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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와 질병
1921년 4월 서울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실린 광고지들이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파리를 잡아오세요. 파리 열 마리를 잡아오면 3전(錢)을 드립니다.” 전염병을 옮기는 ‘마귀’이자, 사람들에게 가장 미움을 받는 ‘악마’인 파리를 잡아오라는 경성부(京城府)의 선전 광고지였다. 파리는 장티푸스 · 콜레라 · 이질 등을 전파시키는 매개체일 뿐 아니라, 당시 조선농민의 90퍼센트가 환자였던 기생충병의 주범이었다. 이에 따라 질병 예방을 위해 골머리를 앓던 경성부 당국이 해결책의 하나로 파리구입 광고를 시작한 것이었다.
질병은 인류의 탄생과 함께 존재했고, 현재까지 함께 하고 있다. 고대 이집트의 미라에는 동맥경화 · 폐렴 · 요도염 · 결석 · 기생충 등이 확인되고 있으며, 신석기인의 두개골에 구멍이 뚫려 있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외과적 치료가 시도되고 있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원시인들은 질병의 원인이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 할 수 없는 하늘의 노여움이나 병귀들의 소행 때문이라고 생각했기에 특별한 치료법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스스로 터득한 자연치유법이 있었지만, 주로 하늘과 통할 수 있는 무당의 힘을 빌리거나, 귀신이 스스로 물러가기를 기도할 뿐이었다.
『삼국지』 「위지동이전」에 실린 “예(濊)나라 사람들은 꺼리는 것이 많아 사람이 질병으로 사망하면 곧 그 사람이 살던 집을 버리고 새 집을 짓는다” 라는 기사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나라에서도 오래 전부터 질병에 대한 나름의 대처를 하고 있었다. 『삼국사기』에는 역(疫)이라는 이름으로 전염병 유행을 기록하고 있다. 전염병은 다수의 인명을 앗아가는 국가의 중대사였으므로 기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전염병에 어떻게 대처했다는 기록이 나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무당을 통해 하늘에 제사를 지내거나, 처용가에서 기원했다는 부적을 붙이는 일 외에는 다른 치료방법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염병이 특정 세균에 의해 발생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시기는 19세기에 접어들면서부터였다. 파스퇴르 · 코흐 등 세균학자들이 전염병을 일으키는 세균을 발견하였고, 그 결과 예방 주사가 이루어지는 등 전염병에 대한 대처가 가능해졌다.
콜레라와 선교사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우리나라에 퍼졌던 대표적인 전염병은 콜레라였다. 콜레라는 1821년 최초로 발병한 이후 거의 3~4년 터울로 조선을 찾아왔으며, 한꺼번에 전체 인구의 5퍼센트 이상이 사망할 정도로 큰 피해를 입히기도 하였다. 이 전염병은 주로 중국을 통해 들어왔으며, 우리나라에 최초로 발병했을 때에도 “콜레라란 남만(南蠻)의 백련교도들이 천하를 돌아다니면서 우물에 독을 뿌리고 채소밭에 약을 뿌려 생긴다”라고 보고되었다. 백련교도를 언급한 것은 아직 콜레라의 병인(病因)이 과학적으로 밝혀지지 않은 것을 이용하여 반체제 집단에게 전염병 발생의 죄를 덧씌우기 위해서였다.
개항 이후에도 콜레라는 계속 발생했는데, 가장 큰 피해를 입힌 해는 1895년이었다. 청일전쟁 중에 만주에서 발생한 콜레라가 한반도에 전해졌던 것이다. 콜레라가 크게 유행하자 조선정부는 서양 의료선교사들과 일본인 의사들로 방역대책위원회를 꾸렸다. 방역대책위원회는 본격적인 치료에 앞서 우선 조선사람들을 계몽해야 했다.
당시 사람들은 쥐귀신이 사람의 몸 안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콜레라가 발생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 결과, 쥐의 천적인 고양이 그림을 집 앞에 붙여놓고는 쥐귀신이 고양이 그림을 보고 무서워 도망가기를 바라고 있었다. 방역대책위원회는 콜레라가 귀신에 의해 발생되지 않는다고 설득해야 했다. 귀신이 병을 일으킨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익힌 치료법을 시행한다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1895년에 공포된 콜레라 방역규칙은 다음과 같이 시작하고 있다. “콜레라는 악귀에 의해 발생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세균이라 불리는 아주 작은 생물에 의해서 발병됩니다. 만약 당신이 콜레라를 원치 않는다면 균을 받아들이지 않아야 합니다. 따라서 식사 전에 반드시 손과 입안을 깨끗이 씻으십시오. 그리고 음식을 반드시 끓여 먹으십시오.”
방역대책위원회는 7월과 8월에 걸쳐 환자 치료와 위생 계몽사업으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 특히 서양 선교사들의 활동은 조선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그들은 ‘비참하고 더러운 환자’를 처음부터 끝까지 돌보았으며, 병원에서 치료하는 일 외에도 ‘더럽고 불쾌한 도시’에 나가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 약품을 나누어주었던 것이다. 조선사람들은 궁금했다. 왜 이들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우리들을 돌보는 것일까. 선교사들은 간단히 대답했다.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라고. 이로 인해 조선사람들은 사교(邪敎)로 배척해왔던 기독교와 금수(禽獸)인 줄 알았던 서양 선교사들에 대해 기존의 인식을 서서히 고치기 시작했다.
개항 이후 서양인들이 조선에 쉽게 정착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의료선교사들이 자신들이 습득한 근대의학의 기술로 조선인들을 치료한 데 있었다. 선교사의 신분을 감추고 공사관 의사로 조선에 도착한 알렌(H. N. Allen)은 1884년 개화당의 정변 때 칼에 맞아 중태에 빠진 민씨 정권의 핵심 관료 민영익을 치료하여 환심을 산 후 그의 지원 아래 현 세브란스 병원의 전신인 광혜원(이후 제중원으로 개칭)을 설치할 수 있었다. 제중원은 이후 단순히 서양의술을 시행하는 장소로서뿐 아니라 선교사들의 활동 근거지로 기능함으로써, 선교사들의 조선 정착과 기독교 전파에 큰 역할을 하였다. 또한 선교를 위해 지방을 방문하는 선교사들은 항상 의료품을 함께 가지고 갔다. 그들은 조선인에게 전도를 하는 한편, 병자들을 치료해 주었다. 그 결과, 자신들의 표현대로 “의사와 목사의 공동작업은 성과가 꽤 좋았다.”
근대의학의 수용과 반발
근대의학의 도입은 비록 외국인에 의해 이루어졌지만, 조선인들은 점차 스스로의 힘으로 근대의학을 습득하려는 노력을 시작했다. 제중원에서는 1886년부터 조선인 학생들을 입학시켜 의술과 물리 · 화학 등을 교육했으며, 1899년 관립으로 설립된 의학교에서도 해부 · 생리 · 화학 등 근대적 의학 내용을 가르쳤다. 처음에는 교사로 외국인들이 활동했으나, 점차 미국 · 일본에서 근대의학을 습득하고 돌아온 조선인 교사들이 의학교육의 주체로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근대의학의 도입이 순조로웠던 것만은 아니었다. 그 이유는 근대의학이 우리 전통의학의 자체적인 발전 결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유입되었다는 데 있었다. 특히 개항 이후 정치경제적으로 조선을 잠식하고 있었던 일본 등이 새로운 의학의 수입 경로였다는 점에서 반외세의 논리를 지닌 조선인들에게 근대의학은 반감을 일으키는 대상이었다.
그 반감은 근대의학의 가장 큰 성과 중 하나인 우두법이 도입되는 데서부터 나타났다. 우두법은 조선 후기 실학자들에 의해 소개되고 있었는데, 본격적인 도입은 개항 이후 지석영에 의해 이루어졌다. 중국에서 수입된 우두법 관련 서적을 읽으며 우두법에 관심을 가지게 된 그는 수신사를 통해 전해진 『종두귀감(種痘龜鑑)』을 읽은 후, 1879년에는 부산에 있던 일본인 병원 제생의원(濟生醫院)을 찾아가 종두법을 배웠다. 그후 두묘(痘苗)의 제조방법을 알기 위해 직접 일본에 건너가 일본 내무성 우두종계소장으로부터 채장법(採漿法), 독우사육법(犢牛飼育法)을 배우기도 했다.
지석영의 계속된 노력으로 전국 각지에 우두국(牛痘局)이 설치되었고, 우두 접종이 광범위하게 시행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편에서 사람들은 우두법이 일본을 통해 전해진 것임을 알고는 그들이 우리를 지배하기 위한 수단으로 우두법을 퍼뜨리고 있다고 수군대기 시작했다.
우두를 맞으면 소처럼 미련하게 되고 또 소처럼 성질이 온순해진다. 살을 찢고 우두를 놓는 것은 조선민족을 소처럼 만들어 침략에 대한 반발을 없애려는 것이다.
이런 반발심은 1882년 임오군란 때 폭발했다. 군란이 일어나자 사람들은 제일 먼저 우두소(牛痘所)에 불을 질렀고, 일시 집권한 대원군은 지석영이 외국으로부터 종두라는 마술을 수입하였다는 죄목을 내세워 체포령을 내렸다.
근대의학에 대한 반감이 일본에 국한되어서만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 서양 의사에 대해서도 조선인들은 유언비어를 퍼뜨리기 시작했다. 외국인들이 어린아이를 잡아 그들의 염통과 눈알로 약을 만들며, 이런 일을 총지휘하는 본부는 약을 만들고 병을 치료하는 병원이라는 것이었다. 개항 이후 조선에서 활동하는 서양인에 대한 반감이, 의료를 시행하는 병원에까지 표출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근대의학을 수용해야 한다는 주장은 정부와 뜻 있는 인사들에 의해 개항 이후 일관되게 제기되었다. 즉 의학은 당시 조선을 근대화하기 위해 시급히 수용해야 할 것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었다. 근대의학은 이미 외과수술 등에서 뛰어난 성과를 낳고 있었으며, 조선정부로서도 그 수용을 통해 자신의 애민정신을 선전할 수 있는 좋은 수단이었다. 따라서 조선의 근대화를 위한 방법으로 의학 도입은 하나의 당위로 주장되기 시작했다. 『한성순보』는 발행 초기부터 의학교 · 종두법 · 위생회 등 근대의학 관련 내용들을 여러 차례 소개하였다.
하지만 앞에서 보았듯이 근대의학의 수용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근대의학의 수용’이라는 원칙에는 동의하면서도 근대의학을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 어느 나라를 통하여 수용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쉽게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고, 그들이 근대의학을 자신들의 대표적인 시혜정책으로 선전하기 시작하면서, 그 수용 문제는 더욱 복잡해졌다. 근대의학 수용의 경로, 방식을 둘러싸고 전개된 이러한 문제는 단순히 의학분야에서만 논란될 성질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우리나라의 자주적 근대화라는 커다란 목표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겪게 될 문제였다.
식민지 의료정책, 누구를 위한 것인가
일본은 1905년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든 후 자신들의 통치정책이 조선인에게 해롭지 않다는 점을 대내외에 선전하고자 했다. 그 내용 중 근대적인 의료정책의 시행은 가장 자주 선전하는 것이었다. 1910년 조선 강점을 알리는 포고에서 총독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종래 조선의 의술은 아직 유치한 정도를 벗어나지 못함으로써 조선사람들은 천수를 다하지 못하였다. 이를 가장 가슴 아프게 여겼던 바 지난번 경성에 중앙의원을 열고 또 전주 · 청주 · 함흥에 자혜의원을 설립한 이래 그 은혜를 입는 자 매우 많다.
보호국이 된 이후 일본이 조선에서 실시한 의료정책으로 조선인들의 수명이 연장되었다는 주장이다. 이제 일본의 조선 강점은 결코 조선인에게 해로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조선인을 위한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될 참이었다.
하지만 조선인들은 일제의 선전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조선인들은 의료 수혜 범위에서 일본인에 비해 차별을 받았으며, 그 수혜 역시 조선인의 실정을 고려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특히 일본 식민지 당국의 의료정책은 조선인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식민정책의 효율성에 중점을 두었고, 또한 강제적이었다는 점에서 조선인의 반발을 샀다. 대표적인 예가 함경남도 영흥에서 발생한 ‘에메틴(emetine) 중독 사건’이었다.
일제는 디스토마를 치료한다는 명목으로 에메틴 주사를 전국적으로 시행하고 있었다. 에메틴 주사는 치료효과가 좋은 반면 중독성이 있어 주사 대상자의 건강상태를 살펴야 했다. 만일 중독증세가 있는 사람에게 계속 주사할 경우 치료할 수 없는 상태에까지 이를 수 있었다. 그런데 영흥에서 에메틴 주사 접종자 100여 명 중 사망이 6명, 중태가 6명, 활동 부자유자가 93명에 이르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와 같은 문제가 발생하자 조선인들은 일제가 자신들의 건강 상태를 고려하지 않은 채 주사를 시행했고, 이미 주사로 인해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에게도 강제로 계속 주사함으로써, 결국 사망자까지 나오게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 당국은 사망한 사람들은 마침 감기가 극성을 부리는 중에 폐렴에 걸려 죽었을 뿐, 에메틴 주사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조선인들로 조직되었던 ‘한성의사회’ 소속 의사들은 영흥의 사망자와 환자들을 조사한 후 “지금껏 그렇게 괴상한 환자를 본 일이 없다”고 말하면서 중독이 틀림없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일제는 감기로 인한 폐렴이 사망의 원인이라는 주장을 되풀이할 뿐이었다. 많이 양보해 보아도 ‘호의로 인한 실책’에 불과하다는 주장이었다. 질병 치료를 위해 시행된 주사를 둘러싸고, ‘호의성(好意性)’을 주장하는 일제와, 무단성(武斷性)을 주장하는 조선인이 대립하였던 것이다.
조선인들이 일제의 의료정책을 단순히 반대하는 데만 머물렀던 것은 아니다. 일제에 의해 실시되는 의료정책을 부정하는 데서 나아가 조선인을 위한 의료를 조선인의 손으로 시행하자는 생각을 갖기에 이르렀다. 그 대표적인 예는 콜레라 유행 때 보인 행동에서 찾을 수 있다.
당시 몇 가지 전염병들은 혈청요법으로 치료할 수 있었지만, 대부분의 질병들은 대증요법이나 자연치유를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전염병 대책이란 환자치료보다는 격리수용에 주안점을 두어, 전염병이 널리 퍼지는 것을 막는 데 주력하는 것이었다. 콜레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 환자 격리를 둘러싸고 문제가 발생하였다.
1920년 8월, 광화문 앞에서 경관이 한 남자를 끌고 가고 있었다. 콜레라 보균자로 의심받은 조선인을 순화원(順化院)으로 데려가는 것이었다. 순화원은 전염병 환자를 격리 · 수용하는 관립 피병원(避病院)이었는데, 당시 수용환경이 열악하여 ‘살아 있는 지옥’이라 불리고 있었다. 남자는 자신을 죄인 취급하며 연행하는 경관에 반항하였고, 평소 일제의 무단적인 의료정책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이 사람 주위로 모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남자를 끌고 가려는 경관에게 그 동안 가슴 속에 담고 있던 불만을 터뜨렸다. “성한 사람을 데려다가 괴질 구멍에 넣고자 하는 원수를 때려 죽여라!”, “조선사람은 아무렇게나 죽여도 괜찮다는 말이냐.” 나아가 그들은 경관에게 돌을 던지며 ‘보균자’를 빼앗아서는, 세브란스 병원으로 데려갔다. 일본인 의사는 믿을 수 없고 조선인 의사는 피해를 입을까 두려우니, 제3자적 입장의 서양인 의사에게 진료를 받기 위해서였다.
이 사건 후 조선인들은 자신들의 손으로 자신들을 위한 피병원을 세우자는 주장을 하기 시작했다. 이 피병원에서는 한방과 양방(洋方)을 병용 치료하자고 했다. 한방 처방이라고 해서 전염병에 대해 특별한 치료법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한방이 우리의 전통적인 치료법이었다는 점에서, 또한 주위에서 쉽게 접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도 가격이 양약에 비해 싸다는 점에서 선호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돈을 모았고, 피병원 설립을 위한 추진 위원회를 결성했다. 그러나 조선인에 의한 피병원 건립까지는 도달하지 못했다. 일제가 제정한 법규를 충족하는 피병원을 스스로의 힘으로 건립하기에는 재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식민지와 파리
다시 처음에 했던 파리 이야기로 돌아가자. 경성부에서 파리를 잡아오면 값을 치러주겠다는 방침을 발표하자 『동아일보』 등 당시 언론계는 지금까지 경성부가 한 일 중에서 가장 잘하는 일이라며 적극적인 환영의 뜻을 밝혔다. 경성부 청사가 파리 시체에 파묻혀도 좋으니 좀더 많이 파리를 사 모으라고 격려까지 했다. 하지만 경성부는 방침을 발표한 지 하루만에 파리 값을 3분의 1로 깎았고, 그 다음날부터는 파리를 사지 않겠다는 발표를 했다. 사람들은 다시 한 번 일제 당국의 무책임한 행정을 나무랐다. 광고지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또 약속을 어기다니!
하지만 어디 한두 번 속는가. 사람들은 다시 한 번 스스로를 다스렸다. 우리가 파리를 산다고 잡고, 사지 않는다고 안 잡으랴! 그리고는 다시 외쳤다. “시민들이여, 파리를 잡으라. 덮어놓고 파리를 잡으라. 우리 자신을 위하여 파리를 힘써 잡으라!”
이렇게 한국의 근대 의료사는 식민지 시혜를 선전하기 위한 일제의 강압적인 정책 시행과 그 속에서 조선인 위주의 의료를 확보하려는 조선인의 노력이 대립하면서 힘겹게 전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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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한 세기는 우리에게 과거 수백년에 맞먹는 변화가 일 어난 격동의 세기였다. 식민지와 전쟁을 경험했으며 이데올로기의 극 한 대립과 과학기술의 놀라운 발전이 한데 뒤..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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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파리를 잡아오세요 – 우리는 지난 100년동안 어떻게 살았을까 1, 한국역사연구회, 역사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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