가 정체되어 있고, 자생적인 변화의 내용을 직시하지 못함으로서 몇 가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현재 태권도계 내에서는 날조된 고유성을 고수하려는 입장과 전통성 문제에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경기기술의 발전을 추구하는 입장 등 이분적인 논리가 상존하고 있다. 전자의 입장은 여전히 형에 집착하고 있으며, 후자는 발기술 위주의 전통기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이분적인 현실은 정규 교과과정과 대부분 도장의 수련과정이 품세 위주로 편성되어 있다는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이들은 ‘품세와 겨루기의 변증법적 발전’이란 의미에서 상호 보완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전통에 바탕을 둔 국기 태권이란 의미에서도 뿌리에 해당하는 태껸을 태권도계의 밖에 방치하고 있는 현실 역시 바람직스럽지 못한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들을 극복하고 명실상부하게 민족무예에 기반을 둔 태권도의 발을 지향하기 위해서는 순수한 전통 복구의 의식적인 노력과 아울러 전통에 기반을 둔 창의적인 품세의 개발을 병행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본 콘텐츠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위 내용에 대한 저작권 및 법적 책임은 자료제공처 또는 저자에게 있으며, Kakao의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한국역사연구회 집필자 소개

1988년에 만들어진 한국사 학계의 전문 연구자 단체이다. 550여 명의 대학 교원, 대학원생이 연구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난 역사를 연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올바른 역사 교육과 역사 대중화..펼쳐보기

양영조 집필자 소개

국방군사연구소 주임연구원

출처

우리는 지난 100년동안 어떻게 살았을까 1
우리는 지난 100년동안 어떻게 살았을까 1 | 저자한국역사연구회 | cp명역사비평사 도서 소개

지난 한 세기는 우리에게 과거 수백년에 맞먹는 변화가 일 어난 격동의 세기였다. 식민지와 전쟁을 경험했으며 이데올로기의 극 한 대립과 과학기술의 놀라운 발전이 한데 뒤..펼쳐보기

전체목차
TOP으로 이동


[Daum백과] 태껸과 태권 사이에는우리는 지난 100년동안 어떻게 살았을까 1, 한국역사연구회, 역사비평사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