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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은 20세기를 거치면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생활 어느 분야에서도 맹위를 떨치지 않는 곳이 없게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들은 과거에 그러했듯이 주체성 없이 무비판적으로 과학기술을 받아들이고 있는 듯하다. 아직도 과학기술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 믿는 ‘과학주의’와 국가 경쟁력의 강화를 위해 엘리트 위주의 전문가를 키워야 한다는 ‘경제주의’가 횡행하고 있다. 그 사이에 과학기술이 빚어낸 ‘환경문제’나 ‘자원고갈’ 등은 거의 무시되었으며, 우리의 전통적인 과학기술은 잊혀진 채, 문화적 터전을 잃은 ‘한국과학’만이 망망한 바다에 표류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학기술의 시대인 미래를 어떻게 맞이해야 하는가? 여기서 한번 과학기술의 역사를 돌아볼 필요를 느끼게 된다. 근대 과학기술의 상징인 ‘전기’가 도입되는 모습만 보더라도 새로운 과학기술에 울고 웃은 우리 민족의 애환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한국문화 속에 자리매김한 우리의 과학기술이 절실히 요구된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20세기의 총아, 전기
우리는 ‘전기문화’의 시대에 살고 있다. 한 시각이라도 전기 없는 생활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전기는 이 시대의 필수품이 되었다. 전신, 전등, 전화 등의 발명 이후 100여 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전기는 세계인의 생활 패턴을 바꾸어놓았다. 과학자들은 전기문화가 21세기에도 지속될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다. 그 이유는 전기가 사용하기 편하고 폐기물이 남지 않는 무공해에너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기가 처음 등장하여 자리 잡아가는 과정은 각 나라마다 서로 달랐다. 이는 각국의 과학기술이 자체의 문화적 토양 위에서 서로 다른 발전과정을 거쳤기 때문이다. 미국의 경우 전축, 라디오, 텔레비전 등 각종 전기제품이 보급되면서 대중문화가 크게 변화되었다. 춤과 노래, 파티가 대중생활 깊숙이 파고들어 새로운 오락과 여흥거리를 만들었다. 우리의 경우 이러한 서구사회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우리는 개항 이후 자주적 근대화에 실패하고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도입된 전기는 서구사회와 같이 풍요를 약속하는 것이 되지 못했다. 식민지화, 근대화, 자본주의화, 산업화의 역사 속에서 전기를 비롯한 서구 과학기술의 도입은 일찍이 파란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어쨌든 우리는 파란의 1세기 동안 어엿하게 전기문화를 일구어냈고 그 전기의 편리함에 빠져 살고 있다. 그리고 21세기의 문턱에 서 있는 지금은 컴퓨터 문화, 정보화 사회로의 진입을 재촉받고 있다. 100년 전 전기가 제국주의 침략에서 벗어나 부국(富國)으로 가는 희망을 안겨주었던 것처럼 또 다른 과학기술이 우리 시대의 파랑새 역할을 하고 있다.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자”라는 어느 전국 종합일간지의 대대적인 캠페인은 100년이라는 역사가 지났지만 선진 과학기술을 받아들이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나라 발전에 새로운 전환점을 가져올 것이라는 기대감, 선진국과 우리 현실을 비교하며 가지는 열등감, 빨리 받아들이지 않으면 다른 나라에 비해 뒤쳐질 것이라는 조바심이 그것이다. 어쩌면 서구 과학기술의 수용에 보다 적극적이지 못해 식민지를 경험한 역사가 이러한 조바심을 더욱더 부추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전봇대와 전차의 등장
1881년 12월 5일 김윤식은 영선사(領選使)로 톈진(天津)에 들어가면서 처음으로 전선(電線)을 목격하였다. 그는 일기에 “여기서부터 전선을 볼 수 있는데 이는 톈진에서 상하이에 이르는 것인 바 그 거리는 4천 리가 넘는다. 수십 보 간격으로 전주를 세우고 두 가닥의 동선(銅線)이 이어져 있다. 행인은 그 밑을 왕래하는 데 감히 손상함이 없어 단속규칙이 엄함을 알 수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나라 사람이 남긴 최초의 전봇대와 전깃줄에 대한 묘사이다. 높다란 전봇대와 끊임없이 이어지는 전깃줄, 이는 충분히 처음 본 사람들의 눈길을 끌 만한 것이었다. 더구나 이것이 눈에 보이지 않게 말을 전달한다니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동전 두 푼이면 천리 사이에 말이 통한다며 당시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이러한 전신시설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문명의 이기로서 보급되기보다 외세 침략의 발노릇을 하면서 우리 민족의 미움을 사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우리나라 최초의 전선은 1885년 서울과 인천 사이에 개통되었다. 전신시설은 전봇대의 확보 등 설치과정에 많은 어려움이 따랐지만 그에 못지 않게 관리에도 애로점이 많았다. 그래서 특별히 전신시설의 보호와 관리를 위해 순변(巡弁), 순병(巡兵)을 두기도 했다. 순변과 순병은 전선을 순회하면서 보호하는 하급장교와 병졸을 뜻한다. 전선을 따라 100리에 순변 1명, 10리에 순병 1명 꼴로 배치되어 단선(斷線)과 같은 사고를 막았다. 이들은 간단한 기술도 익혀 단선 정도의 사고는 직접 고쳤다. 이후 전신사고가 빈번해지면서 기술자인 공두(工頭)가 순변, 순병의 업무를 대신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순변, 순병제도는 폐지되었다.
그런데 이 무렵 전신사고가 자주 발생한 것은 흔히 이야기하듯이 당시 사람들의 무지와 몰지각 때문만은 아니었다. 실제 전신은 일반 사람의 생활에 별반 도움을 주지 못하면서 오히려 불편만 끼쳐 얄밉기까지 한 것이었다. 논과 밭을 가로질러 함부로 설치된 전봇대와 전깃줄은 성가신 것이었고 전봇대로 쓰일 나무의 공출과 이를 세우기 위한 부역은 농민들을 괴롭혔다. 더욱이 일제의 손아귀에 있는 전신시설은 동학군과 의병을 탄압하는 도구로 이용되고 있었다. 이에 민중과 의병들은 전신시설을 파괴하고 우체국을 습격하며 저항하였다. 의병투쟁이 활발했던 1907년 100여 개의 우체국이 불태워졌으며, 1909년 77개의 전신주가 파괴되었다. 결국 개항 이후 이 땅에 들어온 전신은 남들이 이를 설치하려 애쓰는 반면에 우리는 이를 파괴하려고 골몰하는 대상이 된 것이다.
한편 1898년에 개통된 전차는 근대화의 상징으로 각광받았다. 고종은 전차가 매우 실용적인 문명의 이기라고 생각했다. 이같은 생각은 고종만이 아니라 양반관리나 지식층에게 널리 퍼져 있었다. 전차는 폭풍 속에서도 달릴 수 있는 매우 빠르고 강하며 편한 것으로 개화 사회의 상징으로까지 여겨졌다. 이는 전차를 통해 서구 과학기술의 위력을 엿보았으며 문명개화된 사회가 가지는 편리성을 동경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분위기였기에 전기기술에 관련된 인적, 물적 자원이 전무한 상황에서, 국내 산업과 경제활동에 대한 아무런 고려도 없이 전차라는 서구 첨단기술을 도입하게 된 것이다.
전차는 1898년 서대문-종로-홍릉 노선을 시작으로 1899년에는 용산-남대문-종로 노선이, 1900년에는 남대문-서대문 노선이 잇달아 개통되었다. 개통 당시 전차의 인기는 매우 높아서 9월 중 하루 평균 승차인원은 약 2천여 명으로 당시 서울 시민의 1퍼센트를 차지할 정도였다. 전차를 타기 위해 생업까지 쉬거나 한 번 타면 내리지 않고 종점과 종점 사이를 몇 번이나 오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전차를 타러 지방에서 상경하는 사람도 많았으며 전차를 타느라고 파산한 사람이 있다는 소문까지 나돌 정도였다.
그러나 전차는 계속 환영받지 못했다. 전차가 개통된 지 일주일 만에 어린이가 치여 죽는 사고가 일어났다. 이 최초의 윤화(輪禍) 사고는 일본인 운전사가 사고를 수습하지 않고 시신을 방치한 채 도망쳐버리는 통에 일대 소동으로 비화되었다. 보고 있던 군중들은 거세게 항의하며 전차 2대를 불태웠고, 전기회사로 몰려갔다. 또한 사람들은 1899년의 극심했던 가뭄이 “용 허리에 해당하는 부분을 끊고 동대문 발전소를 세웠기 때문”이고, “전깃줄이 비를 오지 않게 한다”며 전차에 대한 적대감을 표출하였다. 이에 편승하여 전차로 인해 생계에 타격을 입은 인력거꾼들이 조직적으로 전차의 운행을 방해하기도 하였다.
실제 전차가 개통된 지 4~5년이 지난 후에도 전차는 서울 시민들에게 실용적인 운송수단이라기보다는 흥미롭고 신기한 오락기구에 지나지 않았다. 또한 정부가 기대했던 상공업 진흥에 기여하는 기간산업으로 자리 잡지도 못하였다. 이것은 전차사업이 전차 부설과 그 운영에 따르는 제반 문제, 국내 산업과의 연관성 등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단순히 서구 첨단시설의 편리함과 상징성에만 매달려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양반과 전화, 그리고 교환수
1902년 처음 공중용 시외전화가 설치되었다. 이때 전화가입자는 총 24명이었고 그 중 조선인은 2명에 불과하였다. 전화는 처음 몇 년 동안의 사용 권장에도 불구하고 가입신청자가 크게 늘지 않았다. 이렇게 초창기에 전화가 호응을 얻지 못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당시 사람들은 전화통화 자체를 어색하게 여겼다. 점잖은 처지에 어떻게 전화통을 들고 남과 대화할 수 있느냐는 생각이 지배적이었고 어른을 전화통으로 불러 얘기하는 것이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했다. 전화사고에 놀라 전화통화를 멀리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낡거나 고장난 전화기를 들었다가 감전되거나 고장난 수화기에 귀를 댔다가 “찌” 하는 벨소리에 놀란 다음에는 전화 사용을 기피하게 되었다. 이 경우 사람들은 전화통에 귀신이 붙었다고 오해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정서적인 면에서 전화통화를 꺼리기도 했지만 생활에서도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 도시생활은 복잡하지 않았으며 전화를 가질 만한 상류층은 가까운 거리라면 언제든지 하인들을 시켜 이야기를 전할 수 있었다. 따라서 전화는 멀리 떨어져 있는 지방과 소통하기 위하여 주로 이용되었고 따라서 시내전화보다 서울과 지방 사이의 시외전화가 먼저 개통되었다.
전화는 이렇게 전통문화와 갈등을 빚으면서 20~30년이 지난 후에야 상공인을 중심으로 정착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통신시설의 미비로 인해 전화고장이 잦고 전화교환이 지체되는 일이 자주 빚어졌다. 1920년 7월 18일자 『조선일보』는 이런 짜증나는 광경을 묘사하고 있다.
전화를 한번 하자면 수화기를 들고 전화통 앞에 서서 빨리 나와야 5분 내지 10분이고 그렇지 않으면 30분 내지 1시간 이상 서 있어도 나오는 일이 없으니······ 나중에는 발광을 할 지경으로 발을 구르며 욕설이 입에서 절로 나오게 할 뿐만 아니라 전화통을 깨어 두드려버리고 싶은 생각이 나게까지 한다.
일제는 전화교환이 지체되는 이유를 숙련되지 못한 조선인 여자교환수들 탓으로 둘러대면서 재정투자 부족을 감추려 했다. 교환수들은 노후한 설비를 숙련된 손놀림으로 대체해야 했기 때문에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전화교환수들은 대부분 15세에서 18세까지의 나이 어린 소녀들이었다. 이들은 초등학교 이상의 교육을 받아 당시로서는 고학력자들이었지만 가정형편이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이들의 고달픈 업무는 종종 신문의 기삿거리가 되곤 하였다. “앞에는 손님의 야비한 욕설, 뒤에는 교환감독의 꾸지람”, “어린 몸에 고된 직업 전화교환수”, “고달픈 귀를 더욱 시달리게 하는 주정꾼의 전화” 등의 기사는 나이 어린 교환수들의 애환을 잘 말해주고 있다. 쉬는 시간과 점심 시간은 겨우 10분에 지나지 않았고 감독은 조금도 쉴 틈을 주지 않았다. 교환대는 구식이었으며 여름에 창문도 열 수 없는 열악한 환경에서, 밤 근무 때는 술 취한 주정꾼의 ‘히야카시’ 전화에 시달리고 있었다. 당시 전화교환수는 외견상 개화된 사회의 새로운 직업, “별천지에서 노는 듯한 신선의 직업”으로 보였지만 그 내막은 엄청난 노동강도에 시달리는 소외된 노동자였을 뿐이었다.
무선전화로 불린 라디오
전화가 우리 생활과 문화에 파고들기 시작할 무렵 라디오가 처음 등장했다. 당시 라디오는 전파를 이용해 무선으로 음성을 전달한다는 점 때문에 ‘무선전화’로 불렸다. 초창기 적당한 용어를 만나지 못해 무선전화, 무선전신, 방송무선전화, 무선전화방송, 무선방송 등 여러 가지로 불리다가 무선전화로 정착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라디오를 “유선전화가 무선전화로 바뀌어 사람이 하는 소리를 그대로 어디서든지 들을 수 있는 참으로 가공할 과학의 발달”로 인식하고 있었다. 즉 라디오의 원리는 방송용 전화기(마이크)를 향하여 연설, 담화, 동화, 동요, 창가 등을 하면 그 소리가 멀리 떨어진 청취용 수화기(라디오 스피커)를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들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라디오 방송은 1927년에 처음 전파를 타기 시작했으나 이에 대한 관심은 3~4년 전부터 일고 있었다. 『조선일보』는 1924년 라디오 시험방송을 통해 방송청취 이벤트를 열어 라디오 붐을 조성하였다. 방송을 듣기 위해 몰려드는 인파가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50~60대 노인들까지 죽기 전에 이상한 조화를 한번 봐야겠다며 몇 시간씩 기다렸다고 한다.
당시 최초의 대중매체였던 라디오는 과학기술 문명을 대표하는 상징으로 이에 대한 감탄어린 찬사가 쏟아졌다. 예전에는 몇십 리, 몇백 리 떨어져 있는 사람의 소식을 들으려면 몇 달씩, 몇 해씩 걸렸는데 이제는 몇천 리, 몇만 리 밖의 음성과 동작을 듣고 볼 수 있는 놀라운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가정에서 식사를 하며 목사의 설교를 듣고, 병원 침대에 누워 아프리카 탐험가의 모습을 보는 시대에 살게 되었다는 흥분된 목소리가 1920년대 신문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이같은 신문기사는 서구사회를 유토피아처럼 묘사하고 외세에 의한 문명화를 합리화하는 역할을 하였다. 식민지의 어두운 현실에서 특별한 오락과 여흥거리가 없는 사람들에게 서구의 과학기술 문명은 선망과 동경의 대상을 넘어서 그들의 의식을 마비시키는 환각제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식민지 현실은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조선인들에게 전화와 라디오는 그림의 떡일 뿐이었다. 1924년 서울의 전화가입자 수 총 5천969명 가운데 일본인이 4천875명, 조선인이 951명, 외국인이 143명으로 일본인이 전체의 82퍼센트를 차지하였다. 이것을 인구 비율로 나눠보면 1천명 당 일본인은 60대 정도, 외국인은 37대인 것에 비해, 조선인은 5대밖에 소유하지 못한 것이다.
또한 전기의 경우를 보자. 1940년에 이르러서야 조선인 총가구 420만여 호 가운데 겨우 10퍼센트 정도만이 전기 불빛을 볼 수 있었으나 이때 한국의 도처에 흩어져 살고 있는 일본인 가구 18만 호는 100퍼센트 전깃불을 밝히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민족적 차별감뿐만 아니라 문화적 소외감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문명의 이기와 우리
일제가 떠들어댄 조선의 문명화란 결국 조선에 거주하고 있는 일본인의 문명화를 의미하는 것일 뿐이었다. 조선인은 문명화된 일본인의 생활을 멀리서 지켜보는 소외된 존재로 전락하고 있었다. 1924년 4월 21일자 『동아일보』 기사는 이러한 조선인들의 울분을 대변하였다.
조선인의 서울인가 일본인의 서울인가. 문명의 이기인 전화로 보아도 통곡하지 않을 수 없다. 어찌 전화뿐이랴, 조선 내에 있는 철도, 륜선, 탄탄한 대로, 우편, 전신 이러한 모든 문명의 이기는 그것을 설비하는 비용과 노력은 조선인이 하고 그것을 이용하기는 일본인이 한다. ······ 우리는 조선의 오늘날 문명의 주인이 아니라 종이다. 조선사람아, 우리는 이 문명의 주인이 되도록 전력을 다하자. 만일 그렇지 못하거든 차라리 이것을 깨뜨려버리자.
20세기 초반 과학기술은 우리 민족에게 때로는 환희, 때로는 절망의 대상이었다. 봉건왕조와 양반관리들에게 전신, 전화를 비롯한 전등, 전차, 라디오 등은 근대의 상징이었다. 전등의 찬란한 불빛과 소리가 들리는 상자는 감탄과 경이의 대상이기에 충분했다. 이들은 과학기술의 편리함과 실용성에 찬사를 보냈으며 이것들이 문명화된 세상을 열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 땅의 민중들에게 과학기술은 그다지 효율적이고 편리한 것만은 아니었다. 아직 봉건적이고 전통적인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당시에 제국주의자들이 이식한 과학기술은 실생활과 동떨어진 어떤 것, 단지 이질적인 문화의 하나로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1910~20년대 신문에서는 “과학문명의 시대”가 열렸다고 떠들었지만 이것을 누리는 계층은 극소수였고 오히려 대다수 사람들은 문화적 상실감과 소외감에 시달려야 했다. 하지만 이 시대 사람들은 제국주의 문명이 자신들을 더 가난하고 약하고 천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문명의 주인은 제국주의자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조선과학운동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제국주의자들의 것인 과학기술을 우리 민족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져갔다. 이러한 과학운동의 뿌리는 1908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자강운동이 한창이던 1908년 공업전습소 학생들은 전습소의 학생회 격인 ‘공업연구회’를 조직하였다. 경성고등공업학교의 설립 후 초기 졸업생들은 3·1운동 직후 공업전습소의 공업진흥운동 전통을 계승하여 ‘공우구락부(工友俱樂部)’라는 단체를 결성하였다. 이들은 자신의 기술지식을 이용하여 근대적 민족공업의 발전에 기여하려는 활동을 벌였다.
김용관은 1924년 이와 같은 공업진흥운동의 전통 위에서 발명학회를 창립하였다. 발명학회는 발명을 통한 경쟁력 있는 상품생산이 세계경제전쟁에서 우리 민족이 살아남을 길이라는 취지에서 1930년대 이후 사업을 더욱 확대하였다. 1933년 과학잡지 『과학조선』을 창간하고 1934년에는 ‘과학지식보급회’를 발족하였다. 나아가 본격적인 발명의 진흥을 위해서 발명학회를 넘어서는 발명연구 진흥기관, 즉 ‘이화학연구소’의 설립을 제안하였다. 이러한 김용관의 입장은 당시 조선공업화가 일제 식민지인 조선이라는 지역에서 이루어지는 것일 뿐, 조선민족의 공업화가 아니라는 자각에서 출발한 것이다. 공업화가 진행되면 될수록 조선의 산업은 일제 독점자본에 장악되고, 그 결과 일제가 만든 상품에 종속된 조선민족은 점점 궁핍해질 따름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가 구상한 이화학연구소는 민족의 자주적인 소규모 공업 진흥에 필요한 발명연구소였다.
그러나 당시 과학운동에 참여한 대다수 사회명사들은 김용관의 과학기술진흥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자연과학에는 국경이 없고 민족의 차별이 없을 줄 안다”는 과학주의에 사로잡혀 있었다. 과학은 중립적이며 보편적으로 인류발전에 봉사할 것이라는 믿음과 서구 과학기술은 도입하기만 하면 조선도 근대국가가 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떨쳐버리지 못하였다.
심지어 일제에 의한 공업화가 조선의 문화발전과 경제생활에 이익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생각에서 조선인의 독자적인 과학기술 발달이 불필요하다는 입장을 내세웠다. 결국 1930년대 과학운동은 점차 김용관의 노선이 배제되면서 변질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우리는 앞서 본 “문명의 이기와 우리, 조선사람은 조선 문명의 종이다”라는 경고를 다시 한 번 되새겨 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앞서 살펴본 서구 과학기술의 도입이라는 100년의 역사가 지금의 ‘한국과학기술’을 만들었다. 한국의 과학기술은 핵에너지 개발과 방사능 사고, 산업 폐기물과 쓰레기 처리, 기계의 자동화에 의한 실업률의 증가, 인간의 기계화, 고립된 작업장, 오염물질, 직업병, 약물중독, 자연환경의 파괴, 복제인간과 생명윤리 등 산적한 문제에 직면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과학은 일반인들에게는 쉽게 접근할 수 없는 블랙박스가 되어버렸고 일상생활과는 아무런 연관 없이 움직이는 거대한 괴물이 되어버린 느낌이다. 이러한 문제를 풀 열쇠는 어디 있는가. 우리는 이제 독창적이고 자주적인 한국과학기술의 문화를 만들지 못한 우리의 역사를 반성하면서 그 해결점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서구의 과학기술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 주었는지, 근대화 · 문명화의 이면에 인간애, 민족성, 전통문화가 가려지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과학기술의 진정한 주인이 되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해왔는지를 차분히 생각해볼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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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한 세기는 우리에게 과거 수백년에 맞먹는 변화가 일 어난 격동의 세기였다. 식민지와 전쟁을 경험했으며 이데올로기의 극 한 대립과 과학기술의 놀라운 발전이 한데 뒤..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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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과학기술의 도입 그 환희와 절망 – 우리는 지난 100년동안 어떻게 살았을까 1, 한국역사연구회, 역사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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